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의 끝과 바다의 시작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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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의 끝과 바다의 시작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철산리의 강과 바다



당신은 바다보다는 강을 더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강물은 지향하는 목표가 있는 반면 바다는 지향점을 잃은 물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오늘 한강 하구(河口)에 서서 당신의 강물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강물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골짜기와 들판을 지나 바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숱한 역사를 쌓아가는 살아 있는 물입니다.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어 뛰어 내리고 댐에 갇히면 뒷물을 기다려 다시 쏟아져 내리는 치열한 물입니다.
이처럼 치열한 강물과는 달리 바다는 더 이상 어디로 나아가지 않는 물입니다.
바다로 나와버린 물은 아마 모든 의지가 사라져버린 물의 끝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엽서를 들고 먼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통일 전망대를 찾아 왔습니다. 태백산에서 시작하여 굽이굽이 천리길을 이어온 한강과 마식령산맥에서부터 오백리 길을 흘러온 임진강이 서슴없이 서로 몸을 섞으며 바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다시 물길을 따라 강화도의 월곶리에 있는 연미정(燕尾亭)으로 왔습니다.

마침 밀물 때를 만난 서해의 바닷물이 강화해협을 거슬러 이 두 물을 마중나오고 있었습니다. 드넓은 강심에는 인적없는 유도(流島)가 적막한 DMZ 속에서 잠들어 있고 기다림에 지친 정자가 녹음 속에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강안(江岸)을 따라 강화의 북쪽끝인 철산리(鐵山里)언덕에 올랐습니다.
이곳은 멀리 개성의 송악산이 바라보이고 예성강물이 다시 합수하는 곳입니다.
생각하면 이곳은 남쪽땅을 흘러온 한강과 휴전선 철조망 사이를 흘러온 임진강, 그리고 분단조국의 북녘땅을 흘러온 예성강이 만나는 곳입니다. 파란만장한 강물의 역사를 끝마치고 바야흐로 바다가 되는 곳입니다.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일깨우는 곳입니다. 멀리 유서깊은 벽란도(碧瀾渡)의 푸른 솔이 세 강물을 배웅하고 있 습니다.

나는 오늘 이곳 철산리에서 바다의 이야기를 당신에게 띄웁니다.
당신이 내게 강물을 생각하라고 하듯이 나는 당신에게 바다의 이야기를 담아 엽서를 띄웁니다. 바다로 나온 물은 이제 한강도, 임진강도, 예성강도 아닌 바다일 뿐입니다.
드넓은 하늘과 그 하늘의 푸름을 안고 있는 평화로운 세계일 뿐입니다.

나는 당신이 강물을 사랑하는 까닭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강물은 고난의 시절입니다. 강물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물이되 엎어지고 갇히고 찢어지는 고난의 세월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한강과 임진강·예성강 유역은 삼국이 서로 창검을 겨누고 수없이 싸웠던 전장(戰場)입니다. 지금도 임진강은 휴전선철조망에 옆구리를 할퀴인 몸으로 이곳에 당도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강물의 시절은 이념과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도도한 물결에 표류해온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존엄이 망각되고 겨레의 삶이 동강난 채 증오와 불신을 키우며 우리의 소중한 역량을 헛되이 소모해온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곳 철산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암울한 강물의 시절도 그 고난의 장을 마감합니다.
당신의 말처럼 이제 더 이상 목표를 향해 달리는 물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바다가 됩니다. 목표가 없다기보다 달려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곳은 부질 없었던 강물의 시절을 뉘우치는 각성의 자리이면서 이제는 드넓은 바다를 향해 시야를 열어나가는 조망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강물의 치열함도 사실은 강물의 본성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험준한 계곡과 가파른 땅으로 인해 그렇게 달려왔을 뿐입니다. 강물의 본성은 오히려 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겸손과 평화인지도 모릅니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그 본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며 가장 평화로운 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물이고 평화로운 물이지만 이제부터는 하늘로 오르는 도약의 출발점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목표를 회복하고 청천하늘의 흰구름으로 승화하는 평화의 세계입니다. 방법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최후의 목표로서의 평화입니다.

평화는 평등과 조화이며 평등과 조화는 갇혀있는 우리의 이성과 역량을 해방해 겨레의 자존(自尊)을 지키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함으로써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자유(自由) 그 자체입니다.
당신에게 띄우는 마지막 엽서를 앞에 놓고 오랫동안 망설이다 엽서 대신 파란 색종이 한장을 띄우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언젠가 이곳에 서서 강물의 끝과 바다의 시작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받은 색종이에 담긴 바다의 이야기를 읽어주기 바랍니다.
그동안 우리 국토와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왔던 나의 작은 발길도 생각하면 바다로 향하는 강물의 여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마지막 엽서를 당신이 내게 띄울 몫으로 이곳에 남겨두고 떠납니다.
강물이 바다에게 띄우는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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