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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4.04.04 04:57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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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마음

외출에서 돌아와 주방으로 들어서는데 아내가 음식준비에 부산하다.
“아니, 무엇을 하는데 이리 분주해. 둘밖에 없는데 대충해서 먹지” 하며 식탁에 앉는데 큰 상이 비좁게 갖가지 나물들이 나온다.
“아니, 왠 나물들이야?”
“그냥 했어요. 혹시 갑자기 손님이라도 오면 쓸려고 갈무리 해두었던 나물들인데 오늘은 당신에게 대접하려고요. 그리고 가을이 되었으니 다시 새 나물들을 말려야지요.”
오늘 저녁상은 아내가 온종일 불리고 장만한 고사리, 도라지, 박나물, 호박나물과 아주까리 잎 대신에 볶았다는 깻잎나물하며 쇠고기고명, 계란부침으로 장식한 골동 반이 올라와 상이 푸짐하다. 온갖 나물들을 넣고 고추장 한 수저 듬뿍 떠 얹어 밥을 비비니 밥이 입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입안에서 군침이 돈다. 대청 서까래에 굴비를 걸어 놓고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다 오래도록 손님이 오지 않으면 상하기 직전의 굴비를 내려 식구들끼리 먹은 후 또다시 귀한 손님 몫으로 새 굴비를 사다 걸어두는 옛 인심이 이러하였을까 생각해보았다. 이민 초기 몇 안 되는 이민자들이 일정한 직업 없이 관망하며 살던 때는 자주 모여 바비큐를 하며 이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여러 정보도 나누었는데 이제는 다들 나름대로 안정되어 바쁜 삶을 사니 만나서 함께 식탁에 앉을 기회가 흔하지 않다.

창 밖으로 정원의 나뭇잎이 붉게 물들어 떨어지는 것을 보다가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처가 동네의 조그만 역이 생각났다. 그곳은 영주에서 안동 쪽으로 한 정거장 아래에 있는 완행열차만 서는 시골이다. 타고 내리는 손님도 몇 되지 않는 한적한 곳이다.
기차에서 내려 목조건물의 아담한 역사를 나오면 한 줄기 흙 길이 보인다. 가을이면 그 길옆으로 코스모스가 한없이 피어있는 꽃 길이다. 그 꽃 길을 따라 왼쪽 산자락으로 꺾어서면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농로가 나오고 이십여 분쯤 걸어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 ‘사느레 과수원’이라는 푯말이 보이며 양지바른 언덕 아래로 잘 자란 과목 숲이 펼쳐져 있다.
붉은 사과와 봉지에 싸인 배가 주렁주렁 매달려 가을 볕에 단맛을 더하며 익고 있는 과수원으로 들어서면 언덕길이 제법 시원스레 닦여져 있고 사과 밭 안에는 청포도 넝쿨이 얹혀진 아담한 과수원 집이 보인다. 그곳이 80년대 초, 추석이나 설 명절 때 귀성 표를 구한다고 청량리 역에 나가 이른 새벽부터 이리저리 밀리는 난장판 속에 겨우 구한 열차표를 가지고 아내와 아들 손을 잡고 가던 처가다.
과수원 진입로가 제법 널찍하게 닦여진 것은 이 마을에서 새마을 사업으로 길을 넓힌다고 할 때 선뜻 과수원 한 자락을 내어 놓으시며 사위가 승용차를 타고 내려올 때 과수원 안까지 들어오기 쉽게 해주어야겠다는 장인의 사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동차를 가지지 않았던 나는 열차를 타고 처가에 내려가거나 아니면 버스로 내려갔을 뿐 한번도 잘 닦여진 그 길을 차를 몰고 가보지 못하였다.
그곳 과수원은 여름 휴가철마다 우리 세 식구가 내려가 농가의 바쁜 일손은 나 몰라라 한 체 마치 별장에라도 내려온 양 백년손의 세를 늘어지게 누리다 올라가곤 했던 피서지였다. 어쩌다 기차표라도 구한 후 내려간다고 전화를 드린 명절에는 나의 가장 미더운 후원자이자 별장지기이신 장인께서는 아침부터 들며 나며 잘 익은 과일을 골라 따놓으시고, 또 사위에게 잡아줄 씨암탉도 점지해놓으시며, 당신은 한 모금의 술도 못 드시면서 사위를 위해 숙성시켜 놓은 과일 주를 꺼내놓는다. 십 리길 장에 나가 며칠만 놀다 갈 외손주의 세발 자전거도 사다 놓으시고 고목 자두나무에 그네 줄도 달아 두시고는 우리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부터 과수원 언덕에서 서성이며 친정 나들이 온다는 딸과 백년손인 사위를 기다리셨다.
과수원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밤나무가 있어 추석 때면 밤송이가 벌어져 알밤이 내비친다. 사위와 손자에게 밤 따는 재미를 주려고 장대까지 준비하여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셨다. 어쩌다 명절이 지나도록 가 뵐 수 없을 때면 과일 상자들을 수화물열차 편으로 올려 보내 주셨다. 그러나 그 애틋한 사랑도 다 내려 놓으시고 우리가 이민 온 그 다음 해에 장인은 세상을 떠나셨다. 외국에 나와 들은 그 부음은 세상을 온통 잃어버린 듯한 슬픔이었다. 처남이나 처제보다도 맏딸인 아내와 나를 유난히도 사랑하신 장인을 생각하노라면 한번도 갚지 못한 당신의 사랑에 마음이 아프다.

‘한솥밥’이란 귀한 붓글씨 한 폭을 건네준 친구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으나 김형이 가지고 있으나 마찬가지야.” 라며 글씨를 건네주고 웃으며 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그 댁을 방문하고 부엌 한 곁에 걸려있던 글씨를 부엌에 잘 어울린다며 바라보았던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귀한 글을 선뜻 내놓는 것으로 보아 그의 마음 속에 나와 우리 가족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식이든 사랑이든 기다리는 마음은, 바라며 요구하는 마음이 아니라 생각한다. 기다리는 마음은 순수한 마음이다. 반길 손님이라도 올까봐 나물을 갈무리 해두었던 아내의 마음이나, 굴비를 대청 서까래에 매달아 둔 윗대 어른들의 기다림, 그리고 딸과 사위를 위하여 길을 넓히고서 과수원 언덕에서 기다리시던 장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기다림이다. 낙관 찍힌 글씨를 성큼 건네주는 마음 또한 사랑이 번지길 기다리는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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