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신영복교수 “대학은 따뜻한 가슴의 인재 키워야”-고별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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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06-06-18
미디어 경향신문 손재민기자

신영복교수 “대학은 따뜻한 가슴의 인재 키워야”

 

신영복 교수가 8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8일 오전 고별강의를 하고 있다. /김문석기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65)가 강단을 떠나며 남긴 화두는 ‘죽순’과 ‘까치밥’이다.

올 8월 정년퇴임하는 그의 마지막 ‘강의’를 직접 듣기 위해 8일 이른 아침 성공회대로 달려온 많은 일반인과 학생들 앞에서 신교수는 한편으로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 부끄러운 듯했다.

“종강이라고 해야 뭐 특별할 게 있나. 평소대로 하고 싶었는데…. 어쨌든 수강생들에겐 많이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내 나직하나 또렷한 목소리의 강의가 시작됐다. 그는 흰 칠판 위에 검은 펜으로 어린 대나무 한 그루를 그리기 시작했다.

“죽순의 가장 큰 특징은 마디가 짧다는 것입니다. 30m 큰 키를 지탱하는 힘이 이 짧은 마디에서 나옵니다.”

졸업을 한다든지, 새 삶을 시작할 때는 천천히 마디를 많이 만들면서 자신을 키워 나가라는 말이었다. 짧은 마디들은 땅속 긴 뿌리에 연결돼 있다.

“대나무의 긴 뿌리는 캄캄한 곳에서 오랜 세월 키워온 것입니다. 역경을 겪지 않은 사람이 큰 키를 이룰 수 있을까요.”

큰 사람을 보며 지금의 큰 키만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아픔이 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나무들의 뿌리는 다시 서로 연결돼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신교수의 강의는 ‘독야청청’하지 않고 언제나 숲을 이루는 대나무의 모습으로 넘어갔다.

누군가 “그러면 선생의 뿌리는 감옥 20년이냐”고 물을 법했다. 신교수는 “감옥에서 면벽 수련을 하는데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수많은 일들과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과 관계없는 나의 뿌리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디지털화되면서 뿌리보다는 바로 잎사귀를 바라는 문화가 팽배해 있다”며 성급함을 경계했다. 미래에 대한 해답은 과거(뿌리) 속에 다 들어있다는 말과 함께.

까치밥은 ‘주역’에 나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다. 석과불식은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주역 64괘 중에서 가장 나쁜 괘(山地剝)를 설명하기 위한 글이지만 신교수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란다. 초겨울 감나무에 열매가 마지막 하나 남은 최악의 상태를 왜 좋아할까.

“단 한 개의 가능성만 남아 있는 절망의 상황이 사실은 희망이 잉태되는 때입니다.”

잎과 열매가 다 떨어지고, 줄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때라야 거품 없는 ‘내 모습’을 보게 되고 비로소 제대로 된 ‘내 모습’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게 곧 희망의 시작인 셈이다. 신교수는 “세계무역기구(WTO)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상징되는 세계화의 물결로 인해 야기된 지금의 위기상황이 석과를 연상시킨다”며 “우리 경제의 거품과 정치의 종속성을 벗고, 문화적인 자존을 이루기 위해 우리 사회의 뿌리를 고민해 보는 계절(겨울)이 필요하다”고 했다.

떨어진 잎사귀는 뿌리에 소중한 거름이 되기도 한다. 이 거름이 ‘사람’을 훌륭하게 길러내는 데 쓰여야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수 있을 터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오는 여행입니다. ‘차가운 머리’에서 ‘따뜻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게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찬 이성이 더 큰 인간애 속에 융화될 때 진정한 담론이 되고, 사상이 됩니다.”

그의 이 말에 한 학생이 “더 어려운 일은 가슴에서 발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기자에게 귀띔해 줬다. 신교수의 강의를 한 학기 동안 들어온 학생의 이 한 마디가 마음속 깊이 파문을 일으킨 가운데 선생의 마지막 강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엘리트를 재생산하는 구조입니다. 원정출산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구조는 지금 정부기관에까지 꽉 들어차 있습니다. 우리는 죽순을, 감나무를 길러내는 진정한 의미의 숲을 갖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아름답게 길러내는 이 숲이야말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내는 장(場)입니다. 우리 사회가 금방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과정이 아름다워야 하고, 그 안의 사람들이 진실하다면 그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신교수와 함께 10여년간 감방 생활을 했던 ‘제자’, 업무를 제쳐놓고 달려온 생면부지의 40대 회사원 등 350명의 방청객들이 박수를 쳤다. 17년전 신교수가 출소한 후 성공회대에서 가졌던 첫강의를 들었던 송경용 신부(영국 체류중)는 “‘역사란 장가 가서 애 낳고 그 애가 다시 애를 낳고, 생명이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가르침 덕에 힘든 순간마다 긴 호흡으로 성서를 다시 보게 된다”며 “이것이 경제학 교수에게서 신학을 배우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감옥의 제자’임을 자처한 이승우씨(56)는 “감옥에서 만난 선생님 덕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했다.

강의가 끝난 뒤 선생의 향후 진로를 물었다. “제가 오래 격리돼 있었던 탓에 현안을 따라가는 데는 아직 늦어요. 그러나 근본에 충실했던 경험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쉽게 놓치는 가치들에 주목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대 한 가운데 서는 체질이 아니므로 조용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다만 강단에 있을 때보다 사회에 대한 목소리를 더 많이 낼 것입니다. 이제 가슴에서 발로 내려와야죠.”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 경향신문 & 경향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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