우리의 삶을 훌륭한 예술품으로 훈도해줄 가마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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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훌륭한 예술품으로 훈도해줄 가마는 없는가
이천의 도자기 가마



도자기 고을 이천에 살고 있는 친지가 가마에 불을 지폈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나섰습니다. 인후리 산골짜기에 있는 그의 가마에는 흙으로 만든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길이가 10m·높이가 2m·소요된 흙이 10t에 달하는, 도자기가 아니라 작은 산맥이었습니다.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설악산·지리산을 거쳐 다도해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등뼈를 굳히고 있었습니다.
작품이 워낙 크기 때문에 경사진 언덕에 먼저 작품을 놓고 그 위로 벽돌로 가마를 짓고 다시 흙을 덮어 만든 구릉 모양의 오름가마(登窯)였습니다.
도자기란 글자(陶)가 구릉(阝)에 굴(勹)을 파고 그 속에 그릇(缶)을 굽는 모양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흙일을 흔히 '점질'이라 하여 낮추어 부르고 있지만 문화란 원래 '삶의 형식'입니다.
문(文)이란 무늬를 뜻하는 것이며 문화란 삶의 무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잡아온 이 질그릇의 세계는 우리의 문화와 삶을 가장 진솔하게 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천으로 내려오는 길이 내게는 마치 잃어버린 장독대를 찾아나서는 감회를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 긴 유랑을 끝내고 흙으로 돌아온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자연과의 거리가 곧 '문화'의 높이로 여겨지는 세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흙으로 돌아와 백두대간을 만들고 있는 당신의 모습에서 나는 도자기가 단지 밥을 담는 그릇을 넘어 우리의 꿈을 담고 있다는 당신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상감청자(象嵌靑瓷)의 운학문(雲鶴紋)에서 우리는 그 시대가 찾아가던 꿈을 읽을 수 있고 백자의 담백한 기품에서 당시의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소박한 삶의 내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릇이면서 동시에 그릇 이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실용과 현실이되 그 속에 꿈과 이상을 담고 있는, 진정한 문화의 어떤 전범(典範)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아궁이 앞에 앉아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이 바로 문화와 삶에 대한 반성입니다.
두번째로 깨닫게 되는 것은 도자기의 제작과정에서 키워온 과학과 그 과학에 대한 반성입니다.
도자기는 흙과 나무와 불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생명으로 하는 철저한 과학입니다.
물에 섞으면 빚을 수 있지만(可塑性) 불에 구우면 돌처럼 굳어지고(固化性) 유리질이 나타나는 흙의 성질, 즉 태토(胎土)의 성질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합니다.
흙이 녹아내리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온도, 나타나는 색상, 그리고 철·동·코발트 등 안료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월등해야 합니다.
더구나 초벌구이에 씌우는 유약(釉藥·glaze)에 이르면 그것을 얻기까지의 삼엄한 실험정신에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백두대간의 제작에 있어서도 구운 후의 색상과 수축하는 정도를 면밀히 계산해야 하는 상감기법이 채용되고 있음은 물론이고 오름가마의 설계는 열역학과 기체역학에 관한 이해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과학 위에 서있으면서도 결국 '불맞이 굿'이라는 일견 비과학적 사고를 배제하지 않고 있는 태도가 내게는 귀중한 교훈이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과학에 대한 참된 이해를 바탕에 깔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불길의 경로와 온도의 변화, 도자기와 가마가 이뤄내는 가마 속의 복잡한 곡면(曲面), 그리고 그 곡면 속에서 일어나는 무궁한 변화와 우연에 대해 과학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뿐만아니라 기온·습도·바람 등 과학이 예측해낼 수 없는 과학 이상의 웅장한 세계가 엄존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한 다음 결과를 기다리는(盡人事待天命) '정성'과 겸손함 일 것입니다. 필연(必然)과 절대(絶對)와 신념(信念)이라는 정신사(精神史)의 오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연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반성입니다. 이것은 과학에 대한 반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지만 나는 익어나오는 도자기를 한 줄로 늘어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가차없이 망치로 깨뜨리는 행위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엄정한 작가정신이라고 하기엔 자연과 예술에 대한 이해가 협소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조선조 초기 가마에서 나오는 완성품을 놓고 깨뜨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감별하는 파기장(破器匠)이라는 직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관청의 소용이라는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기준에서 요구됐던 것일뿐 엄격한 예술적 재단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망치를 들고 깨뜨리는 소위 작가정신을 당신은 예술에 대한 오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태도는 자기의 감각에 탐닉하는 것이며 예술이나 작가정신이라는 분식(粉飾)속에 감춰진 유희인지도 모릅니다.

자연에 대한 과학의 위상도 마찬가지로 모든 예술작품에 대한 작가 개인의 역할에 대한 반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문화와 예술을 우리의 삶으로부터 유리시키고 결국은 예술과 문화가 '문화자본'(文化資本)으로 전화되어 도리어 우리를 소외시키는 역기능을 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비뚤어진 것은 그것이 있을 곳을 찾아주고, 깨어진 것은 다시 때우고 고치는 것이 더 큰 예술일 수 있다는 합의가 아쉽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나는 가마 앞에 앉아 생각했습니다.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우리들의 삶을 저마다 훌륭한 예술품으로 훈도(薰陶)해주는 커다란 가마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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