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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지박.gif 산지박山地剝

  
   산지박괘의 상괘는 산山(☶, 艮)이고 하괘는 지地(☷, 坤)입니다.
   박剝은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박괘는 괘사와 상구上九의 효사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괘가 나타내는 상황과 그것에 대한 독법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려고 합니다. 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剝 不利有攸往
   박괘는 이로울 것이 없다. 잃게 된다.

   박괘는 64괘 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괘입니다. 초효부터 5효에 이르기까지 모두 음효입니다. 음적양박陰積陽剝의 형상입니다. 양을 선善, 음을 악惡으로 보면 악이 득세하고 있는 말세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악으로 넘치고 단 한 개의 양효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한 개의 양효마저 언제 음효로 전락할지 알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붕괴 직전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박괘를 다섯 마리의 고기가 꿰미에 매달려 있는 고단한 형국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산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형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상이지만 천지비괘와 마찬가지로 막힌 괘로 읽고 있습니다. 이 책에 효사를 전부 싣지는 않았습니다만 초효에서 5효까지의 효사는 상床이 그 다리부터 삭아서 무너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박괘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표현하는 절망의 괘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상구上九의 효사가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象曰 君子得輿 民所載也 小人剝廬 終不可用也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소인은 거처를 앗긴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백성의 추대를 받게 되고, 소인은 거처를 앗기고 종내 쓰일 데가 없어진다.

   상구의 양효는 관어貫魚의 꿰미 또는 ‘씨 과실’ 혹은 최후의 이상으로 읽습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내가 좋아하는 글입니다. 붓글씨로 쓰기도 했습니다. 왕필 주에서는 이 석과불식을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독전불락獨全不落 고과지우석故果至于碩 이불견식而不見食”, 즉 떨어지지 않고 홀로 남아 씨 과실로 영글고 먹히지 않는다고 풀이합니다. ‘먹지 않는다’보다는 ‘먹히지 않는다’(不見食),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괘의 상황은 흔히 늦가을에 가지 끝에 남아 있는 감(紅)을 연상하게 합니다. 까마귀밥으로 남겨두는 크고 잘생긴 감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비단 감뿐만 아니라 모든 과일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을 먹지 않고 씨 과실로 남기지요. 산지박 다음 괘가 지뢰복괘地雷復卦입니다. 다음과 같은 모양입니다.

   j_jirae.gif 지뢰복地雷復

   땅 밑에 우레가 묻혀 있는 형상입니다. 씨가 땅에 묻혀 있는 형상입니다. 잠재력(雷)이 땅 밑에 묻혀 있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復은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광복절光復節의 복復입니다. “일양복래一陽復來 일양생一陽生 붕래무구朋來无咎 반복기도反復其道 춘래春來”가 괘사입니다. 친구가 찾아오고 다시 봄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천지비괘를 설명하면서 대성괘 역시 다른 대성괘와의 관계에 의하여 재해석되는 중첩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만 산지박괘는 그 다음 괘인 이 지뢰복괘와 함께 읽음으로써 절망의 괘가 희망의 괘로 바뀌고 있습니다.

   산지박괘에서는 상구가 최후의 양심, 최후의 이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경우뿐만 아니라 한 사회, 한 시대의 양심과 이상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는 메시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희망은 있는 법이지요. 그런 점에서 박괘는 64괘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을 상징하는 괘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는 변증법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 박괘는 흔히 혼돈 세상에서 사상적 순결성과 지조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어려운 때일수록 현명한 판단과 의지가 요구된다는 윤리적 차원에서 읽힙니다. 가빈사양처家貧思良妻, 세란식충신世亂識忠臣,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 등이 그러한 풀이입니다. 가정이 어려울 때 좋은 아내가 생각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충신을 분별할 수 있으며, 세찬 바람이 불면 어떤 풀이 곧은 풀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박괘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 만들기입니다. 희망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비록 박괘의 상전과 단전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희망을 만들어가는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괘는 늦가을에 잎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끝에 빨간 감 한 개가 남아 있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裸木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IMF 사태’ 때 내심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IMF 사태는 우리의 취약한 경제구조를 직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식량 자급률이 27%에 못 미치는 반면 철광석, 원면, 섬유, 에너지 등은 거의 100%를 수입하는 구조입니다. 경제의 거품을 걷어내고 취약한 구조의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 소위 문민정부 출범 때에도 그러한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만 불 소득이라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거품과 허위의식을 청산하고 4, 5천 불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단이 필요했지요. 그러나 그때나 IMF 때나 미봉책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물론 우리가 주체적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종속성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계 경제구조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모든 책임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도 문제가 있지요. 그러한 인식 능력과 의지력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의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엽락이분본’葉落而糞本, 잎은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됩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자립성, 정치적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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