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人爲는 거짓(僞)입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제2장
이 장은 상대주의의 선언이며, 이 장의 핵심 개념은 무위無爲입니다. 상대주의를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무위가 핵심적인 주제가 됩니다. 굳이 하나를 고집할 근거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과 저것은 상대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미美와 오惡,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별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널리 알려진 미美를 미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혐오스러운 것이다.
널리 알려진 선善을 선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만 다시 한 번 노자의 기본 사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위의 사상과 상대주의 사상입니다. 무위란 작위作爲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위이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제1장 유와 무의 통일적 인식에서 이미 표명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2장에서는 위에서 본 것처럼 먼저 미와 선의 개념이 상대적인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 것(싫은 것)이기도 하고, 선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불선이기도 하다는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미와 선의 상대성에 이어서 유무有無, 난이難易, 장단長短, 고하高下 등의 상대성에 대하여 개진하고 있습니다. 노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대립적인 것은 없습니다. 상호 전화轉化될 수 없는 고정 불변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전화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체계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상대주의적 사유에 있어서 개입적 의미의 작위는 불필요하고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여기서는 물론이며, 『노자』 텍스트에서 대부분의 위爲는 인위人爲, 작위作爲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개입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자 사상의 기조는 대체로 유가儒家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인의예지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지요. 예악禮樂, 명분名分, 문물文物 등에 대한 반성과 반문화적 관점이 『노자』 전편을 일관하고 있습니다.
자연이야말로 최고最高, 최선最善, 최미最美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미美와 선善이란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라는 인식이지요. 자연스러움을 외면한 인위적인 미나 선은 진정한 미나 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미美와 오惡를 반대 개념으로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선善의 반대 개념도 악惡이 아니라 불선不善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다움은 가까이하고 싶은 가치로 규정하고 아름다움의 반대는 꺼리는 것, 혐오스러운 것으로 규정합니다. 대단히 합리적인 생각이지요. 선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도 미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가 시대에 갇혀 있고 사회적으로 갇혀 있지요. 초역사적이고 절대적인 미와 선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미와 선은 지역이나 시대에 갇혀 있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미와 선의 그러한 특성을 한마디로 인위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기존의 인위적인 미와 인위적인 선에 길들여진 우리의 관념을 반성하자는 것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제2장은 유가적 인식론과 실천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인식의 상투성을 반성하고, 나아가 실천 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인위적 작풍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2장의 핵심 개념은 인식과 실천의 반성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인위人爲란 것이 곧 거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입니다. ‘위’僞는 인人+위爲입니다. 거짓(僞)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자연을 속이는 것이지요. 개미라는 이름을 붙이고 곤충으로 분류 하는 것이지요. 그 인식에 있어서 자연을 왜곡하여 거짓 인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산을 깎고 물을 막아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지요. 그 실천에 있어서 자연의 운동 법칙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위와 작위 그 자체가 바로 거짓(僞)인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거짓인 셈이지요.
그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위적인 잣대가 개입됨으로써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선 그 내용을 검토하기로 하지요.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이 구절에서는 간단히 말해서 유무有無, 난이難易 등의 구분 자체를 부정합니다. 유有와 무無가 상대적인 것이고 구별할 수 없는 것임은 제1장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어려움과 수월함, 긺과 짧음, 노래와 소리, 앞과 뒤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 간의 차이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못 됩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인위적인 개입이며 불필요한 ‘차이의 생산’이라는 것이지요. 차이의 생산이 곧 자연의 분열이며, 자연의 훼손이며 그것이 곧 인위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차별적 인식이 특히 ‘어려움’, ‘없음’, ‘짧음’, ‘낮음’ 등의 의미를 부당하게 폄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의 상태, 즉 자연의 본성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위적인 구분이 초래할 수 있는 혼란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식에 있어서의 잘못된 인위적 관념을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실천에 있어서의 올바른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성인聖人 이하의 구절이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마땅히 무위無爲하고 무언無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경우의 성인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정치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노자는 유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功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참고로 이와 똑같은 문장이 제10장에도 있습니다.
“생지축지生之畜之 생이불유生而不有 위이불시爲而不恃 장이부재長而不宰 시위현덕是謂玄德”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생지축지’는 낳고 기른다는 뜻으로 그 다음의 ‘생이불유’와 짝을 이루고 있으며, ‘위이불시’는 ‘장이부재’(윗사람이 되더라도 지배하지 않는다)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방식, 즉 성인이 마땅히 본받아야 하는 이러한 작풍이 곧 현덕玄德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덕이라고 하면 『삼국지』의 주인공 유현덕을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덕의 이미지가 이와 유사합니다. 철저히 자기의 주도하에 이끌고 가는 조조의 방식과는 다르지요. 제갈공명이나 관우, 장비 등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눈에 띄지 않게(玄) 일하는(德) 스타일이지요.
결론적으로 『노자』 제2장은 인식론이며 실천론입니다. 그 인식에 있어서 분별지分別智를 반성하고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선악의 구분처럼 천박한 인식은 없다고 합니다. OX식의 이분법적 사고도 저급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저급한 인식을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유무有無, 난이難易, 고저高低, 장단長短은 비교할 것이 아니지요.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굳이 비교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요. 더구나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의식마저도 기존의 인위적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이 장에서,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그 성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춘추전국시대를 지배하는 협소한 인식을 반성하고 조급한 실천을 지양하자는 것이지요. 열린 마음과 유장悠長한 걸음걸이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