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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3.09.19 22:17

동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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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읽었던 책에 있던 글귀가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고아출신 사업가가 자신의 성공담을 쓴 책이었다. 그 책엔 굶주림과 세상의 멸시를 이기고 꿈을 이룬 한 남자의 이야기가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서도 잊혀지지 않는 글귀는 가끔씩 깊은 반성의 마음을 갖게 했다.
  
성공한 사업가가 소년시절엔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그를 후원하는 사람가운데는 신부님도 있었다고 한다. 소년은 한 달에 한 번 신부님을 찾아가서 후원금을 직접 받아왔다. 그런데 소년은 그 일이 정말 싫었다. 돈을 받을 때는 언제나 고개를 숙였다. 어쩌다 신부님과 시선이 마주치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알을 뽑고 싶었기 때문이라 적고 있었다. 얼마나 섬찟한 표현인가.

소년은 동정 받는 자신의 처지가 죽기보다 싫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 신부님은 성직자로서 해야 할 의무감에만 사로잡혀 고아소년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은 갖지 않았는지 모른다. 사랑이 없는 동정심은 타인을 도우면서도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글귀였다.

인간관계에서 사랑이나 책임이 없는 동정심은 안되는 줄 알았지만 사람과 동물사이에도 그 진리(?)를 기억해야 된다는 것을 진작에는 몰랐다. 서울에 살 때는 안중에도 없던 일을 시골와서 살면서 겪은 사소한 경험으로 그것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제는 한낮의 태양이 이슥해지자 선선한 바람이 일어 호미를 들고 배추밭으로 나갔다. 이랑이랑 햇빛이 갈라지는 밭에는 연푸른 잡초가 융단처럼 돋아나 있었다. 밭 두렁 가에는 여름 내 자란 풀들이  억새마냥 우거졌다. 해거름의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김매는 일은 그다지 싫지 않은 노동이라 다른 밭에도 사람이 더러 보였다.
  
서로 인사를 건네고 호미질을 하는데 어디선가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소리는 여느 때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힘없이 내뱉는 '끄르륵'소리는 몹시 지쳐 곧 끊어질 듯 가늘게 울다가는 한참 만에야 다시 한숨 같은 울음을 뱉어내었다. 내 곁에서 밭일을 함께 하던 할머니가 주변을 살피며 말씀하셨다.

  "개구리가 저래 우는 소리내마 뱀한테 멕히는 중이데이."

그는 개구리가 소리내는 쪽에서 일렁이는 풀숲을 호미로 살폈다. 과연 그곳엔 입에 물고 있던 개구리를 내던지고 달아나는 뱀이 보였다. 녀석이 사라진 자리엔 살점이 찢긴 채 가슴을 팔딱이는 연약한 개구리가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개구리의 작은 심장이 힘차게 뛰기를 기다렸으나 푸르던 몸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이내 죽어버렸다. 그새 뱀의 독이 몸에 퍼진 것이리라. 가련한 죽음을 맞는 약자의 패배를 보며 기분 좋던 노동에 힘이 빠지며 나는 허망한 한숨을 지었다.

개구리의 죽음은 한동안 내 마음 안에서 어른거렸다. 강자에게 희생되는 약자만큼 서러운 일이 또 있을까. 나는 에덴동산 주인의 후예답게 파충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간악한 뱀을 마음껏 미워했다. 사악한 뱀이라며 몇 날을 미워하다가 문득 훼방꾼에 의해 먹이를 놓친 뱀의 엎질러진 사냥을 떠올렸다.

'뱀은 간악한 동물이다' 라고 금을 그은 것은 인간세상의  편견일 뿐이다. 녀석이야 생긴대로, 자연의 섭리대로 사는 구성원이 아닌가. 생각하니 과잉친절이 동반된 공연한 인간의 동정심이 개구리도 살리지 못하면서 뱀의 먹이마저 빼앗는 부질없는 일을 저질러 놓았다.
  
그러나 어제의 일로, 누가 누구를 동정하는 일은  자칫 상처만 남기는 허세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그 허세는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의 세계에도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생각하는 경험이었다.  
  
오늘 낮에는 마당에서 빨래를 널다가  허공에서 파닥이는 호랑나비를 한 마리 보았다. 햇빛이 눈 부시는 나뭇가지에 걸린 거미줄에서 호랑나비가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모양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날개에서 떨어지는 분가루가 빛에 반사되어 보석가루처럼 반짝이며 흩어졌다. 나는 거미줄을 작은 막대기로 휘저으려다가 생각을 고치고 시선을 돌렸다.
  
또 다시 침입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설사 아름다운 호랑나비가 거미의 먹이가 된다해도 이젠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자연은 섭리대로 움직일 것이다. 섣부른 동정심을 앞세워 인간이 끼어 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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