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16-0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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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한겨레신문_하종강 |
[하종강 칼럼] 빈소에서 만난 사람들
4년 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가까운 곳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어머니’를 도왔고 장례식의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했던 어떤 이는 장례식에 관한 언론 기사들에서 검색조차 되지 않았다.
지난 15일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비슷한 모습이 기시감처럼 되풀이됐다. 생전에 선생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뵈었고 임종 무렵 가장 긴 시간 동안 선생님 곁을 지켰던 어떤 이는 장례가 치러지는 사흘 동안 줄곧 계단 한구석에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교대해 줄 사람도 없어 온종일 혼자 그 자리를 지키다가 너무 힘들면 가끔 뒷벽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2000년에 선생님이 성공회대학교 노동대학 초대 학장을 맡으셨을 때, 나는 1기 수강생이었다. 선생님의 입학 특강을 들으며 나는 ‘역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제한된 지식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요받는 삶, 그것이 노동자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아, 그것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큰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선생님이 남기신 많은 교훈이 있지만 나는 그 말씀을 가장 깊이 마음에 새겼다. 노동자들도 새로운 지식이나 문화를 습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맛있고 색다른 요리 하나 정도는 직접 만들어 사람들을 대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는 노동대학을 1기, 2기, 3기 연거푸 낙제했다. 출석일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낙제생을 11년 뒤에 노동대학 8대 학장으로 불러주신 분이 신영복 선생님이다. 23년 동안 몸담았던 노동문제연구소의 문을 닫고 실업자가 됐을 때, 노동대학 학장으로 일해 줄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그 고마운 제안을 참 건방지게도 마다했다. 그 무렵 학교에 비정규직 조교 문제가 발생했는데 나는 그 싸움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갈 수 없노라고, 우스워 보일지 모르지만 나같이 살아온 사람에게는 중요한 원칙이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는데 선생님은 그 마음을 모두 헤아려 주셨다. 6개월 뒤 “문제가 모두 해결됐으니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계약직 조교들이 정규직이 돼 신영복 선생님의 빈소를 지켰다.
임종 며칠 전, 댁으로 선생님을 방문했다. 깊은 잠에 빠진 선생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기적처럼 잠깐 잠을 깨신 선생님이 입 모양만으로 “누구?” 하고 물으셨다. “하종강입니다”라고 답했더니 창백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시며 겨우 움직이는 손을 내미셨다. 그 손을 와락 두 손으로 잡는데 눈물이 왈칵 솟았다.
발인 하루 전날, 한적한 교정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는데 저편 어둠 속에서 “장례식장이 어디인가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문이 닫혔을 텐데…”라고 답하며 가까이 다가갔더니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얼마 전 노동조합을 설립한 뒤 ‘노동조합 탄압 백화점’이라고 불릴 만큼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작은 병원 노조의 조합원들이었다. 서둘러 빈소로 들어가 나 혼자서 그날 마지막 상주 노릇을 했다.
대중교통이 모두 끊긴 시간이어서 병원 근처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다. 다른 병원에 취업한 동료에 관한 안부를 차 안에서 전해준다. 그 ‘동지’를 보내며 마음 아파했던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 동료가 집회에 참석한 모습을 찍은 사진을 이전에 일하던 병원 쪽에서 새 병원으로 보내 결국 해고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죽어 버리고 싶다”며 우는 동료를 설득하고 오느라고 늦은 시간에야 문상을 오게 됐노라고 말하는 이들도 목이 멘다.
그런 노동자들을 저성과자로 내몰아 더욱 손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일반해고’의 속셈이다. 선생님이 애쓰며 살다 가신 세상을 이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될 텐데 “우리가 사회를 이렇게 말아먹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 않은가?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분류 | 제목 | 게재일 | 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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