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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3.10.03 20:09

감나무를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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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집 감나무에 감 몇 개가 매달려 있다. 가지에 달린 채로 홍시가 된 걸 보면 까치밥인 모양이다. 까치랑 같이 나도 한 알 먹었으면.

감나무를 보면 이오덕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살아 있는 것들 중에 나무만큼 아름답고 착하고 성스러운 것이 있느냐고 물을 만큼 나무를 좋아하셨다. 그 나무들 중에서도 감나무를 더욱 좋아하셨다.

가을에 무너미에 있는 선생님 댁에 가면 선생님이 늘 앉아 계시는 방의 창가에 감나무 잎이 여러 잎 놓여 있었다. 단풍 든 빛깔이 너무 고와서 곁에 두고 보려고 마당에 떨어진 걸 주워 왔다 하셨다. 그러면서 너무 익어서 한쪽이 조금 터진 홍시를 채반에 담아 주시며 먹으라 하신다.

한번은 선생님과 같이 마당에 나가 커다란 감나무 아래 서서 감나무 잎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을 같이 보았다. 그 파란 가을 하늘과 새하얀 새털구름, 울긋불긋 물든 감나무 잎과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알간 감.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빚어 내는 풍경이 어찌나 황홀한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선생님은 감나무 아래에 떨어져 있는 홍시를 주워, 모래가 덜 묻은 것과 덜 터진 것은 나를 주고 건네주기 어려울 만큼 터진 것은 선생님이 드셨다. 그나마 떨어진 것을 다 주워 먹고 나자 선생님은 장대를 꺼내 오셨다. 장대 끝은 철사로 갈고리를 만들어 감았고 거기 양파망 같은 것도 달려 있었다. 그걸로 높은 가지에 달려 있는 감을 따 주시면 나는 냠냠 달게 먹었다. 배가 불러 더는 못 먹겠다 하니 입가에 묻은 홍시의 흔적을 닦으라고 노란 감나무 잎을 주워 손수건인 냥 건네주셨다.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다 돌아가셔서 할아버지 정을 모르고 자랐다. 그 날 선생님은 내게 스승님이기보다 친할아버지거나 외할아버지셨다.

감을 다 먹고 집 안으로 들어와서도 선생님은 감나무 이야기를 오래도록 들려주셨다. 나한테 들려주신 이야기는 글로도 쓰셔서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의 회보인 <우리 말 우리 얼>에도 실었다. 글이 길어서 한 번에 다 못 싣고 여러 번 나누어 실었다.

몇 해 뒤, 선생님과 인연이 있던 '산처럼' 출판사의 사장님이 그 글을 읽고 감동해서 '감나무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책을 만드느라 원고 검토를 하다가 마지막에는 선생님이 요 몇 년 동안 자연에 대해 써 놓은 글을 모두 모아 한 권으로 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나온 책이 <나무처럼 산처럼>(산처럼 출판사 펴냄)이다. 그 책에는 감나무가 철따라 보여 주는 아름다움과 쓸모와 감나무로 쓴 아이들의 시가 실려 있다. 또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생님의 안타까운 마음과 걱정이 실려 있다. 200쪽 가까이 되는 책에서 감나무 이야기만 65쪽을 차지하니 선생님이 감나무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잘 알 수 있다.  

가을에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어디로 가든 으레 단풍 든 산을 볼 수 있다. 굳이 설악산이나 내장산으로 단풍놀이를 떠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산 위로는 뭉게구름 떠 있는 높고 청명한 하늘이 있고 논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물결친다. 마을을 지날 때는 어느 마을이고 멀리서도 환히 뵈는 감나무들이 있다. 감나무에는 자유롭게 뻗어나간 가지에 파란 하늘과 그렇게 잘 어울리는 붉은 감들이 오롱조롱 달려 있다. 그것이 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나는 우리 농촌의 가을 풍경이라면 늘 이런 풍경이 머리속에 떠오른다.

선생님은 감나무뿐만 아니라 목숨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셨기에 요즘 사람들이 자연에서 멀어지고 자연을 모르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몹시 걱정하셨다. 더구나 작가나 글쓰기회 회원들이 책에다가 자연에 대해 조금이라도 사실과 다르게 쓰거나 마음대로 상상해서 쓰는 것을 엄하게 꾸짖으셨다. <나무처럼 산처럼>의 머리말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 자연을 몰라도 글을 쓸 수 있겠지. 그런데 문학이라고 하는 글, 더구나 시라든가 동화 같은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자연을 몰라도 돈벌이를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정치를,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작년에는 1990년대 이후에 씌어진 동화들 중 아이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동화 작품들을 골라 비평을 하고, <어린이책 이야기>(한길사 펴냄)라는 책으로 글을 묶어 내셨다. 동화 작품 속에 자연에 대해 엉터리로 묘사한 부분과 우리 말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나 우리 말이 아닌 낱말들을 꼼꼼히  찾아서 지적해 놓으셨다.

자연과 아이들과 우리 말을 사랑하셨던 선생님. 선생님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신 지 한 달이 지났다. 할일이 많아서 더 오래 살아야겠다고 하셨던 선생님이 벌써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다. 아직도 못다 배운 것투성이인데, 선생님의 큰 뜻을 어떻게 이어갈까?

선생님이 평생 쓰거나 엮은 책이 80권이 넘는다. 내 책꽂이 꽂혀 있던 책들을 다시 분야별로 정리했다. 그리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꺼내 보니, 언제나 형형한 눈빛을 하고 맑고 서늘한 기운을 전해 주시던 선생님이 곁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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