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16-0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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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채널예스_탁현민 |
[특별 기고] 신영복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생각해 보고 생각해 보아도 그때 했던 이 말이 내가 이제껏 살면서 했던 말 중에 가장 잘했던 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말로 인해 드디어 나는 내 삶에 사표가 되는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살면서 진짜 스승을 만나는 것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보다 어려운 시대에 나는 그것을 이루었다.
글 | 탁현민(공연연출가, 성공회대 교수)
살면서 했던 말 중, 가장 잘한 말
크고 작은 사고를 치던 고등학교 시절. 학교가 감옥 같고 미래가 별 것 아니겠구나 싶어졌을 때, 야단을 치던 담임 선생님의 책상 위에 놓인 책에 자꾸 시선이 갔다. 바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그렇다. 내가 이 날, 이 책을 읽었던 것은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학교가 감옥이라는 생각 때문에, 저자가 누구인지도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책에 써있던 ‘계수씨’가 ‘계수’라는 사람 이름인 줄로 알고 읽었다.
하지만 그 책은, 다들 아시다시피 20년 20일에 이르는 영어의 괴로움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갇힌 사람의 절망적인 삶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때의 내가 어떤 감상으로 책장을 덮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18살의 겨울을 맞던 내가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동안 그 책을 읽고 베껴 쓰며, 내가 갇힌 것이 아니라, 학교와 감옥이 나를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나에게 갇혀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군대에 갔다 오고 나서, 점점 더 구체적으로 비루해지는 처지에 절망했던 시절. 나는 춘천의 어느 저수지에 앉아 도시락을 까먹으며 할 줄도 모르는 낚시를 했다. 그냥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종일 앉아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때는 하루가 대책 없이 길게 늘어져 언제 돌아봐도 계속 그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수지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문 한 장이 내 옆으로 굴러 왔다. 그리고 무심코 펴든 신문에는(아마 <중앙일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의 칼럼이 실려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이름 옆으로 ‘성공회대 교수’ 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성공회대학교에 가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어머니는 왜 상공회의소에 가느냐고 물었었다. 원서 제출 마지막 날, 학교가 있는 1호선 온수역 대신에 3호선 옥수역에서 한참을 헤매긴 했지만 결국에는 성공회대학교에 찾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성공회대학교의 입학 면접을 보던 날, 면접관이었던 교수님은 어떻게 학교를 알고 찾아 왔느냐고 물었다.
“신영복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생각해 보고 생각해 보아도 그때 했던 이 말이 내가 이제껏 살면서 했던 말 중에 가장 잘했던 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말로 인해 드디어 나는 내 삶에 사표가 되는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살면서 진짜 스승을 만나는 것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보다 어려운 시대에 나는 그것을 이루었다. 언젠가 한참 뒤에 내가 이 이야기를 선생님에게 했을 때 선생님은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원래 공부는 선생을 찾아가는 게 맞아요.
좋은 스승을 찾아서 가르침을 구하는 거예요.
하지만 스승의 말은 어디까지나 참고할 뿐 이어야 해요.”
만일 내가 서울의 유수한 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성적이 좋았었더라면, 그리고 내가 어떤 20대들처럼 일찌감치 분명한 목표와 바람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때는 다들 성공회대학을 모를 때라 나는 어렵지 않게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묻고 싶은 마음만으로 선생님을 찾아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을 운명이라 믿으며 이러한 운명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성공회대학교는 지금도 크지 않지만 그때는 너무나 작은 학교였었다. 학생들 하나하나가 학과의 선생님들 모두와 각별하게 지냈었다. 리포트를 제출하지 않으면 교수님이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내 빨리 제출하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작은 학교에서 나는 전국대학생 문예공모에 시를 써내서 상을 받았고, 작은 학교에서 나의 수상은 상당히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때도 나는 학보사와 인터뷰에서 왜 성공회대학교에 왔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거기에서도 신영복 선생님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선생님은 드디어 나를 연구실로 부르셨다.
내게 선생님이 나를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 준 것이 학생이었는지 다른 교수님 이었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나를 찾으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연구실로 가던 날. 나는 무척이나 두근거리는 마음이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학교는 1학기의 중간쯤이었다. 봄이었고 따뜻했다. 그날, 운동장 쪽으로 창이 나있던 선생님의 연구실에는 자그마한 햇살을 등진 선생님이 계셨다.
“글을 쓴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괜찮으면 매주 한 편 정도 글을 써서 같이 읽고 이야기 해요.”
그러면서 선생님은 우리 둘뿐 아니라 글쓰기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몇 명 더 불러서 하자고 하셨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아 처음 얼마 동안은 혼자서만 연구실에 찾아 가곤 했다. 선생님은 내가 쓴 글을 읽고 느낌을 이야기해 주실 때도 있었고 내가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해 주시기도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내게 권했던 책이 <논어>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배우는데 게으른 나는 아마도 4학년 마지막 학기까지 <논어>를 읽고 있었다.
단 한번도 반말을 하지 않으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먹고 살기 바빠질 때도 나는 가능하면 선생님과의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 없이 학교에 가기도 했고 일부러 일을 만들어 찾아 뵙기도 했다. 마침 시민단체에서 일할 때라 선생님께 글씨며 이런 저런 부탁을 드리기도 여러 번이었다. 결혼을 앞두고는 당연히 선생님에게 주례를 부탁 드렸는데 선생님은 주례를 서 주신 것은 물론이고, 나와 결혼할 사람의 이름을 넣어 ‘더불어 한 길’ 이라는 글씨도 써주셨다.
한참 지나 아이를 낳았을 때는 아이의 이름도 부탁 드렸다. 선생님은 태어난 날과 시를 따져 가며 몇 개의 이름을 보내주셨고, 나는 그 중에 하나를 받아 아이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제 그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어 있다. 나는 가끔 아이에게 이름 지어준 분이 누구냐고 물으며, 아빠는 네가 그 이름값을 잘하길 바란다고 말하곤 하는데 아직까지 아이는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고 자기 이름값이 얼마냐며 궁금해 한다.
공연을 만드는 게 직업이 되고 나서는 때때로 강연과 공연에 출연을 부탁 드리기도 했고, 심지어는 남의 부탁을 대신 전달하기도 했다. 주로 몸은 고단하고 사례는 박한 일이었는데 선생님은 그 모든 부탁을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으셨다. 미루실 만한 사정도 있었고 안 들어 줘도 될 만한 이유들이 있었음에도 선생님은 기꺼이 모두 해주셨다. 심지어는 부탁 드리지 않았던 것까지도 해주셨다. 공연을 만드는 회사를 힘들게 시작했을 때는 일부러 몇 차례나 홍대 부근까지 오셔서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밥을 사주시기도 했고 사무실 벽에 걸어 놓으라며 글씨를 써주시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에는 내 작업실로 오셨는지 선생님 연구실로 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여름 한 철 더운데, 선선하게 부치세요.”
하시며 글과 그림을 그려 넣으신 부채를 선물해 주시기도 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시원하고 감사했다. 그래서 그해 여름은 그 부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선선하게 여름을 지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내가 학생일 때나 졸업을 한 이후에나 단 한번도 반말을 하지 않으셨다. 늘 존대하셨다. 내가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부터는 나를 깍듯하게 선생이라고 붙여 부르셨다. 메모를 하나 남기시더라도 ‘탁현민 선생께’라고 쓰셨다.
선생님 연구실에 차를 얻어 마시러 갈 때면 늘 여러 명의 사람들이 와 있거나 찾아오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나를 그저 제자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을 엄청 대단하게 말씀하시거나 학교에서 아주 중요한 선생으로 그럴싸하게 소개하셨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신영복 선생님이 소개하는 나를 무척 대단한 사람처럼 바라보고는 했다.
선생님이 정년퇴임을 하시고 대학원과 인문학습원 강의만 하실 때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한 해를 끝내기가 아쉽다며 종강 직전에 학부와 대학원 외부과정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모여 작은 학예회 같은 것을 하자고 뜻을 모았다.
지난 8년 동안 매해 해왔던 종강콘서트가 그것이다. 매년 12월 종강주에 ‘학부 학생들과 대학원 그리고 인문학습원 수료생들이 각자 노래며 춤이며 연주를 하나씩 준비하고 떡과 과일도 준비해서 함께 먹고 즐기며 한 해를 마무리 하는 행사였는데 선생님은 출연자부터 프로그램까지 신경을 많이 쓰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를 나누시곤 했다. 그 행사의 마지막은 언제나 선생님의 한 말씀을 듣는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늘 억지로 불려 나오시면서 8년 동안 똑같은 말씀으로 말씀을 시작하셨다.
“오늘까지 리포트 안 낸 사람은 이번 주 안으로 다 내시고….”
선생님의 정년 퇴임때 동료 선생님들과 지인들 그리고 제자들이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모아 책으로 엮어 낸 일도 있었다. 그 책은 글쓴이 각자와 선생님과의 기억이 담겨 있는데 책으로 나오기 전 선생님은 그 원고들을 읽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 하나 읽어보니까 참 사람의 기억이 다르구나 싶어졌어요. 같은 사건 같은 일을 같이 겪었는데도 두 사람이 다르게 기억하는 게 꽤 있더군요. 내가 틀린 부분을 바로 잡을까 생각을 했었는데 그냥 두기로 했어요. 비록 하나의 사건이라도 각자의 기억을 가지고 추억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함께 앉아 이야기를 할 때만 생각나는 추억들이 있는 법인데 나는 이제 그럴 수가 없으니 앞으로는 선생님과의 기억도 조금씩 무너져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몸이 저리고 손이 무거워 진다.
선생님과 다시 꽃처럼 만날 수 있기를
내 모든 회고에 대해 선생님은 어떤 기억을 가지고 계셨을까? 이제는 궁금하지만 물을 수도 없고 비록 내 기억이 온전히 남는다 해도 그건 반쪽의 기억일 뿐이라는 사실이 못내 아쉽고 또 서글프다. 그렇게 선생님은 언제나 내가 기댈 나무였고 그루터기였고 거닐 수 있는 숲이셨다.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나 그 숲에서 쉴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지난 2012년 대선 때 어떻게든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 노력했던 그 모든 것들이 실패로 끝났을 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너 때문이라고 비난을 쏟아내고, 나는 그 욕을 먹으며 분노와 절망에 너절해졌을 때. 그래서 다시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을 그때도 나는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잔뜩 절망에 취해 비틀거리는 나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국 어떻게든 살게 돼있어요.
큰 절망이 꼭 그만한 크기로 위로 되는 것은 아니에요.
때로는 작은 기쁨으로도 충분히 위로 받을 수 있어요.”
그 말씀은 그 누구에게도 받지 못했던 위로였다. 그것은 다만 몇 마디의 말씀이었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으로 긴 시간을 버텨낼 용기를 얻었고 그렇게 버티다 보면 이 처절한 기분이 나아질 것도 믿게 되었다. 그래, 위로에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나는 제주에 있었다. 원고를 쓰겠다고 제주에 내려가서 원고는 밀쳐두고 낚시만 하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이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지셨다고 아마도 그 주를 넘기기 어려우실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이미 선생님은 의식이 돌아왔다가 다시 없으시기를 반복하고 계셨다. 댁에는 많은 분들이 다녀가셨고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선생님이 잠깐이라도 깨나실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잠시 깨어 나셨을 때 사모님의 안내를 받아 선생님을 뵈었다.
‘울지 말아야지, 절대 눈물로 선생님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아야지’
마음먹고 또 마음 먹었지만 담요로 몸을 감싸고 병상에 누워계신 선생님을 뵙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주책없이 대책 없이 눈물이 났다. 단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시지 않았던 선생님이 면도도 하지 못하신 체 누워계시는 모습을 보는 순간,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왼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실 때, 나는 온몸이 갑자기 아득해지며 결국 주저 앉고 말았다. 그때 선생님이 나직하게 뭐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듣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주저 앉아 계속 울 수 밖에 없었다.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내내 눈물을 닦아내며 한참을 앉아 있는데, 선생님이 다시 한번 말씀 하셨다.
“울지마 울지마요. 나중에 다시 만나면 되지”
세상에 울지 말라는 말 보다 슬픈 말이 없고 다시 만나자 라는 말처럼 가슴 무너지는 말이 없다는 것을 나는 그제서야 알았다. 그리고 며칠 후 선생님은 돌아오지 않으실 먼 길을 향해 천천히 산책을 떠나셨다.
정신 없이 장례를 치르면서 나는 울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3일간의 장례식과 영결식 밀려드는 조문인파들을 챙기는 일까지.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정신 없이 일해야 했다. 겨우 자리가 잡힌 둘째 날, 저녁에야 처음 국밥을 먹었다. 이틀 만이었다. 그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였는지 따끈한 국물과 밥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제 스스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번들거리는 입술을 닦아 낼 새도 없이 국물까지 후루룩 다 마셨다.
슬퍼하는 일에도 어느 정도 기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고 슬픔은 신기하게도 밥을 넘긴 만큼 그만큼 밀려왔다.
선생님이 떠나시자 서점에서는 선생님의 책들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언론에서는 장례기간 내내 선생님의 부음을 기사로 실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기억으로 선생님을 추모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다녀갔고 마지막까지 함께했다.
누구는 위대한 지성을 잃었다고 했고, 또 누구는 인문학의 스승을 잃었다고도 했다. 사람은 잃었지만 정신은 잃지 말자는 말도 나왔다. 나는 그냥 멍했다. 몇 해 전부터 울리던 이명이 좀더 커졌고, 갑자기 닥쳐온 한파에 처음으로 무릎이 시렸다. 슬픔이 내 몸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켜켜이 쌓인 슬픔의 첫 장면을 기억해 보았다. 그 장면은 처음 선생님을 뵙던 그날이었다.
4학년 1학기 어느 봄날, 담쟁이 잎이 다시 초록으로 부지런히 꿈틀거리며 벽을 타고 오르던 그 날. 연구실 문 앞에서 망설이고 망설이며 숨을 고르던 20대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문을 두드렸는데 안 계시면 어떻게 하지 싶은 마음과 오랜 기다림으로, 마침내 선생님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들쳐 맸던 가방을 한 손에 들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던 내 모습 그리고 ‘똑. 똑. 똑’ 소리와 함께.
“네, 들어오세요.”
하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천천히 문을 열면 운동장 쪽으로 나 있는 창 앞에서 천천히 일어나서 내게로 오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햇살 때문에 반짝거렸다. 아. 나는 이것이 내가 만들어 낸 기억인지 그날의 장면인지 모르겠다. 기억은 벌써부터 가물거리고 추억이라 하기엔 아직은 너무도 생생하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저 다시 한번이라도 그날의 그 기억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 쌓인 슬픔이 빠져나갈 때 다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싶을 뿐이다.
선생님과 다시 꽃처럼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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