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나라 약한 나라
國無常强 無常弱 奉法者强 則國强 奉法者弱 則國弱 ―「有度」
항상 강한 나라도 없고 항상 약한 나라도 없다. 법을 받드는 것이 강하면 강한 나라가 되
고, 법을 받드는 것이 약하면 약한 나라가 된다.
法不阿貴 繩不撓曲 法之所加 智者弗能辭 勇者弗敢爭 刑過不避大臣 賞善不遺匹夫 故矯
上之失 詰下之邪 治亂決繆 絀羨齊非 一民之軌 莫如法 屬官威民 退淫
殆 止詐僞 莫如刑 刑重則不敢以貴易賤 法審則上尊而不侵 上尊而不侵
則主强而守要 故先王貴之而傳之 人主釋法用私 則上下不別矣
―「有度」
법은 귀족을 봐주지 않는다. 먹줄이 굽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이 시행됨에 있어서 지자智
者도 이유를 붙일 수 없고 용자勇者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 과오를 벌
함에 있어서 대신도 피할 수 없으며, 선행을 상 줌에 있어서 필부도
빠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윗사람의 잘못을 바로잡고, 아랫사람의
속임수를 꾸짖으며, 혼란을 안정시키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공평하게 하여 백성들이 따라야 할 표준을 하나로 통
일하는 데는 법보다 나은 것이 없다. 관리들을 독려하고 백성들을 위
압하며, 음탕하고 위험한 짓을 물리치고 속임과 거짓을 방지하는 데
는 형보다 나은 것이 없다. 형벌이 엄중하면 귀족이 천한 사람을 업신
여기지 못하며, 법이 자세하면 임금은 존중되고 침해받는 일이 없다.
임금이 존중되고 침해받는 일이 없으면 임금의 권력이 강화되고 그
핵심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옛 임금들이 이를 귀중하게 여기고
전한 것이다. 임금이 법을 버리고 사사롭게 처리하면 상하의 분별이 없어진다.
법 지상주의의 선언입니다. 법치는 먼저 귀족, 지자, 용자 등 법외자法外者에 대한 규제로 나타납니다. 법 위에 군림하거나 법을 지키지 않는 사회적 강자들에 대한 규제에서 시작합니다.
주周 이래로 규제 방식에는 예禮와 형刑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습니다. 공경대부와 같은 귀족들은 예로 다스리고, 서민들은 형으로 다스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예는 서민들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 이것이 법 집행의 원칙이었습니다. 법가는 주대周代의 이러한 예와 형의 구분을 없앱니다. 귀족을 내려 똑같이 상벌로써 다스리는 것입니다. 유가는 반대로 서민을 올려 귀족과 마찬가지로 예로써 다스리자는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유가의 이러한 방식을 현실을 외면한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의 주장이라고 조소하는 한편, 유가는 법가적 방식을 비열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이지요. 어쨌든 법가는 공평무사한 법치를 주장하며 어떠한 예외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법가의 법치 원칙은 누구를 위한 법치인가 하는 점에서 오늘날의 민주 법제와 구별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법가의 법은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핵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법가 비판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역시 군주는 아니더라도 지배 계층이 법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야 합니다. 입법과 사법을 동시에 장악하고, 금金과 권權을 동시에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대부는 예로 다스리고 서민은 형으로 다스린다는 과거의 관행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범죄와 불법 행위라는 두 개의 범죄관이 있습니다. 절도, 강도 등은 범죄 행위로 규정되고, 선거사범·경제사범·조세사범 등 상류층의 범죄는 불법 행위로 규정됩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소위 범죄와 불법 행위는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도 전혀 다릅니다. 범죄 행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가혹한 것임에 반하여,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더없이 관대합니다.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그 인간 전체를 범죄시하여 범죄인으로 단죄하는 데 반하여,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그 사람과 그 행위를 분리하여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불법성을 인정하는 정도입니다. 이것은 주나라 이래의 관행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역설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법가의 법 지상주의가 인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군주를 위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폄하하고 과거의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은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현실은 물론 사회 구조에 대하여 매우 허약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군주권君主權을 강화하는 법가 이론은 나름의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만이 전국시대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생스럽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로우며, 인仁의 도리는 처음에는 잠깐 동안 즐겁지만 뒤에 가서는 곤궁해진다”(法之爲道前苦而長利 仁之爲道偸樂而後窮)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한비자』 「유도」편有度篇에서 천명되고 있는 이 글은 법을 가장 높은(至上) 데에 올려놓는 법 지상주의입니다. 법이 가장 높은 것일 수 있기 위해서는 필수 요건이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법가에서도 이 점이 간과되지 않고 있는데 한비자가 주장한 법의 기본 성격을 종합해보면 첫째 법의 성문화, 둘째 전국적으로 공포된 공지법, 셋째 전국적인 법의 통일성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형식적 측면입니다. 그러나 형식도 매우 중요합니다. 형식주의란 형태가 일정한 그릇에 담아서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권력의 자의성을 방지하고 권력을 제도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화는 군주 권력의 강화이면서 동시에 군주권의 제한이기도 합니다. 군주권의 제한이라고 하는 까닭은 법이 군주보다 높을 때 비로소 지상至上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법가는 법 지상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이 지상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이 공개성, 공정성 그리고 개혁성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 세 가지의 내용은 법가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서로 통일되어 있는 하나의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고적 사관이 아닌 변화사관에 입각하여 낡은 틀을 허물고 새로운 잠재력을 조직해내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내용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그만큼 단호한 권력이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전국시대는 이러한 변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는 시대 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지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가 정치 상황의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춘추시대 약 360년간은 중앙 정부의 권위가 무너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대의명분이 남아 있는 시기입니다. 물론 보수적 거점들도 남아 있구요. 그러나 진의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마지막 183년간의 전국시대는 어떠한 정신적 중심도 남아 있지 않고 오로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적나라한 시대입니다. 주周 종실宗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오로지 힘에 의한 패권의 추구만이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됩니다. 한비자의 표현처럼 대쟁지세大爭之世입니다.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명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제후들이 인의仁義의 기치를 팽개쳐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정도正道와 이단異端, 고도古道와 신설新說이 우후죽순처럼 각축하는 혼란의 극치를 보이게 됩니다. 빈번한 전쟁에서 패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동력 있는 기능과 구조를 갖춘 강력한 정부가 요청되게 됩니다. 정의나 명분보다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책 대안이 요구됩니다. 치자治者는 더 이상 성인이거나 군자일 필요가 없으며 그 대신 탁월한 전문성을 지녀야만 합니다. 따라서 전국시대는 이러한 변법과 개혁에 대한 저항이 훨씬 줄어든 환경이었음은 물론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지식인을 요구하게 됩니다. 소위 법술지사法術之士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법가의 ‘법’法은 오늘의 법학法學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통치론, 지도자론, 조직론 등 오늘날 정치학 분야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훨씬 광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새로운 정치 상황에 대한 새로운 대응 과정에서 형성된 학파였습니다. 천하 쟁패를 둘러싼 약육강식의 살벌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래의 낡은 방식과 구별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그것도 광범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