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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3.11.17 21:23

장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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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와 함께 매일 아침산책을 한다. 마을을 빠져나가 산허리를 감고 도는 안개가 구름처럼 떠다니는 오솔길에 고요히 묻히면 나는 잠시 자연의 일부가 된다. 더욱이 가을 아침의 시골길을 걸으면 마치 산수화 속의 좁은 길을 걷는 나그네가 된 듯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림 같은 풍경 안에서 오늘 아침엔 작은 문제가 일었다. 이른 아침부터 밭에 엎드려 일하는 사람이 보이는 곳이라 산책이란 말은 입밖에 낼 수도 없고 조용히 다녀와야 하는데 강아지가 협조하지 않아서 말썽이 생긴 것이다.

금방 내 뒤를 따르던 녀석이 누구네 밭인지 모르지만 뛰어 들어가 오줌을 쌌다. 일손 바쁜 농촌에서 느릿한 걸음을 걷는 나의 귀에 어디선가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놈이 어디다 오줌을 싸노? 새벽부터 장꺼리 해놨꾸만!!!"

얼른 달려가 보니 녀석은 벌써 저만치 도망가고 소리지른 아저씨의 발 앞에는 배추가 든 커다란 비닐 보퉁이가 있었는데 아직 누런 액체가 한 방울 떨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자식이 저지른 죄 앞에서 대신 사죄하는 어미처럼 쩔쩔매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별안간 화에 치받쳐 벌겋게 달아오른 아저씨의 얼굴은 여전히 술 취한 사람처럼 풀리지 않았다.

장꺼리라고 하면 이제 곧 시장에 나가 팔아야 할 물건이 아닌가. 장에 나가면 좋은 값으로 단숨에 팔려야 할 물건에다 아침부터 사람도 아닌 강아지가 오줌을 쌌으니 아저씨로서는 오늘은 완전히 재수 없는 날로 낭패를 당한 것이다.    

장꺼리 주인의 노여움을 풀어주지 못해서 그런지 오늘은 종일 아침 안개가 내 가슴속에 들어앉은 듯 침침했다. 그리고 그 아저씨가 왜 하찮은 일에 민감한지 헤아려 보게 되었다.

그가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그렇듯 화를 낸 것은 그 일 자체를 재수 없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그런 불상사들이 불길을 예시하는 조짐이라 믿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먹구름이 몰려오면 곧 비가 오리란 걸 알 듯이 그렇게 불길한 징조를, 사소하게 드러나는 불쾌한 일들과 마주치면서 사람들은 미리 감지하는 게 아닐까. 장마가 시작되려면 개미가 떼를 지어 이동하고 폭풍이 오기 전엔 새들이 바삐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난데없이 강아지가 뛰어들어 오줌을 싸는 짓이 불길한 미래를 알리는 자연의 예시라고 믿는 것 같다. 얼굴빛이 좋지 않은 자식을 보며 병날까 걱정하듯 모든 불행한 일에는 우리가 다 깨닫지 못하는 경고가 있는 듯하다. 그런 경고를 인식할 수만 있다면 불행을 조금은 비켜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침 안개에 가려있던 태양은 서녘으로 기울어 한 떼의 구름을 장미다발처럼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장꺼리를 메고 나간 그 아저씨의 하루는 어땠는지 자꾸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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