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대상 게시판

청구회추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나무야
더불어숲
강의
변방을 찾아서
처음처럼
이미지 클릭하면 저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숲속의소리

2004.04.21 14:09

댓글 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지난 일요일, 나는 한 사람에게 무섭게 화를 냈다.
그는 다달이 일주일쯤 만나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다.
올 1월부터 만났으니 넉 달째 만났다.
처음 일을 하고 나서 내게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은 이렇다.
마감날이 한참 지나도록 그는 마감을 하지 않았고 자기 손전화는 꺼놓았다. 부장과 팀장은 그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결국 그는 전체 일정에 지장을 주었고, 일이 끝나는 날,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팀장이 그를 불러 나무라자 '나는 뭐 논 줄 아세요!' 하고 소리지르며 대들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어처구니없어하는 팀장을 노려보며 원고를 집어던지고 사무실을 휙 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열까지 자기가 잘못해 놓고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방어기제는 선제공격이구나 하고 이해했다.

다음달에도 그 다음달에도 이번달에도
그는 마감날을 지키지 않았고
번번이 팀장과 부장을 원망했다.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자기에게 일이 너무 많다고,
부장과 팀장을 수시로 흉봤다.
하지만 누구나 그만큼은 일했고 그보다 더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는 데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기 일만 붙들고 끙끙거렸다.
그는 달마다 한 가지씩 사고를 쳤고,
뒷수습은 다른 사람들이 했다.
마지막까지 마무리를 해야 하는 내가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가 많았다.

이번 달에도 그는 사고를 쳤다.
일을 끝내는 날이었다.
나는 오늘은 적어도 밤을 새지 않고 일을 마칠 수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오후 세 시 무렵 그가 나타났다.
일주일 전에 내가 해 놓은 일을(그것도 그의 실수로 같은 일을 두 번 해야했다.), 또 다른 사람이 해 놓은 일을 그는 하나도 반영하지 않은 채 다시 해 달라고 했다.
일주일 전에 끝나 있어야 하는 일이었고, 오늘은 간단한 점검만 하고 처리해야 할 일인데, 나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분량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그만 폭발해서 그에게 화를 내며 따졌다.
'일을 어떻게 이렇게 해요?'
그는 미안해하기는커녕 자기를 무시하는 것이냐며 대거리를 했다.
마침 내 손전화기가 울렸다.
아끼는 후배에게서 오랜만에 온 전화였다.
'미안한데, 나 지금 안 좋은 일이 있거든. 나중에 내가 전화할께.'
딱딱하고 건조한 내 말에 후배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에게 다시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손이 떨릴 뿐.
그리고 나는 치솟는 화를 억누르고 내 일만 했다.
그의 뒤치다꺼리는 나몰라라 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화 내는 사람을 미친 사람 보듯 한다던가.
마음속을 먹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어제 밤에는 아주 오랜만에 시집을 꺼내 보았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모닥불,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가즈랑집, 외가집, 수라, 고독,
그리고 흰 바람벽이 있어....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애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사랑과 슬픔이 메마른 채 살아서일까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기는 하다만 높지 않은 것은.

  1. 1964년 6 ·3사태 [ 六三事態 ]

    Date2004.04.07 By나무에게
    Read More
  2. 인권영화 정기 상영회 '반딧불'-4월10일 &lt;칠레전투3:민중의힘&gt;

    Date2004.04.07 By사랑방
    Read More
  3. 나의 생각이 제대로 하는 걸까?

    Date2004.04.10 By장경태
    Read More
  4. [re]민노당은 좋습니다...^^

    Date2004.04.14 By
    Read More
  5. 좋겠다,,, 민노당은

    Date2004.04.13 By동방명주
    Read More
  6. 나도 한마디

    Date2004.04.12 By한심한
    Read More
  7. 또다시 나서는게 민망한 일이지만 돌아가는 일이 심상치 않아서

    Date2004.04.12 By장경태
    Read More
  8. 코카콜라의 비밀-열린 모임을 다녀와서

    Date2004.04.12 By정용하
    Read More
  9. 번개모임(14일) 안내

    Date2004.04.13 By번개
    Read More
  10. 동백나무 사연

    Date2004.04.13 By달선생
    Read More
  11. 삶의 희망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Date2004.04.14 By
    Read More
  12. 오름의 넉넉한 품에 안기며 - 제주도에서

    Date2004.04.14 By레인메이커
    Read More
  13. 비오는 날의 소풍

    Date2004.04.20 By달선생
    Read More
  14. 발발이 축구팀 전적보고

    Date2004.04.21 By김영재
    Read More
  15. Date2004.04.21 By웃는달
    Read More
  16. 정지용의 번역시를 소개하며

    Date2004.04.22 By정연경
    Read More
  17. 돌베개 입주식에 초대합니다!

    Date2004.04.23 By서도반
    Read More
  18. 무제1

    Date2004.04.26 By달선생
    Read More
  19. 생각 하나.

    Date2004.04.29 By조원배
    Read More
  20. 햇살 맑은 봄날 미술관 나들이는 어떠실런지요 ^^*

    Date2004.04.29 By레인메이커
    Read More
Board Pagination ‹ Prev 1 ...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 167 Next ›
/ 167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