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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1-10-12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3) 박달재
신영복 | 성공회대 석좌교수
 
ㆍ잊혀진 비련·밀려난 고갯길… 아픔을 정직하게 만나는 곳

2008년,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제천시 문화관광과로부터 부탁을 받고 박달재 현판글씨를 쓸 때였다. 글씨를 쓰기 전에 먼저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를 찾아서 들어 보았던 기억이 있다. 노래의 정서를 조금이나마 글씨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널리 알려진 한국인의 애창곡이다.

오늘 아침 박달재 현판을 보러가기 전에 나는 <가요114>에서 다시 한 번 박달재 노래를 들어보았다. 왕거미가 집을 짓고, 부엉이가 울고, 도토리묵을 싸고, 성황님께 비는 등 그 서사적 표현이 박달재의 애달픈 사연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낮은 음에서 서서히 음계를 높여가는 가락도 그렇다. 서서히 높아지던 음정이 절정에 이르면서 노래는 절규가 된다. 아픔의 절정에서 이성은 파탄되고, 감성은 독립한다. 나는 노랫말 중에 가장 마음 아픈 대목이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나’ 라는 구절이다. 물항라 저고리는 물들인 항라로 지은 저고리이다. 항라는 반투명에 가까운 얇은 옷감이어서 비에 젖은 물항라 저고리는 한사코 우는 금봉이를 더욱 애처롭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박달재.jpg  

박달재에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 방향에 각각 일주문이 있다. 제천시는 2008년 11월 박달재 명소화 사업의 일환으로 일주문 현판을 신영복 교수의 글씨로 교체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이 노래가 애창되는 까닭은 그 속에 담긴 통한의 비련(悲戀) 때문임은 물론이다. 운명 같은 만남과 사랑 그리고 운명 같은 죽음이 그것이다. 아름다운 재회를 기약했건만 과거에 낙방한 박달은 면목이 없어 돌아오지 못한다. 기다리다 지친 금봉이는 벼랑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리고 뒤늦게 돌아온 박달 역시 금봉이의 환영을 좇아 벼랑으로 떨어져 죽는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순애보(純愛譜)이다. 이처럼 가슴 아픈 사연을 글씨에 담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다만 정직하게 쓰려고 애썼던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박달과금봉이.jpg 박달재 정상에는 박달과 금봉이 손을 맞잡고 있는 동상이 서있다

 
당시 글씨를 부탁하였던 윤종섭 선생과는 이철수 화백의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윤 선생은 1998년 제천시 문화관광과장 재직 때 일주문을 세운 분이었다. 이 화백은 평동마을에 살고 있는 지가 벌써 25년이나 되며 당연히 지역문화 전반의 중심이기도 하다. 현판제작 때는 현판의 크기와 글씨의 배치 등 제천시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었다.

박달재는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잇는 해발 453m의 고갯마루로 문경새재와 함께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박달재 현판을 달고 있는 일주문은 봉양 쪽과 평동 쪽에 각각 하나씩 2개가 서 있다. 우리는 평동마을 쪽 일주문을 통하여 박달재에 올랐다. 고갯마루에는 동상이 된 박달과 금봉이가 다정하게 서 있고 ‘울고 넘는 박달재’의 애달픈 노래 소리가 인근 산천을 온통 점령하고 있었다.

마침 현장에 나와 있는 제천시 문화관광과의 해설사 두 분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야기도 후하고 자상하였다. 박달이 과거에 급제하였더라면, 또는 금봉이가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혹시 박달도령이 낙방하였더라도 지체 없이 금봉이를 찾아 왔었더라면 등등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새삼스레 안타까움을 쏟아 놓았다.

만약 박달이 낙방하지 않고 급제하였더라면 금봉이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화백의 답변도 그랬고 안길상 해설사의 답변도 같았다. 급제했더라도 금봉이와의 재회는 없었을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박달은 급제하여 세도가의 아리따운 처녀와 신혼살림을 차렸을 터이고, 버림받은 금봉이는 결국 자살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박달재 전설 중에는 이미 그런 버전도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급제한 박달이 임지로 가는 길에 이곳 박달재에서 잠시 수레를 멈추고 과거의 추억에 젖는다는 버전이 그것이다.

 

20111012_신영복_이철수.jpg 신영복 교수가 5일 이철수 화백의 집 마당에서 윤종섭 국장(오른쪽)이 가져온 저서에 사인하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진행되었다. 안길상 권태희 두 분 해설사와 이 화백 부인 이여경 여사는 금봉이의 비련에 마음 아파하며 여성 특유의 공감에 기울어 있었고 이에 비하여 이 화백과 윤 선생은 박달재 전설보다는 1995년 창의 100주년 때부터 제천 문화제를 의병제(義兵祭)로 통일하여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박달재의 역사적 의미를 피력하기에 여념이 없다. 고려의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거란의 대군을 물리치고, 별초군(別抄軍)이 몽고군을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1000여 명의 동학군이 평동마을에서 묵어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곳은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에워싸인 방어와 항쟁의 요지여서 구한말 호서의병의 본산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세가 암반이어서 평동마을 사람들의 기질도 강인하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두 분 해설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금봉이 이야기로 이끌고 갔다. 그래서 벼랑에 몸을 던지는 금봉이는 평동마을 처녀가 아니라는 버전도 있다는 것이다. 평동마을 처녀라면 한양으로 치고 올라갔으면 갔지 투신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봉이가 투신자살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실연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아기를 잉태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춘향이가 몇 년이고 이 도령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아기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조 중엽은 미혼모가 자신과 아기의 삶을 지켜가기에는 너무나 혹독한 사회였기 때문에 투신자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 저러한 버전들은 어쩌면 오늘날의 세태를 촘촘히 엮어놓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겠다며 서울 가신 오빠는 사실 친오빠가 아니라는 버전도 그런 것이다.

생각하면 우리의 산천 곳곳에는 고개마다 수많은 별리(別離)의 전설이 있고 그런 전설은 하나같이 비극적 사연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를테면 비극미(悲劇美)가 서민들의 압도적 정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서민들의 삶을 정직하게 담고 있어야 전설이 될 수 있고 또 세월을 건너서 전승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춘향전’은 서민적 서사(敍事)가 아니라는 것이다. 탐관오리에 대한 비판이 없지 않지만 ‘춘향전’은 결국 춘향이라는 개인을 계급 상승시키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진정한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와 비교해 본다면 박달재의 사연은 그 비극적 파토스가 지극히 서민적이라는 것이다.

이철수집.jpg  

충북 제천 평동리에 있는 이철수 화백의 집. 이 화백은 이곳에서 25년째 살고 있다.

 
오늘은 평일이기도 하지만 박달재는 찾는 사람도 거의 없어 한산하기 그지없다. 지금은 고갯마루 문화도 사라지고 주막문화도 없어진 지 오래다. 더구나 터널이 뚫린 이후로는 자동차로 박달재 밑의 땅속을 질주할 뿐 이곳에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직선과 속도라는 효율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갯마루의 곡선과 주막문화의 유장함은 아득한 변방문화의 전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달라진 것은 더 이상 별리를 아파하지 않는 세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각종 고시와 취업시험 그리고 대학입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있고 그들을 뒷바라지하며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 또한 그만큼의 좌절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더 이상 박달과 금봉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곤혹스럽기도 하고 차라리 다행스럽기도 하다.

‘매달릴 줄 알았지?’ ‘역겨워, 착각하지 마!’ ‘집착 없이 사라져 줄게’. 요즈음의 노랫말에 더 이상 비련(悲戀)은 없다. 한사코 우는 금봉이는 어디에도 없다. 사랑은 뜨겁지 않고 차가운 것이다. 더 멋진 사람 만나 너를 후회하게 만들어주거나, 네가 망가지라고 빌고 빈다. 금봉이의 뜨거움(hot)도 곤혹스러운 것이지만 젊은 세대의 차가움(cool) 또한 섬뜩하기 짝이 없다. 물론 실연이 목숨을 걸 만한 것은 아니겠지만 문제는 이처럼 차가운 언어가 오히려 반어(反語)처럼 들린다는 사실이다.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그리고 수백만의 비정규직이라는 오늘의 열악한 상황이 만들어낸 불행한 언어인지도 모른다. 하루 42명이 자살하는 우리의 참담한 현실에서도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차가운 감성으로 무장하고 있는 셈이다. 아픔과 좌절마저 단단한 껍질을 쓰고 있어야 할 정도로 우리의 현실은 정직한 정서 자체를 용납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려오는 길에 나는 박달과 금봉이가 투신한 곳이 어딘가를 물어보았다. 윤종섭 선생은 그렇지 않아도 제천시에서는 금봉이가 투신한 곳을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물론 투신현장이 있을 리 없겠지만 나는 조만간 투신현장을 찾아내고 그 아픔의 현장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대한다. 그곳은 우리가 아픔을 정직하게 만나는 곳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픔은 그것을 정직하게 공유하는 것이 최고의 치유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이 ‘사랑’의 아픔이라면 비련(悲戀)을 뛰어 넘는 비약(飛躍)의 도약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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