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독법
『중용』 역시 예기 제31편으로 들어 있다가 따로 단행된 것입니다. 물론 주자가 장구章句한 것이지요. 장구란 장章(chapter)과 구句(paragraph)로 문장을 재분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주자가 『대학』에 이어 『중용』을 주목한 까닭이 무엇인가를 밝혀야 합니다. 주자는 『대학』·『중용』의 장구뿐만 아니라 『논어』·『맹자』에 관한 이전의 모든 주註를 모으고 재해석하는 소위 집주集註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서집주』를 통하여 사회의 기틀을 새로이 만들려고 했던 것이지요. 『논어』와 『맹자』가 인仁과 의義를 기본 개념으로 하는 사회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읽었습니다. 『대학』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세계와 나의 통일적 담론입니다. 주자가 『중용』에 열중한 까닭도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물론입니다. 『중용』은 당시의 사회적 과제를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는 텍스트입니다. 당시를 풍미하던 해체주의적 문화와 무정부적 상황을 개변하려는 건축적 의지로 일관된 사회학적 동기이며 사명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伋)가 지어서 성조聖祖의 덕을 소명昭明한 것이라고 합니다(공영달孔潁達). 그리고 자사가 도道의 부전不傳을 우려하여 지었다고 합니다(주자). 물론 이러한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언술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중용』을 장구한 이유가 바로 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용』의 독법을 옳게 갖고 가기 위해서는 중용 제1장을 읽기 전에 서두에 붙여놓은 서문(「章句序」)부터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자는 이 서序에서 『중용』을 지은 목적이 무엇인가를 먼저 묻고 자답自答하기를, 자사가 도학道學의 전통이 끊어질까 봐 지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도학의 전통이 도통道統입니다. 이 경우 도학이란 주자가 체계를 세우려고 한 사회 이론임은 물론입니다. 주자는 노불老佛에 대한 견제 심리가 대단했으며 그것이 역설적으로 도통론道統論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리고 도통론은 불교 법통法統 개념인 의발衣鉢 전수의 형식을 본받았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이 서序에서 주자는 정자程子를 빌려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유가의 사회 이론을 도통의 논리로, 즉 학문적 전통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자가 말하기를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庸이라 한다.
중은 천하의 바른 도요, 용은 천하의 정한 이치이다. 이 편은 바로 공
문孔門에서 전수한 심법이니 자사는 그것이 오래되어 어긋나게(差)
될까 봐 염려하였다. (子程子曰 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 中者天下之正
道 庸者天下之定理 此篇 乃孔門傳授心法 子思恐其久而差也)
천하에는 바른 도가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이 바른 도는 역사적 전통에 의하여 그 진리성이 검증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주자가 서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이 「장구서」章句序에서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이 ‘실학’實學이라는 단어입니다. 공문孔門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실학이며 이 실학은 우주와 세상의 원리를 잘 아우르고 있으며 그 의미가 무궁하다는 것이지요(其味無窮 皆實學也). 이 실학 선언이 바로 불교의 허학虛學에 대한 유학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의 천명임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주자가 『예기』의 이 부분을 주목하게 된 이유를 우리는 제1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1장은 『중용』의 전체 구조에서 서론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중용』 제1장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됩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매우 익숙한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
라 한다.
『대학』의 논리 구조와 마찬가지로 『중용』에서도 일관된 통합적 사상 체계를 뼈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성性과 도道와 교敎의 통일입니다.
교는 도에, 도는 성에, 성은 천명天命이라고 하는 객관적 원리에 수렴되는 체계입니다. 개인은 거리낌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법칙과 그것과 통일되어 있는 유교적 원리에 의하여 사회화되어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천명, 즉 궁극적 원리인 도道의 대원大原은 하늘에서 나온 것(出於天)이라는 동중서董仲舒의 주장을 들어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개 사람이 자기의 성性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천天에서 나온 것임은 알지 못하
며, 사물의 법칙이 있음은 알지만 그것이 성性에서 말미암은 것임은
알지 못한다. 성인의 가르침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나의 고유한
바로 인하여 제재制裁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蓋人知己之有性 而
不知其出於天 知事之有道 而不知其由於性 知聖人之有敎 而不知其因
吾之所固有者裁之也)
『중용』이 가장 중요하게 선언하는 것이 바로 이理입니다. 성즉리性卽理입니다. 이理는 법칙성입니다. 이 이가 성性이며 성이 천명입니다. 이 성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도道임은 물론입니다. 도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 즉 솔率해야 하는 것이며, 솔은 노路라 하였습니다. 이 도를 따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바로 교敎입니다. 성과 도는 비록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기품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지나치고 모자라는 차이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사람과 물건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기준으로 삼아 품절品節하여 천하의 질서로 만들어 나가는 것, 이것을 교라고 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 교의 내용이 바로 예악형정禮樂刑政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악형정은 매우 사회적인 개념입니다.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와 정책입니다. 주자가 『중용』에 주목하고 장구한 이유가 이러한 것에 대한 재조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 법칙성입니다. 우리의 태도가 과하든 미치지 못하든, 우리가 그 존재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관없이 객관적 법칙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것이 우리들에게 원래부터 있던 바가 재단되어 나오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주자가 『중용』을 통하여 제기하려고 하는 가장 절실한 주제는 바로 도道의 큰 근원이란 하늘에서 명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따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인간적 도리의 구체적 덕목은 예악형정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사회적 가치라는 것이지요.
이어지는 다음 구절들은 성性, 도道, 교敎를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에도 삼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천명의 보편성 즉 이理의 법칙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법칙성이 다음에 나오는 중中입니다. 중은 미발未發의 상태(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이지만 근본을 점占하고 있는 본체론적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발發하여 중절中節을 이룰 때 그것을 화和라고 하고 있습니다(發而皆中節 謂之和). 성性과 도道가 중中의 개념이며, 교敎는 절도에 맞게 노력하는 화和를 의미합니다. 사회적 질서 즉 예악형정에 어긋나지 않고 절도가 맞는 경우를 화라고 하는 것이지요. 화가 비록 봉건적 질서와 합치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주자는 확실하게 사회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용庸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 즉 봉건 제도와 유교 도덕에 의하여 규범화된 일상을 의미합니다. 일상적인 용用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중용지도’中庸之道가 세계의 근본이며 세계의 보편적 ‘도리’道理라는 것은 유가의 도덕적 규범을 이(天理)로 선언하여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절대적 원리로 올려놓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중中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며 화和는 천하의 달도達道가 되는 것입니다(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나는 여기서 ‘천하’天下라는 어휘에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자가 『중용』에서 강조하려고 한 것이 ‘천지’天地라는 자연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천하’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천하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주자의 학문적 동기가 사회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건축 의지에 있었다고 했습니다만 우리는 주자의 그러한 입장을 『중용』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자의 정신세계는 철저하리만큼 사회적 동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 철학이 중화주의를 자처하던 중국에 문화적 충격으로 나타난 것도 부정할 수 없으며 중국의 사상사에서 결과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심화하는 계기를 준 것도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면의 사회적 과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이 주자의 체계입니다. 그것을 철학적 범주의 확대로 해석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에 더하여 그 자체로서 관념론적 함정에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송대 신유학은 노불老佛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해이해진 사회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당대 지식인들의 지적 대응 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 700년 동안 중국 사회는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사회적 모델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확립된 구성 원리에 의하여 재건된 중국 사회는 명대明代 276년, 청대淸代 267년 동안 중국 사회를 관통하는 ‘초안정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서구 근대사회에 의하여 그것이 다시 한 번 도전받을 때까지 주자가 세운 도통은 확고한 사회 원리로서 굳건히 그 지위를 이어갔던 것이지요. 중국의 유학 사상은 이처럼 송대의 새로운 재편과 중흥을 거쳐 대단히 안정적인 체제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바로 그 견고하고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대응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견고한 구조는 변화에 대한 무지와 지체로 이어지고 당연히 19세기 말 근대 질서의 도전을 맞아 힘겨운 대응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 나라의 경우도 조선 후기 성리학의 완고한 구조로 말미암아 사회 역량의 내부 소모와 전체 과정의 지체를 겪지 않을 수 없었음은 물론입니다.
송대 신유학의 성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異論이 있습니다. 송나라는 북방 이적夷狄, 즉 요遼와 금金과의 싸움에서 결국 두 임금과 3천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완벽한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구차하게 명맥을 이어서 남송이라고 칭하지만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지키기 어려운 수모를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송대의 신유학은 이적과의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줌으로써 정치 군사적 패배를 정신적으로 구원하려는 중화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중국인들의 시선이 내부를 향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신유학의 성립 동기를 찾아보려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종의 자기반성이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점은 오히려 불교적 성찰과 상통하는 것으로 그런 점에서 불교의 영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당나라 이후 과거 제도가 정착되고 관료 제도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중국의 전통적 정치 이상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자신감이 유학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계기에서 비롯되었든 그러한 사상적 기조를 학문적으로 대성시킨 사람이 바로 주자였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쨌든 신유학은 13세기까지 중국이 경험하였던 정치 사회적 성취와 지적 유산이 학문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성공적인 역사 발전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서구 근대 사상에 의하여 치명적인 충격을 받을 때까지 중국 사상과 중국 사회 구조의 견고한 토대가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