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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3.06.20 09:32

미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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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 수필

나는 미장이다. 미장이는 건축현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도 소망을 이루려고 벼르다가 얻은 직업이 아니다. 어릴 적에는 꿈도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 될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꿈이라는 것이 푸른 하늘에 두둥실 흐르는 뜬구름 같이 허무하게 흩어지는 경우가 많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경험으로 다들 잘 알 것이다.

나이 마흔셋이 되도록 안 해 본 일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험하다고 돌아서는 일은 다 했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니다. 남들이 싫다는 일을 내가 굳이 좋아서 한 게 아니라 먹물 먹은 놈들이 좋아하는 일은 내게 돌아오지 않으니 그들이 꺼리는 일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보수가 좋아서 선택하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보수가 좋든 나쁘든 먹고 살아야하니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유산 같은 건 없지만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대로 일을 한 덕에 지금은 내 이름으로 된 작은 아파트도 한 채 장만했고 아들 딸 두 남매를 전문대학까지 보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허드렛일 함께 하며 내조한 아내의 공이 컸지만 사내라면 다 즐기는 술, 담배까지 멀리하며 내가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제 미장일을 십 년 넘게 하면서 나이 마흔을 넘기니 기술자라고 대우가 괜찮다. 그래서 나는 내 일에 얼마만큼은 긍지를 가지고 산다.

예전에는 주로 집 짓는 일에 따라다녔지만 이젠 리모델링이 유행이라서 아파트 내부공사를 많이 하기 때문에 아주 힘든 일도 아니다. 그리고 구조조정이다 뭐다 하면서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어 땅이 꺼지도록 한숨쉬면서 안방 천장 무늬나 셀 일도 없어 넥타이쟁이들 만나도 예전처럼 주눅들지 않는다. 그런데 요 며칠 동안 아파트 내부를 수리하는 집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넓고도 화려한 그 집을 처음 찾았을 때, 주인보다 먼저 애완견 한 마리가 나와서 나를 보고 맹렬히 짖었다. 사람보다 더 치장을 한 강아지는 아주 귀여웠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짖는가 여기고 웃으며 어루만져 주었다. 이젠 멀쩡한 집을 뜯어내고 값비싼 수입자제로 공사하라는 주인을 만나도 내 신세타령이나 하면서 심술부리지 않듯이 애완견이라면 아무리 무섭게 생긴 개가 짖어도 그 정도는 다룰 줄 안다는 자부심이 있어 성가시지 않다. 며칠 맛 좋은 과자나 먹이면서 친해 놓으면 재롱도 금방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놈은 과자도 통하지 않고 짖었다. 야비하게도 이 놈은 내 과자만 먹고 돌아서면 곧 잡아먹을 듯이 짖어댔다.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나를 보고 짖을 때의 녀석의 눈깔을 보면 아주 얕잡아보는 느낌이 역력히 들었다. 내 평생 얕잡아보는 눈깔들은 신물이 나도록 보아왔다. 그런데 개**한테까지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쏟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그 개**를 가만두지 않기로 했다. 어제는 일을 하다가 새참 먹는 시간에 고기 한 조각으로 그 놈을 유인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 간 신나를 수건에 듬뿍 묻혀 놈의 코에다가 문질렀다. 개는 캥 소리도 내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나는 주인의 눈을 피해 재빨리 내 일터로 가서 일에 열중했다.

다음날 그 집에 가니 우아하던 사모님은 화장도 하지 않은 채 울먹이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글세 개가 아프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죽었어요." 사모님은 마치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잃은 것처럼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비싼 가죽소파에 마른걸레처럼 쭈그러지면서 앉아 울었다. 나는 시큰둥한 대답만 하고 태연하게 돌아서서 내 일자리로 갔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그냥 평소대로 시멘트와 모래를 잘 반죽하여 정성껏 바르다가 '개는 주인을 닮는다'는 말이 언뜻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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