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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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未可也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子路」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
   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이 대화에 대하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쓴 내용을 소개하지요. 내가 감옥에서 그 글을 쓸 때 심경이 매우 착잡했습니다. 감옥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나는 비교적 감옥의 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지내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이 구절이 더 심각하게 읽혔는지도 모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자朱子의 주석에는 마을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 또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필시 구합苟合(迎合)이 있으며, 반대로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미워하고 마을의 선한 사람들 또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실實이 없다 하였습니다.

   구합은 정견 없이 남을 추수追隨함이며, 무실無實은 선자善者의 편이든 불선자의 편이든 자기의 입장을 갖지 못함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견이 없는 입장이 있을 수 없고 그 역逆도 또한 참이고 보면, 『논어』의 이 다이얼로그(dialogue)가 우리에게 유별난 의미를 갖는 까닭은, 타협과 기회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면서 더욱 중요하게는 파당성派黨性(parteilichkeit)에 대한 조명과 지지라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이나 중립을 흔히 높은 덕목으로 치기도 하지만 바깥 사회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장치 속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단순화된 징역 모델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보다 더욱 교묘한 편당偏黨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實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징역을 살 만큼 살아본 사람의 경우가 아마 가장 철저하리라고 생각되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宥和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오랜만에 읽어보는 셈입니다. 『논어』의 이 대화가 양극단을 좋지 않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인으로부터 호감을 받는 경우와 만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 둘 다 좋지 않다는 것이지요. 양극단은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위선僞善 또는 위악僞惡인 경우에만 상정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회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구조도 아니며 동시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실상을 최소한 미화하거나 은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다음 글은 『맹자』 「진심 하」편盡心下篇에 있는 구절입니다.

   “내가 향원鄕愿을 싫어하는 것은 사이비似而非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자주색(紫)을 싫어하는 것은 빨강색(朱)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향원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던 나로서는 이 구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감옥을 하나의 마을로 치자면 그 마을에는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기준이 물론 문제이긴 합니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느 곳에나 다수로서의 민중은 존재하는 법이며 다수는 항상 선량하다는 사실입니다.

   『논어』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의 보고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고대국가가 출현하는 시기이며 따라서 당시의 백가百家들은 당연히 사회론에 있어서 쟁명爭鳴을 하였지요. 『논어』는 그러한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붕朋이건 예禮건 인仁이건 사회는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가 근본이라는 덕치德治의 논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사상에 비하여 『논어』가 갖는 진보성의 근거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논리는 계급 관점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군자와 소인은 계급적 개념이며 『논어』는 오히려 주나라 봉건제 아래의 노예적 질서를 옹호하고 있는 사상이라고 비판받게 됩니다. 그러한 비판과 관련하여 마을의 선한 사람과 불선한 사람(鄕人之善者 其不善者)이라는 관점은 비록 오늘날의 계급적 관점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적 관점의 일환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장을 시작하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과거의 사상을 비판할 경우 우리가 가장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바로 비판의 시제時制입니다. 고대 사상을 오늘의 시제에서 평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당시의 사회적 조건에서 어떠한 의미로 진술된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사상은 역사적 산물입니다.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묻히는 것이지요. 당시의 가치, 당시의 언어로 읽는 것은 해석학의 기본입니다. 공자에게 계급 관점이 없다든가 또는 인仁이나 덕德 같은 『논어』의 기본적 가치가 노예주 귀족인 인 계급人階級 내부의 협소한 가치라는 비판은 비판의 시제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어쨌든 우리는 『논어』가 인간관계론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관계론은 특정한 시대의 사회 질서를 뛰어넘는 관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논어』에 대한 접근 경로도 그런 쪽으로 한정하려고 합니다. 그렇더라도 『논어』에 관한 예시 문안을 더 많이 다루어야 합니다만 그러지 못합니다. 몇 가지만 더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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