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에 이르는 길(1)-신영복 한글 서체의 발견

by 김성장 posted Sep 0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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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한글 서체의 발견
                     
<꿈에서 먼저 뵙다>

"서법은 집필, 묵법, 용필, 필세 등 그 법이 넓고 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본은 한자이든 한글이든 결국 필법으로 요약된다.
중봉(中鋒) 관직(管直) 장봉(藏鋒) 현완(懸腕) 현비(懸臂) 등 용필(用筆)의 요체를 의미한다.
붓이라는 매우 불편한 필기도구를 효과적으로 운필할 수 있는
이른바 '방법에 관한 법'이다.
바둑에 정석이 있고 각종의 운동에 기본적인 틀(form)이 있듯이
붓의 운필(handing)에 있어서도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이룩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이 이른바 용필로서의 필법이다."

이것은 신영복 선생님께서 당신의 첫 작품전 도록 '더불어 손잡고'에 '서예와 나'라는 제목으로 쓰신 글의 일부입니다.
제가 이 글을 인용하는 것은 신영복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우선 과정을 설명을 좀 해야겠네요.
저는 10여년 가까이 신영복 선생님 글씨를 몰래 써왔습니다. 그러다가 2001년 겨울 '더불어숲' 모임에서 처음으로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더불어 숲'은 신영복 선생님을 좋아하는 분들의 모임입니다.  신영복 선생님 글씨에 관심을 가지고 써온 사람은 저 뿐이었습니다. 그 모임에 나오는 분들은 신영복 선생님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인품에 반한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몇년 전에 보은의 한 고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도 한분 그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그 모임은 회원들이 갖는 모임이었습니다. 저는 회원이 아니었지요.
그 모임의 회원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저는 신영복 선생님을 가슴에 품어온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읽긴 했지만 저는 서예를 통해서 신영복 선생님의 이상과 꿈 한자락 잡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저의 운명 같기도 하고 좀 청승맞게 얘기하자면 팔자 같기도 합니다.
10년 정도 거의 신영복 선생님 글씨를 주로 썼습니다.
그렇게 그날 그 모임에 찾아간 것은 좀 예외적인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으로 그저 혼자 신영복 선생님 글씨를 써왔다는 것 때문에 그날의 회합에 불쑥 참여한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꿈에서 신영복 선생님의 뵈었으니 구면인 셈입니다. 그것도 꿈에서 서예 지도를 받는 꿈을 꾸었으니 이미 서예로 말하자면 제자가 된 상태였고 따라서 그리 꾸지람할 일도 아니지요.

<이철수 화백께 얻은 신영복 전시회 도록>

1992년 무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예 공부를 시작한지 3년쯤 지났을 때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글씨에 대해 미학적 분석을 하려는 욕심을
내보기도 하지만 그때는 어떤 생각으로 신영복 한글 서체를 쓰고자했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저는 서예 학원에서 전문 서예인으로부터 서예를 배우다가
학교를 옮기는 바람에 학원을 다니지 못하고 혼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아마 자유롭게 내던져진 공간에서 신영복 한글 서체에 빠져든 것 같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요.
신영복 선생님의 이력을 대략이나마 알고 있던 사람으로서,
전교조와 민족문학작가회의를 통해서 진보적 사상과 변혁의 열망에
몸을 맡긴 사람들의 습기를 어느 정도 익혀가는 과정에 있던 사람으로서,
신영복 선생님은 저에게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전교조 활동으로 징계와 강제 전출을 밥먹듯이 당하던 시절이었으니 저의 정신적 기둥이 되는 진보적 사상가나 활동가들 중 한 사람으로 신영복 선생님이 저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저는 신영복 선생님의 한글 서예 작품을 닥치는 대로 모았습니다.
책의 제목 글씨,
유인물이나 잡지의 제호,  
다포(茶布)의 글씨 등과,
소소한 것들로 집회의 장소에 걸려있던
김남주의 시 '조국은 하나다'를 쓰신 글씨
(아마 대학의 시위 현장에 걸개로 걸려 있던 것인데 누군가가 사진으로 찍어서 잡지에 실었던 것인듯),
골판지 박스에 쓰여져 있던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라는 글씨 등등
그때 저는 신영복 선생님의 서예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도록이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저는 나중에 그 도록을 판화가 이철수 씨의 집에가서 보았고 이철수 화백께 부탁하여 한부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철수 화백의 집은 제천입니다.
이철수 화백의 집에 가게 된 것 경위는 그렇습니다. 제가 그곳에 간것은 단지 그 집이 제가 지나가는 길 옆에 있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충북의 남쪽에 있는 옥천군의 청산중학교에서 보충수업을 거부하여 징계를 당하고 북쪽 끝에 있는 단양의 매포 중학교로 쫓겨갔는데 고향인 옥천에서 단양을 오가다 보니 그 중간 쯤에 있는 이철수 화백의 집을 지나게 된 것이지요. .
충북 민예총의 전신인 충북문화운동연합을 만들던 시절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곤 했었는데 가까이 가게된 인연으로 들르게 된 것입니다.
이철수 화백은 신영복 선생님과는 친분이 있으셨던 듯합니다.
사적인 만남에 대해서도 저에게 말씀해주시더군요.
제가 신영복 선생님 글씨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더니 '자신의 글씨를 써야지 흉내만  내서야 되겠는가'하는 꾸짖음을 주셨습니다. 이철수 화백의 예술관으로 보자면 그 말씀은 당연하지요. 그러나 꾸짖음은 꾸짖음이고 저에게는 제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에 저는 그 얘기를 우선 가슴 속에 간직해두기로 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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