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을 뜨는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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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물을 뜨는 그릇

   『주역』周易은 대단히 방대하고 난해합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강의 서두에서 합의한 바와 같이 ‘『주역』의 관계론’에 초점을 두기로 합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그릇이 집집마다 있었지요. 여러분도 물 긷는 그릇을 한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서로 비슷한 그릇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물 긷는 그릇에 비유할 수 있지만 또 안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물과 현상을 그러한 틀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주역』에 대한 아무 설명 없이 물 긷는 그릇이라느니 안경이라느니 오히려 혼란스럽게 한 것 같군요. 아무튼 『주역』은 동양적 사고의 보편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경』易經이라고 명명하여 유가 경전의 하나로 그 의미를 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왕필王弼도 『주역』과 『노자』를 회통會通하려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거론하겠습니다만 『주역』은 동양 사상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역』은 물론 점치는 책입니다. 점쳤던 결과를 기록해둔 책이라 해도 좋습니다. 여러분 중에 점을 쳐본 사람은 많겠지만 『주역』 점을 쳐본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부류의 의기意氣 방자放恣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보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도 귀신이 있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도 귀신을 만난 적은 없지만 살아가는 동안에 문득문득 귀신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이었습니다. 밤늦게 연구실을 나와서 내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참이었기 때문에 복도의 불을 끄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습니다. 연구실이 6층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지요. 그런데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이 닫히자 여자 목소리가 들렸어요. “올라갑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는 내려가야 하는데 어떤 여자 귀신이 나를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가려나 보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했지요. 아마 복도가 캄캄해서 올라가는 버튼을 잘못 눌렀나 보지요. 당연히 내려가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올라간다는 여자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여자 귀신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귀신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귀신에 대한 생각이 있는 것이지요.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敬畏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神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相, 명命, 점占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觀相 수상手相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경』 「홍범」洪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의난疑難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조정 대신에게 묻고 그 다음 백성들(庶人)에게 묻는다 하였습니다. 그래도 의난이 풀리지 않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로소 복서卜筮에 묻는다, 즉 점을 친다고 하였습니다(汝則有大疑 謀及乃心 謀及卿士 謀及庶人 謀及卜筮). 임금 자신을 비롯하여 조정 대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지혜를 다한 다음에 최후로 점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괘와 백성들의 의견과 조정 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를 대동大同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汝則從 龜從筮從 卿士從 庶民從 是之謂大同). 대학의 축제인 대동제大同祭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지요. 하나 되자는 것이 대동제의 목적이지요.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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