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16-0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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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기독공보_이홍정 |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이홍정 목사 2016.01.26 3029호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2016년 1월 18일 성공회대학교 성 미카엘성당. 동요 '시냇물'이 깊고 나지막한 흐느낌 속에 합창되는 가운데, 고(故) 신영복 선생님의 장례예식은 여미어졌다.
1941년 밀양에서 출생한 고인은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사역하다, 1968년 자신도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소위 '통혁당'사건으로 구속되고 사형선고를 거쳐 최종적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최고 3년형이 상식적 판단이었지만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 후 20년 2개월을 복역하다가 1988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되어 전주교도소를 출소한다.
출소 후 분단사회에서 '주홍 글씨'를 달고 사면 복권되는 과정에서 극심한 소외와 함께 사랑의 동행과 연대를 경험한다. 75세에 생을 마감한 고인의 죽음의 원인은 햇빛이 귀한 지역에서 발생한다는 희귀한 암, '흑색종암'이었다.
무기징역을 받고 추운 독방에 갇혀서, 고인은 "나는 왜 자살하지 않나"를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북서쪽으로 난 창문으로 하루 두 시간쯤 들어오는 신문지 펼친 크기 정도의 햇빛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을 때 느낀 행복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결코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했다.
다른 하나는 자살하면 매우 슬퍼할 사람들, 부모, 형제, 친구들을 생각하며, 존재라는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다. 신문지만한 햇빛을 사랑하다가 20년 2개월 만에 천지에 부서져 내리는 햇살 아래 섰을 때, 고인이 느꼈을 망연자실함을 아프게 공감하면서, 오히려 감옥의 '동굴'이 수인에게 주는 그 허망함을 붙드시고 고인의 삶과 동행하신 '수난 당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은총으로 다가온다.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지혜자의 성찰을 함께 지녔던 고인은, 감옥에서 직면하는 섬뜩한 죽음의 그림자와 억울함과 분노와 좌절의 '바위'들을 끝내 물처럼 돌아나며, 세월의 저 낮은 곳으로 변방으로 흘렀다.
고인은 감옥에서의 하루하루를 '팔만대장경'이라 부르며, 만남과 관계맺음을 통한 '대학과정'을 이수하였다. 수형의 삶 속에서 주변화 된 '이웃'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관계 속에서 성찰하는 배움의 과정을 공부로 인식했던 '스승'. "우리는 저마다 누군가의 제자인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스승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올바르게 걸어가도록 합니다."
이처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흑백의 다름마저 조화로 이끄는 성찰을 통해, 산을 품은 것이 땅이라는 근본을 깨닫고, '입장'을 함께 하는 나무가 '더불어 숲'의 관계를 이루는 역사를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계몽주의적 권력에 의해 생산된 당대의 사표나 스승 대신에 집단지성이 필요하다. 유구하며 동시에 굴곡이 심한 역사의 속성을 생각할 때, 계몽주의에 경도된 목표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과정 그 자체를 아름답고 자부심 있게 즐겁게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투옥된 채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며 써내려간 옥중서신은 바울 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입장'을 같이하는 동지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함께, 그의 애정 어린 당부들이 마지막 '강의'와 '담론'으로 담겨있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해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과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지고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바울의 간청 속에는, 감옥생활의 고독과 곤란을 넘어 마지막과도 같은 '겨울'을 담담히 맞을 준비를 갖춘, '더불어 숲'의 의지가 담겨있다. 바울이 옥중에서 그리움을 통해 만나는 동지들과 연대하며, 배신의 상처가 주는 아픔을 넘어, 복음의 진보를 위해 던지는 사심 없는 고언들 속에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씨앗들이 담겨 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딤후4:17) 고(故) 신영복 선생님의 마지막 저술 '담론'은 이렇게 여미어진다. "언약(言約)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그 언약들이 언젠가는 여러분들의 삶의 길목에서 꽃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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