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
우리가 지금부터 함께 읽으려고 하는 법가法家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상입니다. 법가는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최후의 6국을 통일했습니다. 다른 학파, 다른 사상에 비하여 그 사상의 현실 적합성이 실천적으로 검증된 학파인 셈이지요. 따라서 법가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법가의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성이란 점에 있어서 다른 학파와 어떠한 차별성을 갖는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
한비자』韓非子에서 예시문을 뽑아 함께 읽어가면서 법가의 성격을 이해하고 다른 제자백가와의 차별성을 확인해가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한비자』는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먼저 「오두」편五蠹篇의 한 구절을 읽기로 하겠습니다.
宋人有耕者 田中有株 兎走觸株 折頸而死 因釋其耒而守株 冀復得兎 兎不可復得 而身爲
宋國笑 今欲以先王之政 治當世之民 皆守株之類也 ―「五蠹」
송나라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다. 밭 가운데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토끼가 달리다가 그루
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후로 그는 쟁기를 버리고 그루
터기만 지키면서 다시 토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토끼는 다시
얻지 못하고 송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되었다. 지금 선왕先王의
정치로 오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그루터기를 지
키고 있는 부류와 같다.
유가, 묵가, 도가는 다 같이 농본적農本的 질서를 이상적 모델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두가 복고적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하여 신뢰를 갖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요. 과거의 이상적인 시대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바로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선왕의 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여기에 비해 법가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모색해갑니다. 법가의 사관을 미래사관未來史觀 또는 변화사관變化史觀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송나라 농부의 우화인 ‘수주대토’守株待兎는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또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 우화가 농부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른 제자백가를 풍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변화하는 현실을 낡은 인식 틀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며, 대응 방식도 미래 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 회귀적이라는 것이지요. 시대를 보는 눈이 없다(無相時之心)는 것이지요. 법가는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학파와 구별되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世事變 而行道異也)는 것이 법가의 현실 인식입니다.
인민이 적고 재물에 여유가 있으면 백성들은 다투지 않는다. …… 반대로 인민이 많고
재물이 적으면 힘들게 일하여도 먹고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투는 것
이다. (人民少而財有餘 故民不爭 …… 是以人民衆而 貨財寡 事力勞而
供養薄 故民爭: 「五蠹」)
요임금과 순임금이 천하를 양보했다고 하지만 당시의 임금이란 오늘날의 노복奴僕보다 힘든 자리였다. 천자의 자리를 양위하는 것은 이를테면 노복을 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현령縣令 같은 낮은 벼슬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치부하는 자리가 되고, 자손 대대로 잘살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남에게 양보하기는커녕 한사코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변화를 인정하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현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의仁義의 정치는 변화된 현실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인의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고삐 없이 사나운 말을 몰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법가의 인식입니다.
유가나 묵가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백성은 임금을 부모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주
장한다. 사법관이 형벌을 집행하면 음악을 멈추고, 사형 집행 보고를
받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선왕의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
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은 부모를 따르지 않을 수 있
는 것이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할 수는 없다. 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은 임금이 자기의 인仁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좋은 정치를 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이다. 해내海內의 모든 사람들이 공자의 인仁을 따르고 그 의義를 칭
송했지만 제자로서 그를 따른 사람은 겨우 70명에 불과했다.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권세를 장악해야 하는 것이지 인의를 잡아서는 안 되
는 것이다. 지금의 학자들은 인의를 행해야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
하고 있는데 이것은 임금이 공자같이 되기를 바라고 백성들이 그 제
자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내용이 다소 길지만 법가 사상의 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법가의 논리에 의하면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의義를 말할 것이 아니라 이利를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지요.
법가의 이러한 변화사관은 한비자의 스승인 순자의 후왕 사상後王思想을 계승한 것입니다. 후왕後王이란 선왕先王이 아닌 금왕今王을 의미합니다. 후왕 사상은 과거 모델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는 현실 정치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자는 “후왕이야말로 천하의 왕이다. 후왕을 버리고 태고太古의 왕을 말하는 것은 자기 임금을 버리고 남의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순자의 성악설과 후왕 사상이 제자인 한비자에게 계승되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한비자는 당시의 내외 정세가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여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여 숱한 시무책時務策을 국왕에게 바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임금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비단 한비자와 한韓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변화된 현실을 인식하고 새로운 사고로 발상을 전환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지요. 다음 예시문은 여러분도 잘 아는 화씨지벽和氏之璧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楚人和氏得玉璞楚山中 奉而獻之厲王 厲王使玉人相之 玉人曰 石也 王以和爲誑 而刖其左
足 及厲王薨 武王卽位 和又奉其璞而獻之武王 武王使玉人相之 又曰石
也 王又以和爲誑 而刖其右足 武王薨 文王卽位 和乃抱其璞而哭於楚山
之下 三日三夜 泣盡而繼之以血 王聞之 使人問其故曰 天下之刖者多
矣 子奚哭之悲也 和曰 吾非悲刖也 悲夫寶玉而題之以石 貞士而名之以
誑 此吾所以悲也 王乃使玉人理其璞 而得寶焉 遂命曰 和氏之璧
―「和氏」
초나라 사람 화씨和氏가 초산에서 옥돌을 주워 여왕厲王에게 바쳤다. 여왕이 옥인을 시
켜 감정케 했더니 돌이라 하였다. 여왕은 화씨가 자기를 속였다 하여
월형을 내려 왼발을 잘랐다. 여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화씨
는 무왕에게 그 돌을 또 바쳤다. 무왕이 그 돌을 옥인에게 감정케 했
더니 또 돌이라 하였다. 무왕 역시 그가 자기를 속였다 하여 월형으
로 오른발을 잘랐다.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이제
그 옥돌을 안고 초산에서 곡을 하였다. 사흘 밤낮을 울자 눈물이 다하
고 피가 흘러나왔다. 문왕이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었
다. “천하에 발 잘린 사람이 많은데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슬피 우는
것이오?” 화씨가 대답했다. “저는 발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
다. 보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니 이것이
제가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문왕이 옥인에게 그 옥돌을 다듬게 하여
보배를 얻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을 화씨의 구슬이라 부르게 되
었다.
이 글은 우매한 군주를 깨우치기가 그처럼 어렵다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한비자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임금들이 법술法術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구슬을 얻고자 하는 마음같이 절실한 것은 아니며, 또 올바른 도를 가진 법술가들이 월형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왕에게 아직 옥돌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