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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3.04.22 16:08

편리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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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사온 동네는 30년 전만 해도 낮에도 여우가 출몰하던 골짜기다.
20여년 전, 마을이 하도 예뻐서 허름한 집 한 채를 사러 왔을 때도
시냇물은 맑았고 집집이 매화가 피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다르다.
징검다리를 건너다 허리를 굽히고 흐르는 물을 손으로 퍼 목을 축이던 일은
옛 이야기가 되었다. 개울을 메우던 야생 오리떼가 사라진 지도 오래다.
논고동을 파 먹던 해오라기의 한가로운 모양도 찾을 길 없다.
그나마 돌담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이곳이 그린벨트 지역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덜 훼손된 만큼 교통은 아주 나쁘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려면 내 걸음으로
걸어서 30분이 더 걸린다. 5일장이 서지만 멀기는 마찬가지다. 도시에서 성공한
'마트'가 시골 읍내까지 뻗어왔지만 장보다 더 멀다. 집안에 고이 들어앉아
살림만 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늙도 젊도 아닌 나이에 별안간
얻은 직장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출, 퇴근을 하려니 보통일이 아니다.

처음 이사올 때만 해도 꽃밭을 만들고 묘목을 심고 모종을 내며 피어날 꽃송이와
나무에 열릴 과일들 그리고 지붕위에서 부풀어 오를 보름달 같은 박 덩이를
상상하며 행복했다. 그런데 이제 한 달 남짓인데 벌써 힘들다. 교통이 나쁘다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다. 운전 못하는 나는 출근은 남편과 함께 하지만 퇴근길만
곤란한 게 아니라 다른 볼일도 모두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야만 한다.
어제부터 벌써 불평이 쏟아졌고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운전하는 남편에게
집을 옮기든지 내 직장을 그만두든지 해야 한다는 소리마저 했다.

바쁜 출근길에 어수선한 이야기로 남편의 마음을 흔들어서 그런지 마을 어귀
정자나무 아래에서 차를 세웠다. 놀라서 남편을 보니 차문을 열고 내려 길에 서
있던 할머니 한 분을 우리 차에 태웠다. 할머니는 커다란 보퉁이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남편은 그 보따리를 들고 차에 타면서
할머니께 큰길까지 태워드리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하면서 앉으셨다. 내가
어디 가시냐고 여쭈었더니 오늘이 장날이라서 장에 가신다고 했다.
우리는 서울서 이사온  이웃이라고 인사를 했더니 할머니도 지난달에 이사 온
사람이라며 반가워 하셨다. 어디서 오셨냐고 했더니 손자들 학교 때문에
윗마을에서 이사왔다고 하셨다.

윗마을은 우리 동네에서도 20리는 더 가야하는 곳이다. 그곳이야말로 교통이
정말 불편하다. 우리 동네에는 한 시간 간격으로 들어오는 버스라도 있지만 거긴
그마저도 없다. 거기서 이사왔다는 할머니는 이 동네가 정말 편리하다고 하신다.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큰길까지
걸어 나가서 버스를 탈 수 있으니 좋고  할머니도 장에 다니기가 수월하다며
할머니 앉은키 만한 보퉁이를 꼭 안으면서 만족한 미소를 주름진 얼굴에 띠우셨다.

장터가 보이자 할머니는 내리셨고 차안엔 남편과 나만 남았다.
남편은 짖꿎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 우리 동네가 교통이 불편하다고???  집을 옮길 거요? 당신 직장을
  그만 둘거요???"
" 몰라!!!!!"
나는 소리를 빽 지르고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하느님은 그토록 한가하신 분이 아닐텐데 어떻게 우리 차에
할머니를 보내셨는지 정말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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