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16-0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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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경향신문_강수돌 |
[세상읽기]신영복 선생님께 드리는 첫 편지
강수돌 | 고려대 교수·경영학
“신문지 한 장 크기의 햇볕만 있어도 세상은 살 만하다”고 하신 선생님, 제 첫 편지가 늦어 정말 죄송합니다. 제 게으름 탓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나마 이젠 햇살 풍성한 하늘에서 이 글을 보실 터이니 제 맘이 한결 낫습니다. 75년 인생 중 20년 2개월을 ‘인생대학’인 감옥에서 보내셨으니, 저 같으면 억울해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일 터인데, 선생님은 진짜배기 대학을 다녔다며 사색의 깊이를 더하셨습니다. 그 성찰은 이제 제게도, 나아가 온 사회에도 잔잔히 뿌리를 내렸습니다.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우연히도 17명의 친구들과 미얀마의 공기 맑은 산속에 있었습니다. 머리 위로 별들이 잡힐 듯 선명한 밤하늘이라며 모두들 감탄하던 순간, 별똥별 하나가 쏜살처럼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선생님의 영면과 별똥별의 낙하가 제 가슴 속에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죠. 그러나 별똥별이 우주에서 지구로 내려와 운석으로 남듯, 선생님의 가르침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또 가슴에서 두 발로 ‘긴 여행’을 합니다.
언젠가 선생님은 ‘목수의 그림’ 이야기를 하셨지요. 인생대학 동기인 노인 목수가 감옥 속 한 땅바닥에 집을 그리는 이야깁니다. 대개 우리는 집을 그릴 때 지붕, 기둥, 주춧돌 순으로 그리지만, 그 목수는 주춧돌, 기둥, 지붕 순으로 그렸다지요? 그걸 본 선생님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요. 일꾼의 그림과 구경꾼의 그림이 다르다는 말씀, 참 가슴 깊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미얀마에서 제가 경험한 것도 일꾼과 구경꾼의 차이를 뚜렷이 보여주었습니다.
미얀마 중부의 1300고지 껄로라는 곳은 트레킹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한국인만이 아니라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인들도 제법 많이 오더군요. 한국은 한파가 덮친 겨울이지만 껄로의 낮은 삼월 봄날이었습니다. 저희는 1박2일에 걸쳐 배낭을 메고 약 32㎞를 걸었습니다. 걷는 도중엔 일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감자와 생강 심을 땅을 가는 여인들, 베를 짜는 할머니, 곡식을 터는 청장년, 고추를 따는 아낙네, 집을 짓는 아저씨들을 봅니다. 밍글라바, 인사를 하고 말을 걸기도 합니다. 점심은 원두막 같은, 따누족 노인 집 2층에서 먹습니다. 사진을 찍어대다가 문득, 우리는 구경꾼들이지만 현지 사람들은 생활인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선생님의 ‘목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생활인의 터전들이 관광 상품으로 변하면서 총체적 삶의 가치가 경제적 교환가치로 변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돈 되는 것들은 죄다 상품으로 변하고, 상품으로 변할 수 없는 것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됩니다. 사람마다 지닌 인간미나 오랜 세월에 걸쳐 뿌리를 내린 공동체적 관계들이 ‘느린’ 삶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빨리’ 망가져버리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껄로에서 똔레에 이르는 산골 마을들은 ‘아직’ 건재합니다만, 10년 뒤엔 인도 북부의 ‘오래된 미래’인 ‘라다크’ 마을처럼 변할까봐 두렵습니다.
또 한가지 구경꾼들이 생활인들에게 ‘선물’하는 먹을거리나 옷가지, 학용품 같은 것들조차 본의 아니게 생활인들의 본원적 자존감을 박탈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반 일리치 선생의 ‘근대화된 빈곤’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가난하지만 부족함 없이 잘 어울려 살던 마을에 도로가 나고 자동차가 다니고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느닷없이 수치심과 열등감이 사람들의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구경꾼들은 소비자로서 현지의 음식, 물품, 서비스 등을 본국보다 훨씬 저렴하게 구입한다는 사실은 더욱 가슴을 찌릅니다. 마치 자본가가 ‘세계 경영’을 통해 현지의 값싸고 말 잘 듣는 노동력을 십분 활용, 이윤을 추구하는 것처럼, 소비자들도 값싼 인건비의 산물인 음식, 숙박, 물품, 서비스 등을 저렴하게 이용합니다. 자본가는 생산자로서 노동력의 단물을 빼먹지만, 구경꾼들은 소비자로서 노동력의 단물을 빼먹습니다. 이런 이치를 깨달은 것은, 대형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이 아닌 ‘스스로 조직한 공정 여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떠났지만 저희에겐 마음의 등불로 빛납니다. 선생님은 <주역>에 나오는 ‘석과불식’의 교훈을 강조하셨지요. 씨앗이 될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우리가 ‘까치밥’이라며 따먹지 않은 과일은 그저 까치에게 밥으로 주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까치를 통해 온 들판에 씨앗을 뿌리는 일이란 가르침까지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선생님의 75년 삶은 저희에게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었습니다. 저 또한 ‘처음처럼’ 변함없이 나름의 씨앗을 뿌리며 살겠습니다. 그 씨앗에서 자라나는 나무 한 그루도 잘 키우겠습니다. 그런 이들과 더불어 ‘숲’을 이루겠습니다. 선생님을 만나 참된 삶을 배울 수 있어 참 행복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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