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600년 특별연재/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⑥] 현대사의 감옥에서 발신한 ‘더불어삶’의 메시지 신영복
신동아 200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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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獄)’이라는 한자는 “늑대(·#53398;)와 개(犬) 틈새에서 말(言)을 못하는 형국”이라고 했다. 좌우에 짐승들이 버티고서 말을 감시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한자다. 말은 사람의 몫이요, 짐승은 소리를 낼 뿐이다. 그러므로 감옥이란 ‘소리에 말이 갇힌 짐승의 땅’을 일컫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옥, 그것도 독방에 오래 갇혀 있으면, 어느 순간 갑자기 언어를 잃어버릴 것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혀 감방을 왔다갔다하면서 혼잣말이라도 중얼거리게 된다 한다. 사람이란 역시 피부로 부대끼며 대화를 나누는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20대 후반의 한 청년 지식인이 감옥이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면 온갖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장장 20년이라는 세월이라면, 잃어버린 젊음의 시간을 기억의 어느 한 모퉁이에라도 남기고 싶은 소망을 품게 될 것이다. 젊은 지식인은 자신의 일상과 성찰을 담은 엽서 쓰기를 계속했다. 무질서한 생각을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제 하나를 떠올리면 면벽명상을 거듭한 뒤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어 머릿속에서 정리와 교정까지 끝낸 다음, 누에가 고치실을 뽑아내듯 완성된 문장으로 만들어내는 오랜 작업을 한 것이다.
‘엽서’에 실어 나른 세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그 후 20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그 가운데 5년여는 독방 생활이었다. ‘곱징역’을 산 것이다. 가혹한 역사적 중압 속에서 신영복은 ‘밑바닥의 철학’과 상충하는 관념적 지식의 잔재를 비판적으로 청산하고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인적(全人的) 체득’과 ‘양묵(養默)’에 정진했다. 그는 감옥에서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사색을 엮어 부모와 형수, 계수와 조카들에게 엽서로 실어 날랐다.
1988년 5월 막 창간된 ‘평화신문’에 그 내용이 발췌되어 실렸고, 이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하 ‘사색’)이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사색’이 처음 나왔을 때 이 무명의 낯선 필자에게 독자는 고압전선에 감전되었을 때와 같은 충격을 받았다. 정양모 신부는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축복”이라고 했고, 소설가 이호철은 파스칼의 ‘팡세’, 몽테뉴의 ‘수상록’, 심지어는 공자의 ‘논어’에 비교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신영복이 출옥한 1988년 8월은 민주화의 열기가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던 때였다. 그러나 곧 혼돈이 밀려왔다. 중국에서 벌어진 천안문 사태에 이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국내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1987년 대통령선거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이 패배하기는 했지만 공세적 국면이 유지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운동가가 제도정치권으로 뛰어드는 기회주의적인 작태를 보였다. 당시 신영복은 운동단체는 물론 정계로부터도 많은 러브콜을 받았지만 일절 응하지 않았다.
‘사색’은 독서시장에 나오자마자 단박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넓은 의미의 인문학적 사유를 담은 책들이 시장에서 외면당하기 일쑤이던 1980년대 후반 이른바 보수회귀의 시대에, 독자들은 왜 책으로 세워진 ‘신영복의 학교’에 기꺼이 입교했을까. 사회적으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이 ‘사색’을 읽고 난 뒤 남긴 독후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신영복의 글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사회와 인간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냉철하고 준엄한 비판의 칼이 들어 있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삶을 배우고 문장의 극치에 도달한 아름다움을 배우는 것이다.”(조정래)
“봉함엽서 한 장 분량에 쏟아져 있는 글을 읽고 나면 바로 다음 글로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밀도 있고 감동이 있는 글이다. 어떤 때는 책장을 편 채로 가슴에 대고 멍하게 생각에 빠진 적도 있었다. 책 한 권을 읽는 데 두 달이나 걸렸다.”(유홍준)
그의 ‘대학시절’
한 권의 책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울림을, 그것도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면, 그 책은 곧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동아일보’는 창간 80주년인 2005년 ‘책 읽는 대한민국’ 시리즈 중 두 번째로 ‘21세기 신(新)고전 50권’을 소개했다. 다양한 장르의 전문가가 추천한 책들에 신영복의 ‘사색’이 당당히 신고전의 하나로 꼽혔다.
신영복은 우리 사회 지성사에서 ‘지연된’ 희망이었다. 오랜 세월 야적장에 방치됐던 돌이 고통의 정으로 자신의 모난 부분을 쳐내려나가 마침내 주춧돌로 쓰이게 된 것이다. 신영복 개인에게는 시련의 세월이었을지 모르지만 역사는 그를 요긴하게 쓰기 위해 긴 세월 가두어두었는지 모르겠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감옥은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감옥에서 사람을 만나고 같이 지낸다는 것은 바깥세상에서 악수하고 헤어지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징역살이에서 도덕적 가식을 부리거나 실상을 은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알몸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 속에서 스스로 낮출 수 있는 데까지 낮춰 더 낮아질 수 없게 되고, 마침내 깊어진 그의 사유는 읽는 이로 하여금 부끄러움과 경이를 느끼게 만든다. 그것이 ‘밑바닥 철학’이다.
“지독한 ‘지식의 사유욕’에, 어설픈 ‘관념의 야적(野積)’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늦게 깨달은 저의 치부였습니다. 사물이나 인식을 더 복잡하게 하는 지식, 실천의 지침도, 실천과 더불어 발전하지도 않는 이론은 분명 질곡이었습니다.”(‘사색’, 1977년 6월8일 엽서 중에서)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타당성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사색’, 1981년 10월6일 엽서 중에서)
감옥은 책이나 교실에서 인식한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인식을 할 수 있게 한 또 다른 ‘교실’이었다. 가령 “목수가 집을 지을 때는 지붕부터 그리는 게 아니라 일하는 순서대로 주춧돌부터 그리는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신영복의 ‘사색’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바탕은 수행자의 철학과 많이 닮아 있다. 감방에서 보낸 시간을 신영복 자신은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했다.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틔우고, 수많은 ‘하층민’과 부대끼면서 그는 민중을 몸으로 익혔다. 게다가 양화, 봉제, 목공, 영선, 페인트칠까지 익히고 나왔으니 그야말로 ‘인생대학’이었는지 모른다.
혁명적 인간상에 대한 성찰
‘사색’을 대했을 때 관심이 가는 분야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또 변할 수 있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혁명적 인간’으로서의 신영복에 주목했다. 검열을 통과해야 하는 편지 모음이니만큼 그런 부분은 대단히 절제되거나 은폐되어 있지만, 그 절제와 은폐 뒤에 정서적 울림이 깊게 드리워져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라면서 김명인은 다음의 구절을 들었다.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宥和)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사색’, 1983년 7월29일 엽서 중에서)
혁명가란 아파하는 사람, 역사의 질긴 부채를 떠안은 사람이다. ‘사색’에는 분노와 연민을 미덕으로 느끼게 만드는 대목이 있다.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며 아리안의 영광과 아우슈비츠를 생각한다. 잔디만 남기고 잔디 외의 풀은 싸그리 뽑으며 남아연방을 생각한다. 육군사관학교를 생각한다. 그리고 운디드니의 인디안을 생각한다. 순화교육시간에 인내훈련 대신 잡초를 뽑는다.”(‘사색’, 1984년 9월14일 엽서 중에서)
순화교육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수인들 옆에서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며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들, 운디드니의 인디언들을 생각하고, 그러면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응시하는 장면 역시 혁명적 인간의 시선과 무관할 수 없다고 김명인은 보았다. ‘사색’에서 이런 혁명적 인간상에 대한 성찰을 빼버린다면 자칫 ‘공자님 말씀’과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름 징역살이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신영복의 화두가 늘 사람과 사랑이라고 보았다. 현대인에게 사람과 사랑이란 진부한 주제일지 모르며, 현실 변혁에만 오로지 몰두하고 있는 이른바 변혁주의자들에게는 공허한 종교적 메시지로 들릴 수도 있다. 사람을 통해서 사회를 보지 않고 사회를 통해서 사람을 읽으려는 변혁적 시각에 대해 신영복은 ‘한겨레신문’ 1991년 12월20일자 정운영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회의 모순구조 속에 이해와 애정으로 연대된 지식이라야 객관적 지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갖는 것이며, 그러한 지식인이라야 지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신영복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사람은 출발점이고 종착점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회이고, 사회가 나아가는 모습이 역사입니다. 어떠한 제도나 이데올로기도, 또 그것을 이루어내는 역사도 최종적으로는 훌륭한 사람들의 훌륭한 삶을 위한 것입니다…사람과의 사업이 곧 사회적 실천이고, 사람과의 사업 작풍이 곧 대중성입니다.”
오랜 감옥생활을 통해 신영복은 사람을 통해 사회를 읽는 독법을 체득했다. 사실 우리가 그 어떤 진보를 이룬다한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신뢰나 애정과 무연하거나 오히려 해치는 것이라면 과연 무엇을 위한 진보인가.
1985년 8월28일 계수씨에게 보내는 편지 ‘여름 징역살이’에서 신영복은 낮고도 비천한 곳에서 사람을 거울로 삼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숙성된 시련은 아름답다
이 편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사람과 사랑에 대해 가을의 차가운 물처럼 정갈하고 냉철한 인식을 일깨워주고 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그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욱이 그 미움의 대상이 자신의 고의성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때때로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해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다.
이 편지는 평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인간의 일그러진 본능과 그 그늘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교도소 바깥 사회에서는 어떤가. 과연 우리는 증오의 원인과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가. 혹시 우리는 사회적 차원의 증오를 끌어들여 자신의 이익과 만족을 합리화하지는 않았는가. 사랑마저 그런 셈법에 익숙해 있는 것이 아닐까.
숙성된 시련은 사람을 아름답게 한다고 고은은 평가했다.
“모진 시련은 인간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드물게는 그것은 인간을 승화시키기도 합니다. 신 교수는 지난날 긴 시간의 시련을 통해서 그 자신을 어떤 증오나 착각에 파묻히게 하는 교조적 황폐화 대신 그 자신을 간단없이 단련하였습니다. 그 정신으로서의 절도는 가히 수행의 그것이었고, 고금을 오고 간 지식의 오랜 섭렵은 기도와도 방불하였습니다.”(신영복, ‘더불어숲’, 1998년, 중앙M&B)
아슬아슬한 임사 체험
한국인에게 지난 세월은 숨가쁘게 달려온 시간의 궤적이었다. 사색이니 성찰이니 하는 말이 사치스럽게 여겨졌을 정도로 속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 시절에 1968년부터 1988년까지를 귀양살이한 사람이 신영복이다. 그가 감옥이란 삶의 캄캄한 막장에서 빛나는 사색의 광물을 연금해내기까지의 전사(前史)는 어떠했는가.
신영복은 1941년 경남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밀양이지만 출생지는 의령이었다. 아버지가 교사가 한 명뿐인 간이학교의 교장으로 의령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는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다. 195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으며, 입학한지 꼭 1년 만에 4·19를 겪었다. 그로부터 5·16까지 1년여 짧은 기간을 통해 그는 ‘푸른 하늘’을 보았다. 그 감동은 그를 지금까지 지탱해준 원동력이었다. 비록 독일어 원서를 교재로 했지만 ‘자본론’ 강독이 정식 과목으로 개설됐고, 학생들은 ‘공산당선언’ 같은 문건을 번역해서 세미나를 열 수 있을 만큼 자유를 누렸다.
곧이어 5·16의 반동이 왔다. 4·19 이후 돋아나기 시작했던 통일운동과 노동운동 등 각 부문운동의 새싹이 무참하게 잘려나갔다. 한때 박정희를 민족주의자로 오독하거나 그의 좌익 경력에 허망한 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던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다음 순간 박정희를 ‘권총 찬 이승만’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배후에 미국이라는 거대한 외세가 있어 4·19를 내리누르고 있다고 그들은 보았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제대로 된 학생서클이 필요하다고 절감한 신영복은 서울대 상대에 본격적인 독서서클을 만들었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 같은 문건을 번역해 돌려 읽고,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를 번역해서 회람했다. 이들이 대학노트에 깨알같이 번역해서 돌려 읽던 문건들은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모두 중앙정보부에 의해 증거자료로 압수됐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 신영복은 주로 다른 대학이나 연합서클 지도에 주력했다. 당시 경제학과 대학원에는 한 해 선배로 안병직과 신용하가 있어 친하게 지냈다. 지금은 뉴라이트의 좌장 격인 안병직은 당시 매우 좌파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신영복은 대학원을 마칠 무렵인 1965년 2학기 또는 1966년 초에 ‘청맥’이란 잡지의 예비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원’ 모임에 참석한다. 그리고 여기서 6,7년 선배인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몇 차례 만났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 구성원들이 당의 공식기관지로 만든 잡지로 반미적인 논설이 가끔 실렸다. 신영복은 그때만 해도 대학원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강사였고 새문화연구회의 막내인지라 적극적인 역할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1968년 8월24일 악명 높던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했다. 북한에 연계된 6·25전쟁 이후 최대의 공산당 지하조직을 일망타진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이 사형당했고, 신영복은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모두 여섯 차례나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꼬리표가 붙었다가 정상참작(?)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통일혁명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김질락 외에는 통혁당 지도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음에도 통혁당의 지도간부로 간주된 무기수 신영복이 이렇게 탄생했다. 그는 나중에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자신이 통혁당 지도부가 된 것을 알았다. 젊은 날의 아슬아슬한 임사(臨死) 체험이었다.
‘생환된 역사’와 대면
대법원에서 무기형이 확정된 후 신영복은 1970년 9월 안양교도소로 이감됐다. 그가 20년 감옥생활 가운데 꼬박 15년을 보낸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것은 1971년 2월이었다. 대전은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좌익 사상범이 많았다. 6·25전쟁 당시 부역사건으로 걸려든 사람도 많았고 빨치산 출신도 있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공작원과 안내원도 있었다. 신영복은 이들을 통해 역사를 다시 ‘읽었다’. 책을 통해 배운 역사를 삶으로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환(生還)’된 역사였다.
감옥생활을 통해 신영복은 해방공간이란 격동기를 살았던 옛 혁명가들을 만나 그야말로 피가 통하고 숨결이 배어 있는 역사 그 자체를 접하게 된다. 이후 그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과 인간적 이해와 공감을 같이하기에 이른다. 그 시절 한학에 조예가 깊던 노촌(老村) 이구영과 4년간 ‘한 방 생활’을 한 것을 그는 행운이라고 추억했다. 한학자답지 않게 노촌은 사회주의적 사고를 체화했고 고전에 대해 진보적 해석을 내리는 인물이었다.
걸어 나온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은 1988년 8월15일, 감옥에 잡혀간 지 꼭 20년 20일 만에 출옥했다. 성공회대학은 1989년 3월부터 그에게 강의를 맡겼다. 그가 젊은 학생들을 만나던 이 ‘경제원론’ 강의실은 늘 ‘무기수의 강의’를 취재 온 기자들로 북적댔다. 이어 ‘한국사상사’와 ‘중국고전강독’에서는 감옥에서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준거틀을 동양고전의 지혜와 가치에서 찾고자 탐색한 내용들을 강의로 이었다. 당시 그의 신분은 비정규직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8년 5월에야 그는 사면복권되어 정규직 교수가 된다.
감옥살이 20년, 출소 후의 칩거생활 7년 후인 1996년에 신영복은 ‘국토와 역사의 뒤안길에서 보내는 엽서’라는 부제가 붙은 ‘나무야 나무야’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그가 ‘독보권(獨步權)’을 행사한 첫 여행기로, ‘사색의 현장 확인기’ 또는 ‘걸어 나온 사색기’다. 이 책에 실린 25편의 글 하나하나는 깊은 사색과 뛰어난 연상,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가슴으로 씌어진 것으로, 마치 다른 종(種)의 나무들이 각각의 특성을 지닌 채 함께 어울려 ‘숲’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영복은 고향 산기슭 밀양의 얼음골에서 출발해 전국의 산천을 두루 돌아, 높은 산에서 낮은 계곡으로, 다시 더 넓고 낮은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여정을 밟는다. 대체로 책의 전반부에서 그는 방문지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성찰을 대립적 요소와 모순의 실체를 통해 보여준 뒤, 후반부에 이르면 화해와 평등, 겸손과 자유,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나무’는 그에게 평화로 가기 위한 메타포다. 더불어 숲을 이룸으로써 나무는 ‘기계의 부속’이 되기를 거부할 수 있으며, ‘쇠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여정의 마지막으로 신영복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합류하는 강화 철산리 앞바다에 선다. 강물의 시절이 이념과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도도한 물결에 표류해 온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를 보여준 것이라면, 철산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강물의 시절도 그 고난의 장을 마감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신영복은 강물의 끝과 평화의 세계로 향한 바다의 시작을 그의 마지막 엽서에 띄우고 이 책을 끝맺는다.
실존 탐사문 ‘더불어숲’
‘나무야 나무야’가 나온 지 2년 뒤인 1998년 신영복은 그의 생애에서 첫 해외 여행길에 올랐다. 그가 처음으로 여정에 오른 날은 공교롭게도 28년 전 대법원에서 최종판결이 내려진 바로 그날이었다. 1심과 2심에서 이미 사형언도를 받았던 신영복으로서는 생사의 갈림길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28년 후의 이날 세계로 처음 나가보게 되었으니 어찌 남다른 감회가 없었으랴. 신영복은 해외 여행길에서 ‘새로운 세기의 길목에서 띄우는 신영복의 해외엽서’를 국내로 띄웠다. 훗날 이 해외엽서는 ‘더불어숲’으로 엮여 나왔다.
신영복은 이 책을 통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향해 처음 출항했던 스페인의 우엘바 항구에서 중국의 태산(泰山)과 취푸(曲阜), 황허(黃河)에 이르기까지를 다니면서 느낀 감회를, 마치 가을날 벤치에 앉아 있는 산책객에게 나뭇잎 한 장이 떨어지는 ‘인상’으로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이 엽서 속에서 신영복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함께 담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또 이 책을 통해서 현대사회에 유폐 또는 감금된 과거 사건을 현재로 생환시키면서 과거에서 미래까지를 탐사하고 내다보는 역사 서술의 새로운 지평, ‘실존 탐사문’의 개념화를 보여주었다.
전세계를 날아다니면서 그가 확인한 것은 현대의 인간주의가 쌓아올린 반(反)인간주의의 귀결이 이제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신영복이 보기에 ‘자본주의’는 우리가 매일매일 충족시키고자 하는 “무한한 허영과 욕망”과 바로 연결됨으로써 그 어느 누구도 ‘자본’ 때문에 벌어진 사태로부터 면책될 수 없게 했다. 우리와 무관한 듯 보이는 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대한민국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스페인 내전의 확대판이 6·25전쟁이며, 인간 중심의 자기완성을 추구했던 아테네 민주주의의 자만은 과속성장을 한 대한민국의 국민적 허영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더불어숲’ 1,2권에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는 역사는, 고대로 향하는 역(逆)주행을 통해 문명의 원초적 리듬을 확인하면서, 현대의 비극적 탄생과 해방을 약속하는 시간과 공간의 보편사를 거쳐, 세계화의 추악한 현전(現前)을 보여주는 후기현대에 이른다. ‘더불어숲’ 1권에서 이미 신영복은 세계화를 “선진자본이 머리가 되고 중진자본이 몸이 되고 그보다 못한 자본이 발이 되는 구조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체제와 불평등 분업의 상호침투라는 이중구조”라고 분석한 바 있다.
인간 역사에 대한 반성문
신영복은 ‘더불어숲’을 통해 인류의 삶의 과정을 ‘존재’의 윤회가 아니라 ‘관계’의 윤회라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악연이 수많은 비극적 삶으로 이어지는 괴로움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런 관계에서 보자면 ‘나’도 결코 어떤 관계로부터 일체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나는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지구문명의 주류에 관해 전달하고자 하는 문명비판적 메시지를 떠나, 이런 물음과는 무관하게 굴러가는 일상의 맥락 속으로 뚫고 들어와 우리의 가슴에 파고든다.
‘더불어숲’은 현재의 수준에 도달한 지구문명 전체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욕망충족의 종말은 끝내 파탄일 수 있다는 경고가 그 속에 담겨 있다. 이런 우울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신영복의 여행기, 아니 ‘인간 역사에 대한 반성문’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반성문이 자기비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불길을 되살려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생존과 인간의 연대, 인간과 인간의 연대와 자연과의 상생, 또는 “우리 ‘더불어숲’이 되어 지키자.” 이를 통해 그는 “동시대의 평범한 사람들과 더불어”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길을 만들어갈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더불어숲’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자기완성’이라는 고전고대적 인간주의와 ‘인간다운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근대적 인간주의를 넘어 ‘인간과 인간의 연대에 기초한 자연적 인간의 지향’이라는 ‘새로운 인간주의’의 탐색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새로운 인간주의의 실천을 위해서 신영복은 “모든 깨달음은 오늘의 깨달음 위에 내일의 깨달음을 쌓아감으로써 깨달음 그 자체를 부단히 높여 나가는 과정의 총체일 뿐”이라고 했다. 이러한 깨달음이 지극히 낮은 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각성’일 경우 그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달성’이라고 그는 보았다.
오늘날의 지구적 산업화, 지구적 시장화의 동력은 자본운동과 욕망충족의 기본코드로 우리의 생활문화에 거의 ‘제2의 자연’으로 내장돼 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국제적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가 그 한계점에서 마침내 폭발음을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안 패러다임이 창출되기까지 세계는 엄청난 갈등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야 하는 형국이다.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빠지고 세계적 헤게모니의 중심이 흔들리면서 문명의 계절도 바뀌게 되었다. 인간이라는 종(種)의 능력과 그간 살아온 역사의 성과물로서의 문명의 성패가 이렇게 총체적으로 가파른 벼랑길에 들어선 적은 일찍이 드물었다. 바로 이런 때를 맞아 신영복의 ‘더불어숲’은 새로운 세기 경영에의 몸가짐과 깨달음의 누증(累增)을 통해 우리의 시선이 향할 방향을 조준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동양의 고전을 강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천년 묵은 동양사상의 진실을 오늘의 독서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자로 된 원문을 한글로 풀어야 한다. 또 옛날의 동양이 농경사회였음에 반해 오늘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기에 다시 한번 해석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에 신영복의 지적처럼 “오늘날 당면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독법의 전과정에 관철되기 위해서” 우리네 삶이 맞닥뜨린 문제에 대한 통찰도 겸비해야 한다.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대안을 모색하려면 겹겹의 어려움을 뚫고 나가야 한다.
2004년 12월에 나온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 신영복은 주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라는 거대한 사회변혁기에 쓰인 동양의 고전을 통해 사회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시도했다. 옛것을 논하되 미래로 난 길을 가리키는 팽팽한 긴장과 진지함이 책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강의’는 유교 고전인 ‘시경’ ‘서경’ ‘주역’에서 시작하여 ‘논어’ ‘맹자’를 거쳐 도가(道家)사상의 텍스트인 ‘노자’ ‘장자’를 통과한다. 나아가 ‘묵자’ ‘순자’, 법가사상을 아우르며, 불교의 화엄학(華嚴學)을 지나 송(宋)대 성리학의 ‘대학’ ‘중용’에 도달한다. 동양사상 전반을 이렇게 두루 섭렵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양사상을 이렇게 다양하게 훑어보면서 신영복이 그것을 일관하는 화살 같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서양사상의 키워드가 ‘존재론’이라면 동양사상의 핵심은 ‘관계론’이라는 것이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는, 동양고전의 핵심을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맺고 또 잘 소통하는 것’으로 보는 신영복의 생각은 “‘장자’의 ‘고기를 잡았거든 망태기를 버리라(得魚忘筌)’는 구절을 도리어 ‘고기를 버리고 그물을 만들어라(忘魚得網)’는 말로 고쳐 쓰는 데서 정점에 달한다”고 했다. 신영복은 그 이유로 동양사상에서 “모든 사물과 사태가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화이부동’에서 배워야
동양의 고전에서 배워야 할 미래의 가치로 신영복은 무엇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논리를 내세운다. 오늘날 극좌와 극우는 다른 것 같지만 실상 동전의 양면이란 통찰을 그는 보여준다. 둘 다 자기의 주장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동(同)의 논리’라는 점에서 동질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하는 것으로, 새로운 문명은 ‘동의 논리’를 넘어 ‘화의 논리’를 지향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화이부동’할 때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되면서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강의’의 설득력은 감옥에서 체득한 ‘아름다운 관계 맺기’와 최악의 상황에서도 끈을 놓지 않았던 ‘희망 만들기’의 체험이다. 가령 ‘주역’의 64괘(卦) 가운데 가장 힘든 상황을 나타내는 ‘산지박괘(山地剝卦)’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가슴뭉클한 감동을 안게 된다.
“산지박괘는…일반적으로는 어려운 때일수록 현명한 판단과 의지가 요구된다는 윤리적 차원에서 읽힙니다…그러나 박괘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 만들기입니다…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신영복 자신이 오랜 산지박괘의 처지에 놓여 있었음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데서 나온 설명으로, 이런 관점이 ‘강의’를 도덕이나 관념, 개인주의에 주저앉지 않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화여대 이규성은 신영복의 고전독법 관점이 “사회구조와 인간성의 문제를 서로 연관시키고 역동적인 변형 가능성의 지평에서 보았다”고 해석한다. 이규성은 또 “주관·객관을 포괄하는 이 지평은 관계의 범위를 확장하여 국내 경제질서 및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의 연관으로 나간다”고 보았다.
이규성은 이러한 문맥에서 신영복의 고전독해 방법은 과거의 가치를 현재와 미래에서 되살려 음미해보는 회상과 희망의 좌표 위에 있으며, 그러한 시간의 좌표 위에서 신영복은 고정된 권력 중심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또한 신영복은 인간과 사회 및 우주를 관계주의적 형이상학을 토대로 해서 이해하고, 그것을 고전 독해의 방식에 적응하여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가늠해보고 있다고도 했다.
신영복은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다.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린 ‘처음처럼’이란 소주 상표의 글씨도 그가 썼다. 민주화운동 관련 기념물에는 그가 도맡아 글씨를 쓰기도 했다. 어려서 할아버지께 잠시 배우다가 놓았던 붓을 옥중에서 다시 잡아 익혀 나갔고, 만당(晩堂) 성주표(成柱杓),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의 지도가 곁들여졌다.
과거 우리의 한글 글씨체는 정적이고 귀족적인 취향의 궁체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궁체로 신동엽, 신경림의 시나 민요 또는 운동현장의 뜨거운 목소리를 담아내기란 어딘지 맞지 않았다. 신영복은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두고 오래 고심하던 중 어머니의 모필 서간체 글씨를 보면서 깨달은 바 있었다. 그는 이 필법을 도입하여 궁체에 대비되는 ‘민체(民體)’ 또는 ‘연대체(連帶體)’ ‘어깨동무체’로 불리는 서체를 새로 개발했다.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은 독특한 서체가 이렇게 해서 나왔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모든 예술작품은 내용이 그 형식을 규정”한다.
서예는 인간 그 자체를 담아낸다. 신영복의 글씨는 그의 오랜 감옥살이와 무관할 수 없다. 조선시대 서예의 대가 중에서 원교 이광사나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이 모두 귀양살이에서 그들의 서체를 완성했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대합조개가 오랜 인고와 자기절제의 단련과정에서 진주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고나 할 것이다.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
2006년 성공회대 성당에서는 신영복의 고별강의가 있었다. 17년간의 교수생활을 마감하면서 신영복은 이날 ‘주역’의 64괘 가운데 ‘박괘’의 ‘석과불식(碩果不食)’을 주제로 삼았다. ‘석과’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으로 남은 과실로, 신영복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며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라고 한국 사회에 대해 희망의 출구를 열어놓았다.
신영복은 이날 “엄청난 외세에 떠밀리고 불의의 폭력에 가위눌리며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한다”면서, “나무는 짧고 숲은 길다”고 했다. 숲은 전체로서의 완성을 뜻하며 나무(개인)의 결함까지 품는다는 점에서 ‘나무의 완성’이라고 그는 일깨웠다. 신영복은 “개인이 자기 인생을 살 때 그 개인의 삶 속에 그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앞으로도 우리 시대의 요구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국의 민족문제는 과거나 현재나 주로 좌파 혹은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몫인 경우가 많았고, 신영복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 그가 한반도의 분단체제, 통일문제에 대해 쓴 글은 거의 없고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그 편린을 더듬어볼 수 있다. 여기서 그 전체상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개괄적으로 보자면 20세기의 역사가 기본적으로 존재론적 패러다임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는 관계론적 패러다임의 정립이 중요하며, 한반도의 미래 역시 그런 문명론적 구상 속에서 진척되어야 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그는 강대국의 식민지 경영, 초국적 금융자본의 지배는 빈곤과 실업, 부패와 인간성의 황폐화를 가져왔고,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해악을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신영복은 통일은 반식민지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 극복의 차원에서 구상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근대의 극복은 미국의 패권주의, 존재론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자본주의 문명의 극복을 말한다. 그가 구상하는 ‘화의 논리’는 통일을 민족적 과제의 모색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화두로 떠올리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 60이 되면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듯, 우리 사회도 이제 근본구조를 다시 한번 성찰할 때다. 60대 후반의 나이로 해배(解配) 2기를 맞은 신영복, 그가 앞으로 자본주의의 위기적 상황 속에서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대안을 모색, 신영복발(發) 분단체제 극복과 통일론을 제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지식인 사회는 주의 깊게 지켜볼 것이다. 분단이 가져온 고난을 온몸으로 안고 살아온 그에게 분단 극복의 해법 또한 기대하는 외부의 시선에 대해 그가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기대된다.
<신동아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