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04-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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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예스24 |
예스 인터뷰 > 만나고 싶었어요! | 2004.02.01
감옥은 제게 대학과 같았습니다. 신영복 교수 인터뷰
이번에 나온 『엽서』를 내는 소감이 어떠하시나요?
『엽서』를 보면 엽서를 작성했던 교도소가 생각이 나죠. 그리고 엽서를 작성했던 당시의 기후까지 생각하게 되는데… 제가 그렇게 꼼꼼하게 엽서에 글을 쓴 이유는 뭔가 강물같이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서 였어요. 기록해두면 이 편지를 보고 그 시절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죠.
원래 『엽서』는 1993년에 친구들이 먼저 영인본을 내자고 제안해서 출간되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서 원본 엽서를 구경하다가 한 두 장씩 기념으로 가지고 갔죠. 그러다가 어느 친구가 이러면 안된다며 그 동안 모았던 엽서를 모두 내놓고 영인본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어요. 친구들이 엽서를 갖는 의미로 영인본을 만들어 나누어 갖자는 취지였지요. 그래서 그렇게 만들어서 일부가 서점을 통해 나갔고, 그랬다가 절판이 됐는데 이번에 다시 만들게 된 겁니다.
당시 편지를 휴지에 적기도 하셨는데, 그것이 어떻게 지금까지 보존되었나요?
여기에 담긴 엽서가 크게 세 가지에요. 첫번째는 남한산성에서 휴지에 썼던 메모, 교도소에서 정식으로 보낸 봉함 엽서 그리고 내가 그렸던 쪽지와 그림인데… 남한산성에서 메모를 쓴 휴지는 종이질도 좋지 않고 금방 찢어질 수 있는 거죠. 그걸 제가 하루에 두 장씩 써서 묶었어요. 책을 보면 묶은 표시가 나는데 그렇게 묶어서 몰래 가지고 있었어요. 집필 허가가 난 기록물이 아니기 때문에요. 그러다가 갑자기 이송을 가게 되요. 그래서 가까이 있던 헌병 친구에게 네가 갖던가 아니면 우리 집에 전달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리고 나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묶여진 채로 선친의 서가에 곱게 보관되어 있더라구요. 굉장히 약한 종이인데도 잘 보관이 되어 있었어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는 이 글이 안실려 있잖아요. 우리집이 이사하는 과정에서 이 글이 나왔어요.
책을 보면 검열필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검열 받는다는 부담에서 뭔가를 쓴다는 것이 어땠나요?
자기 글이 검열될 것을 전제하고 쓴 글이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럽죠.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 쓰지는 못했어요.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된 편지들도 상당히 많아요. 나는 틀림없이 보냈는데 집에는 도착하지 않은 그런 경우. 그래서 제한된 공간에서의 제한된 글일 수 밖에 없어요. 언젠가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붙인다면 무엇으로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생각해봤는데 제목을 내가 붙인다면 『다시 쓰고 싶은 편지』... 이렇게 하고 싶어요. 제한된 공간, 상황, 지면에 검열을 전제로 쓴 대단히 불편한 글이기 때문에…
요새도 편지를 쓰시나요?
요즘은 잘 안쓰게 되죠. 전화를 먼저 하게 되고 또 최근에는 메일을 쓰고. 그런데 2~3년 전부터 전화보다는 간단하게 엽서를 띄우고 있어요. 그게 받는 사람한테는 더 다정하게 느껴지나 봐요.
책에는 보통 저자의 글이 있는데, 이 책에는 없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시나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있는 글을 모아 다시 책으로 출판한다는 것이 저로서는 부담이기도 하구요. 제 얘기는 책 속에 다 있으니까… 그래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다른 분들이 소개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쓰지를 않았어요.
어떤 심정으로 그 닫힌 공간에서 글을 쓰셨습니까?
보통 편지와는 좀 다르게 자신이 생각한 것, 느꼈던 것을 압축적으로 쏟아 붓는 글을 쓴 셈인데… 그건 아까도 얘기한 점이지만 전혀 상이한 상황에 처했을 때 들이닥치는 여러 종류의 충격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나로서는 정리해 두고 싶었지요. 이렇게 써서 집에 보내 두면 다음에 이 시간을 다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요. 한 달에 한번밖에 편지 쓸 기회가 없었거든요. 이번 달엔 뭘 써야지 하고 이번 달에 쓸 주제를 정하고 머리 속으로 문장들을 다 만들고 교정까지 마친 상태에서 글을 쓰게 되요. 교도소의 편지 작성은 담당 교도관의 시선 하에서 쓰게 되요.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철필을 가지고?. 긴 편지는 쓰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려요. 미리 다 원고가 머리 속에 교정되어 있더라도 다른 바쁜 편지 작성자가 있으면 비켜주었다가 다시 쓰게 되고, 작업이 없을 때 쓰게 되죠. 이번 영인본 같은 경우도 그 때의 종이, 글씨를 다시 보게 되면서 옛날의 시간을 다시 되살려내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감옥에서의 경험이 선생님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지요?
사실 그 부분이 책 속에 많이 기록되어 있어요. 저는 감옥을 대학이라고 부르죠. 또 그 때 같이 징역살이를 했던 사람들을 지금도 일 년에 몇 번 씩 만나요. 만나면 대학 동창생이라 불러요. 감옥을 왜 대학이라고 하냐면 바깥에 있었으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때를 대학 시절이라고 생각을 하고, 지금도 제가 '나의 대학 시절'이라는 상당한 분량의 원고를 만들어 놓고 있어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리지 않은, 검열에 통과되지 않았을 법한 이야기들을 많이 모아서 기록해 둔거죠. 감옥이 나의 대학인 이유는 저는 교장 선생님 아들로 태어나 학교 사택에서, 교실에서, 책 속에서 자기 사고를 키어온 사람이잖아요. 이런 창백한 관념적인 지식인이 전혀 엉뚱한,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감옥에서 느끼는 것들이 굉장히 충격적이었죠. 관념성들이 하나하나 깨트려져 나가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들을 가질 수 있는 기간이었죠.
1년 이상을 같은 호실에서 지낸 사람들도 있었을 테니, 사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남다른 인간 관계를 맺었을 것 같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4~5년 씩 같이 있게 되고, 또 같은 공장에서 일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게 되고… 그래서 이 감옥이라는 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굉장히 심화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도시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 아주 가볍게 스쳐지나가잖아요. 악수를 하든, 차 한 잔을 하든, 소주 한 잔을 하든… . 하지만 감옥에서는 한 사람에 대한 참 많은 것을 알게 되요. 그 사람의 모든 역사를 다 알게 되고, 심지어 잠꼬대까지 알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를 익힐 수 있죠. 그리고 이것도 감옥이 대학인 이유가 되는 것이구요.
특별히 친했다거나 기억에 남는 동료가 있으셨는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만난 스승과 같은 사람들이 참 많아요. 어려운 세월을 같이 겪은 사람들은 출소 이후에도 만나게 되요. 그래서 일 년에 두 세 번 정도는 만나고 있고, 연말에는 결혼한 가족까지 모여서 한 집에서 삼겹살에 소주 파티를 열죠.
어떻게 보면 부당하게 느껴질 수 있는 시간이었을텐데…그 시간을 견디게 해준 힘이 무엇이었나요?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비극의 한가운데 넣기를 좋아해요. 자기 인생이 각별하게 힘들다고 생각하게 되구요. 저도 마찬가지로 그 시간이 부당하게 생각되고, 감옥이라는 상황이 몹시 힘들었었는데… 어느날 이런 경험을 하게 되요. 교도소에는 참 많은 무기수들이 있어요. 저처럼 사상범이 아닌 일반 형사범들도 많이 있죠. 이 사람들의 인생도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해요. 그런데도 자기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자기 운명처럼 살아나가는 것을 봐요. 그래서 반성을 하게 되죠. 내가 특별하게 저 사람보다 더 괴로워할 권리가 나한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요. 아마 그것이 내가 어려운 상황을 견딜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정서적인 분위기였지 않았나 생각해요.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렇게 생각하기가 참 힘들었을 거 같은데요.
저는 참 많이 배웠어요. 사람들을 배우고. 우리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 사람들의 모멸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죠. 그래서 숨겨져 있는 사회를 제가 공부하게 되요. 굉장한 공부였지요. 또 제가 1960년대부터 감옥살이를 시작하잖아요. 그 때 어떤 사람들이 함께 형을 살았나 하면, 해방 전후의 정치적인 격동기에 활동했던 분들, 또 그 유명한 빨치산 출신들도 있었어요. 그 다음에 북한에서 공작원으로 넘어왔다가 구속된 사람들도 있었구요. 그 분들을 통해서 정말 역사를 다시 이해하게 되요. 우리 현대사를 그 사람들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읽는 경험을 하게 된 거죠. 참 많이 배웠어요. 제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그 속에서 굉장히 훌륭한 서도 선생님을 만나게 되기도 한학을 했고… 벽초 홍명희 선생의 제자이기도 한 우리나라 최고의 한학하시는 분하고도 한 방에서 4년 이상을 함께 지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 경우에는 감옥이라는 곳이 인간을 배우고, 사회의 숨겨진 얼굴을 다시 만나고 또 학습화 되었던 해방전후의 현상을 직접 배우는, 이런 여러 가지 살아있는 대학이었다는 겁니다.
『엽서』 앞부분에 '청구회 추억'이라는 글이 있는데요.
사실 그 글은 제가 사형 선고를 받고 기다리는 동안에 쓴 거에요. 청구회 어린이와의 만남이 이렇게 끝나는구나,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기록을 하게 되었어요.
어린이와의 만남이 위정자들에게 굉장히 왜곡되어 이해되었다는 것이 참 씁쓸하더라구요.
재판과정에서 일관되게 느꼈던 건대… 우리나라의 당시 공안 사건 자체가 정치적인 필요가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사건을 맞추는, 이런 위로부터의 강압적인 수사가 거의 관행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어린이와 아름다울 수 있는 이야기를 사건의 하나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마음 아프게 했다고 할 수 있죠.
감옥에서의 20년 동안 선생님에게 변화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전 사실 20년 동안 참 많은 것을 잃기도 하고 버리기도 했지만, 제가 출소할 때에는 한 가지 성취감이 있었어요. 남들에게는 결코 얘기하지 않은 건대… 그것이 뭐냐 하면 역사상의 어느 실천가도 못해냈다는 자기의 성분 개조를 했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 감옥에 들어갈 땐 창백한 인텔리였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언어, 경험, 삶을 통해 나 자신을 상당히 민중적인 정신으로 개조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기술도 참 많이 익혔어요. 제가 목수 기술도 있구요, 양복은 제가 신사복까지 만들 수 있어요. 또 페인트 칠도 배웠구요. 제가 역사상의 어느 사람도 해내지 못한 자기 개조를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출소를 했는데 20년 더러는 30년 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그 친구들이 나를 보고, 위로하려는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해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어, 그런가'하고 당황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내가 실제로 다른 친구들을 30년 만에 보면 그 사람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사람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라는 사실도 다시 확인하게 되구요. 특히 그 사람의 인간적인 바탕이나 사고의 틀, 이런 것은 참 변하지 않지요. 그걸 다시 나에게 적용하면 내가 사실은 나 자신의 성분을 개조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 아니었나,하고 반성이 되는 거죠.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개인적인 것을 단위로 해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옆에 있는 사람만큼 변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구요. 그래서 나는 개인적인 관점으로 자기 개조를 바라봤던 인텔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한편 지금도 그 사람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함께 지내면 같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의 형태로 나의 개조는 존재하고 있다는 거죠.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신 부분이지만 관계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정립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제가 붓글씨의 관계론이라는 글도 썼지만 사실은 우리가 근대사를 살아가면서 개인을 단위로 보는 존재론적 관념에 많이 빠져있었어요. 붓글씨 관계론이 뭐냐 하면... 붓글씨는 한 획이 잘못되면 그것을 지우고 다시 쓸 수 없기 때문에 다음 획으로 그 획의 잘못을 커버하잖아요. 한 글자가 잘못되면 다음 글자, 그래도 안되면 다음, 다음 글자로 그 글자의 결함을 보충하거든요. 이렇게 실수와 사과와 조화로 만들어진 글을 아주 격조 있는 서도의 경지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아픔이나 기쁨도 자기 개인적 존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징역을 살아봐서 알잖아요. 징역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뭐냐. 춥고 배고프고… 그것이 징역의 고통이 아니거든요. 정말 힘든 고통은 자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있는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이 자기 아픔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관계야말로 기쁨과 아픔의 근원이지 않는가...
1998년 감옥에서 출소하셨을 때, 1968년에 감옥에 들어갔을 때와 비교하면 세상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아직도 변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변하기 참 어렵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한 사회도 그 본질적인 구조가 변하기는 참 어렵다고 봐요. 외경적인 현상은 엄청난 변화를 겪은 것이 사실이지요. 제가 들어갈 때 한강에는 다리가 두 세 개 밖에 없었거든요. 거기에 비하면 교량, 철도, 자동차… 모두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한 사회의 본질,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우리나라는 완고한 보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조 말기부터 해방전후, 자유당 정권, 5공 6공을 거치면서도 우리 사회에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들은 그대로에요.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정치 경제 구조도 60년대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한 사회? 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변해야 하는가? 그런 관점에서 보다 신중하다면 사회변화를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작년 한 인터넷 포탈 업체의 설문조사에서 선생님께서 인생의 길을 물어보고 싶은 지식인 1위로 뽑히시기도 했는데요.
학생들한테 듣고 알았지요. '내가 왜 뽑혔을까?'하고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아마 고생을 많이 해서, 감옥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뭔가 힘든 일을 상의할 수 있는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나 했어요. 일부 그런 면은 있으리라 생각해요. 제가 20년 동안 어디를 가지를 못하고 한 곳에서 못처럼 박혀 살았잖아요. 그런 세월이었지만 참 많은 사람을 만났던 세월이거든요. 여러 계층의, 여러 부문의, 여러 연령층의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던… 그것도 도시의 차가운 만남이 아니라 몇 년씩 한방에서 생활하는 끈질긴 만남을 했기 때문에 인간과 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경험들이 상당히 좋은 상담자로 느껴지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요.
사람들이 선생님을 떠올릴 때 무엇보다 '양심'이라는 단어를 함께 연상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요.
특히 최근에는 우리 사회에 부정 부패가 많이 드러나면서 그러한 인간상에 대한 갈구가 있다고 생각되요. 제 자신이 무슨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의 그러한 상황 때문에 그런 대상을 찾는 심정이 있으리라 보구요. 저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 존재론적인 사고가 아닌 관계론적인 사고를 갖는 사람이 양심적인 사람이라 생각하죠. 그래서 제가 양심이라고 하면 가장 머리 속에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요. 아주 어려워서 새벽에 대학 병원에서 피를 팔던 젊은 친구였는데, 이 친구가 자기는 피를 뽑으러 가기 전에 병원 앞에 있는 수돗가에서 물을 양껏 마신다구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찬물을 잔뜩 들이키면서 자기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얘기해요. 무슨 말인지 몰라 다시 물어보니, 이 젊은 친구는 찬 물을 마시면 그게 혈관 속으로 들어가는 건 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피를 팔기 전에 물을 탔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물을 마셨다고 물이 피속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얘기하니까… 조금은 들어갔겠죠.. 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친구가 참으로 양심적인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이 친구는 물을 타서 묽게 된 혈액이 어느 환자에게로 들어갔을 때 혹시 그 환자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그런 괴로움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회가 너무 경쟁적이 되고, 그래서 양심 있게 행동하기가 참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상황이 양심적 개인을 용납하지 않는 객관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 자체가 작은 톱니바퀴라고 얘기하죠. 세계 경제라는 큰 톱니바퀴에 물려 있는 작은 톱니 바퀴. 현기증 나는 속도 속에서 친구를 배려하는 최소한의 여유마저도 없어지는 상황.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근본적인 성찰로 반성해야 한다고 봐요. 근본적인 성찰이라고 하는 것은 왜 사는가? 경제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경제인가?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는 거죠. 친구, 이웃, 심지어 가족까지 배제하면서 이루려는 자신의 성취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수많은 사람을 구조조정하면서 일궈내는 경제 성장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런 근본적인 물음을 저는 오히려 경쟁이 치열하면 할수록 우리가 결코 망각해서는 안되는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도로의 속성에 빠져 있다고 봐요. 도로라는 것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밖에 의미가 없죠. 도로가 목표로 하는 지점에 도달하는 시간이 짧을수록, 고속일수록 더 가치 있는 것이고... 전 이런 사고는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전 인생은 도로가 아니라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은 사람도 만나고 옆에 피어있는 꽃도 보고, 자기의 발자국도 남기는… 길의 의미로 우리 삶 자체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선생님은 경제학자이시지만 시서화에 모두 능하십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그런 경쟁 일변도의, 수능 중심의 교육이잖아요. 참 잘못된 거예요.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교육에 커다란 두 개 장르가 있어요. 고전, 역사,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이성훈련, 그리고 시서화라는 감성훈련이 있어요. 인간의 감성, 인간의 양심을 높여가는 교육이 병행되었거든요.
지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신데, 교육에 임하는 태도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요즘 청년실업문제가 심각하잖아요. 그래서 취직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식을 교실에서 배웠으면 하는 학생들의 요구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참 절박한 요구이죠. 하지만 전 그런 정보 중심의 취직중심의 공부는 끝이 없다고 봐요. 오히려 뭐가 필요하다고 보냐면…우리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 자기가 살아갈 수 있는 사고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요. 어떤 낮은 곳에 서더라고 자기 자존심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비판적인 사고를 기르는 것이 조금 나은 직장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고, 상당 부분 학생들과 그런 공감을 형성하고 있다고 봅니다.
자기가 자기 철학을 가지지 않고, 상대와 비교하는 낮은 철학을 갖거나 경제 적 논리에 말려들어가면 결국은 한 사람밖에 남지 않거든요. 많은 사람들을 한 사람씩 물에 빠뜨리는 게임과 마찬가지에요. 그런 게임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자기의 처지에 대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태도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더 힘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선생님께서 추구하시는 삶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나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크게 도움이 안될 거예요. 왜냐하면 제 삶은 일반적인 사람의 인생 코스와 상당히 다르잖아요. 제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에 대해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강물의 이미지를 제 삶의 정서로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강물이라는 것은 무리하지 않아요. 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깊은 곳을 만나면 다 채운 다음에 유유히 흐르다가 큰 바다에 이르는, 바다는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이는.. 그래서 이름이 바다인… 그런 강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하신지요.
제가 세상에 대해 잘 안다고 했지만 무엇을 당면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인가는 잘 모르거든요. 제 주변에 저를 잘 알고, 그리고 나보다는 현장에 대해 잘 아는 그런 후배들이 많이 있어서 그 후배들이 함께 뭘 하자고 하면 언제든지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제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서 현재로서는 학교에 몸담고 있고, 또 사회교육원을 중심으로 한 교사와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도 상당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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