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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는 책을 많이 읽었다. 많이 읽었다는 의미는 여러 종류의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같은 책을 여러번 읽었다는 뜻이다. 혼자서 조용히 읽은 것 또한 아니었다.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을 청중으로 모시고 큰소리로 읽었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방학을 언제나 외갓집에서 보냈는데 밤마실로 외숙모방에 모인 이웃을 위해서 책을 읽었다.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5일장 어귀에서 두루마기도 없이 동저고리 바람에 세우젓 같이 가느런 수염을 소중히 기른 아저씨가 난전에 펴놓고 파는 책들이었다. 수 년 전, 도서전시회란 곳에 갔더니 어릴 적 내가 읽던 책이 나와 있었는데 요즘 책에 비하면 조잡하기 짝이 없는 그림과 인쇄를 마주 하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네에 앉은 춘향이를 이몽룡이 밀어주는 그림이 그려진 책이나 찢은 북 앞에 눈물 흘리며 선 낙랑공주의 어깨를 짚고 위로하는 호동왕자가 있는 책들의 표지를 보면서 그 책이 닳도록 읽었던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때로는 변사의 흉내를 내면서 읽기도 하고 때로는 일인극을 하듯 일어서서 그럴 듯한 제스쳐나 표정까지 지으면서 읽었다. 그러면 문맹(文盲)의 벽을 넘지 못한 나의 팬클럽(?) 회원인 동네 할머니들은 좋아라고 손뼉을 치면서 추임새를 넣어 주셨다. 어쩌다 방학이 시작되었는데도 내가 외갓집에 얼른 가지 않으면 외할아버지와 외숙모보다 마을 할머니들이 더 기다린다는 소식이 전해오기도 했다.

나의 독서 습관은 그렇게 가상의 세계에 빠지면서 기초가 닦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는 학교 도서실에서 빌린 동화를 읽었다. 그때는 혼자서 조용히 읽을 수가 있었다. '인어공주' '신데렐라' '성냥팔이 소녀' '백설공주' 등이 기억난다. 신데렐라처럼 해피앤딩이면 좋으련만 인어공주같이 가슴 아픈 결말인 동화를 읽은 날은 가여운 주인공들을 걱정하느라 밤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동화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드 넓은 세상으로 날개를 저어면서 자랐다. 아주 어릴 적부터 가공의 이야기들을 읽어서 그런지 나는 소설과 동화나 현실을 오랫동안 분간하지 못했다.

중학교 1학년 때라고 기억된다.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 갈 기회가 있었다.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부두에서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 발 밑에서 출렁이는 바닷물은 파랗다고 하기엔 너무 더러웠고 온갖 찌꺼기와 무언지 모를 기름이 둥둥 뜨는 물을 바라보면서 인어공주와 심청이를 생각했다. 얼마나 깊이 들어가면 용궁이 있을까 가름하다가 실제 한 번 들어가서 알아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불끈 솟았다. 아무래도 물이 맑은 곳이라야 용궁으로 가는 지름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부두를 기웃거리며 궁리하는 중에 부두 사무실에서 볼일을 끝낸 아버지가 나오셨다. 그때 나의 꼴이 이상했던지 아버지는 나에게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엄하게 물으셨다. 내 대답을 들은 아버지는 아연실색하면서 동화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일깨워 주셨다.

아버지는 아름다운 나의 상상의 세계를 순간에 '허무'로 무너뜨렸지만 나는 허상의 세계에서 바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온 듯하다. 마흔이 넘어서야 내가 몽상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읽고 상상하고 꿈꾸었던 세계와 전혀 다른 세상을 살면서 많은 상처를 받은 후에야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래서그런지 나는 어린이를 위한 아동문학이 따로 있다는 현실을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다. 안데르센 생존 당시에도 빛나는 그의 명작들을 향해 '아이들을 현혹하는 조잡한 글'이라고 비난한 평론가를 상기하지 않더라도 나의 경험만으로도 있지 않아도 좋을 문학의 장르라고 물리치고 싶다.  

아동문학가는, 어린시절에 읽는 동화나 동시의 영향으로 꿈을 키우고 용기를 북돋운다고는 하지만 꿈이란 욕심으로 변질되기 쉽고 용기란 공격이라는 형태로 바뀌기 쉬운 감정이기도 하다. 꿈이란 무언가? 보다 돋보이는 나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차별을 원하는 것과 같은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의 편견이 너무 비약된 것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어린 시절에 키운 꿈이란 동화의 세계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만 현실에서는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평생을 소진하면서 살아야 한다.

거기다가 꿈이라는 것은 '자아실현'이라는 다른 말로 변하면서 자신을채찍질한다. 그러나 자아실현은 순순히 이루어지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제도가 차단하고 경쟁자가 밀어낸다. 그렇게 좌절하면서 어른이 된 사람은 내 부모와 자식도 잊은 채 "내가 왜 사냐?"고 묻는다. 왜 살아야 하는데? 인간은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키워야 하는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살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이루어지지 않는 환상과 용기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한가지의 도리에 맞추어 사는 게 나을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인간의 도리를 배우고 인성의 기본을 다져야 할 나이에 꿈과 용기를 키우느라 마냥 어린이로 남는다. 인생에서 적어도 10년은 성숙을 멈춘 채 꿈을 먹고 산다. 그러나 자신을 아직 어린이니까 어른이 이해해 줘야 한다고 심리적으로 버티는 아이와 자신도 빨리 어른을 이해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아이의 성숙해 가는 속도는 매우 다르다. 어른이 되어가는 속도를 늦추는 이유가 아동문학 탓이라고 하기엔 억지일 것이다. 가족제도와 교육제도, 그리고 사회제도가 어린이의 성숙을 억제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동문학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크다는 사실을 내가 어린이 글쓰기 지도를 하면서 조금씩 확인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이면 서당에서 천자문부터 시작해서 명심보감, 대학 등을 읽게했다. 거기서는 단지 한자라는 문자만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뜻이 담긴 문장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인성을 다듬고 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보다 빠르게 성숙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어린이들에게는 동화보다는 실제 이야기를, 동시보다는 윤동주와 이육사 시대의 시를 만나게 하고 시경에 나온 옛시를 소개 한다. 또 내가 아는 범위 안에 있는 '논어'의 구절과 성경을 함께 읽는다. 또 신문 사설이나 좋은 수필을 읽고 토론하기도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당연히 그 나이만큼 이해하면서 받아들인다. 쉬운 언어로 썼지만 아이의 머리로는 따라 갈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 어른이 쓴 동화나 동시보다 좋아한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동문학을 보는 나의 시각은 더욱 부정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의견이 멀쩡한 아이들을 위한 아동문학이 따로 있다는 사실에 찬성하고 싶지 않게 된다. 피터팬이나 신데렐라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무슨 증후군과 신드롬이라고 일컫는 병도 없을 것이다.

세상 어린이들을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아동기'라는 시기로 분류하고 그들의 문학을 따로 두는 것보다 사물에 눈뜨는 아주 어린시절에 가공의 이야기를 처음 만나게 하지말고 모든 이치를 바로 깨닫게 하는 책을 읽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어린시절 내가 당시에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이야기책을 읽지 말고 할아버지 앞에 꿇어 앉아서 천자문을 읽었다면 내 인생은 훨씬 달라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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