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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후문 쪽 관악산 중턱(한 선생 집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길상(아래아)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변승훈이라고, 안성에 살면서 '분청'만 고집하는 친구가 이 절의 대웅전부터 야외 공간까지 온통 회백색으로 장식해 놓았고요. 이 친구를 스카우트한 한 아낙, 자칭 달라이라마 제자라 하고, 한국 '오체투지' 특허 신청하겠다고 벼르는 '正偉'(이런 법명을 가진 스님, 나는 처음 봤습니다. 대개 무슨 妙자 정도를 넣어서 쓸 법도 한데) 스님이 있는 곳이지요. 경기도 문화예술로 밥벌어 먹고 있는 인연으로 변 화백을 끈으로 해서 만난 사이입니다. 이 스님이 속세의 절연과는 거리가 멀어서 온갖 호사라는 호사는 혼자 다 부리고 다닙니다. '유물론자'의 허전함을 메울려고 도당굿이다 뭐다 하며 기웃거리다가 이 발칙한 땡중을 만나 이야기가 되나 보다 하고 있던 중, 아니나 다를까 무슨 모임 하나 만들자고 서둘더라고요. 나는 대충 불교 경전 공부나 하면 말석에서 귀동냥이나 할까 하고 반응락을 했더랬어요. 그런데, 아뿔사! 약속 잡고 가던 날, 우연히 달라이라마 사진 아래에 무심코 앉았다가 무슨 준비위원장인가를 맡게 되었지 뭡니까. 차츰 알게 되었지만 그 자리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한 마담'이었고요. 걸거적거리는 사람이 '이지누'라고 하나 있습디다. '땅밟이'하는 친구말이예요. 아니 하나 더 있네요. 한 선생 글 보고 생각난 사람입니다. 준비위원회 간산데, 재미 있는 일화를 남겨주데요. 준비위원장이라고 되지도 않는 '창립취지문'을 작성해서 심의하던 지난 일요일 어스름이었지요.(이 일 때문에 가고 싶었던 고대산도 못 갔는데. 영일이 성도 못보고. 결국 한 사람의 매니아도 확인하지 못하고 이 모임 결성은 무기연기되고 말았습니다) 절 입구, 석조를 사이에 두고 마주 하고 있는데, 정위 스님이 변 화백 분청잔에 브라질 원두 커피를 숭늉 처럼 타 왔습디다. 분위기에 취해서 한 잔 쯤 더 할까 하고 있는데. 그 간사 화상이 "저는 커피 안마셔요. 뭐, 뇌세포를 죽인다나요?"라고 하더라고요. 슬그머니 장난끼가 동해서 큰소리로, "스님, 고봉으로 한 잔 더 주세요. 난, 뇌세포가 너무 많아서 골치덩어리거든요."라고 했더니, 금방 탕 튀는거 있잖아요. "아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대충 꼬리를 감추고 분위기를 음미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악동)
그때 썼던 글을 만지작거리다가 어제 '안이영노'와 '민현식'의 글을 동시에 읽게 되었습니다. 내 논지와는 무언가 차이가 있는 것 같아 우리 더불어 숲 강호 제현에게 의견을 구하고자 합니다. 소식 주세염. 구원은 길은 멀고 험하나니.


* 가칭 <아름다운 인연>

오늘 드디어 아름다움이 삶의 최고의 가치임을 선언한다.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참됨과 착함이란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어 왔다. 참됨은 한편에서 몸과 마음을 썩히는 쾌락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소금과 같은 방부제였고, 착함은 다른 한편에서 그것을 괴롭히는 금욕주의에서 건져내기 위한 빛과 같은 청량제였다. 아름다움은 참됨과 착함을 아우르는 자연의 길, 중용, 중도를 걸어가는 삼라만상의 자기 본래 모습이다.
아름다움은 소중함이다. 자연의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물방울 하나, 구름 한 조각, 꽃 한 송이, 바람 한 줄기, 흐르는 시내, 푸르런 산하, 별, 달, 해, 뛰노는 동물, 정다운 이웃,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오랜 세월 인간은 참됨과 착함이란 테두리로 자신을 가두고 자연을 멸시해 왔다. 아름다움에 눈뜨면서 비로소 거추장스러운 참됨과 착함의 테두리를 축복처럼 걷어내고 그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아름다움은 더불어 삶이다. 소중한 것으로부터 어떻게 하나인들 떨어져 살 수 있겠는가! 비, 구름, 바람이 토끼, 노루, 사슴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됨이며, 개, 돼지 같은 부도덕함으로부터 인간이 구별된다는 것이 선함이라면, 이 모든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호흡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리라. 그들 없이 나 없는 더부살이임을 깨달을 때라야만 그들이 소중함으로 되살아나게 되고, 그 소중함을 간직함으로써만 더불어 사는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아름다움은 친근함이다. 친근함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 강산, 우리 역사, 우리 문화가 친근한 만큼 아름답게 느겨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시절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외래 문화가 자연스러움, 소중함, 더불어 삶을 얼마나 뒤틀어 놓았던가! 그러한 뒤틀림을 정화할 수 있는 힘은 말할 필요도 없이 친근한 우리 문화에서 일차적으로 새롭게 길어 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됨과 착함이 약탈적 성장 시대의 당위적 규범이었다면, 아름다움은 창조적 균형 시대의 존재적 자연이다. 카오스를 넘은 코스모스, 카오스모스에서는 빈부, 귀천, 남녀, 나라, 동식물, 무생물의 구별 없이 모든 존재 하나 하나가 그들 자신의 주인이며 친구이다. 그곳에서는 아름다움을 제외한 그 어떤 가치도 그들을 갈라놓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친근하게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그 길을 아름다운 인연으로 바리바리 엮어나가자.


                                                     2004년 6월 20일

'아름다운 인연' 창립준비위원 일동


* 예술이 중심이라는 상식을 버려라
문화정책 > 칼럼
[기고 - 좋은 축제 만들기 (1) ]

  
안이영노 _ 인문콘텐츠학회 이사 egester@freechal.com

해마다 4월이 되면 축제에 들뜨기 시작하고 10월 선선한 바람이 우리의 가슴에 와 닿을 때까지 우리는 축제의 물결 속에서 지내게 된다. 10여 년을 흘러온 축제의 물결은 사람들에게 일탈을 대신하는 열망과 일상 속에서 맛보는 여행 같은 행복을 동시에 주었다.
그럼에도 모든 시민이 축제를 생활 중에 만나는 뜻밖의 신비로운 여행으로 생각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 매력적인 여가로 받아들이지는 못 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사회에서 축제가 어떠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져 왔는가 하는 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예술행사', '지역축제', '문화이벤트', '거리페스티발' 등은 우리가 쉽게 들을 수 있는 것들이다. 많은 행사들이 그것을 표방하거나, 행사의 타이틀로 이런 말들을 내건다. 그런데 이 네 가지 말에 축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담겨있으며, 점검해볼 만한 관점과 문제점 역시 고스란히 이 말에 묻어있다. 이 말들을 살펴보면 좋은 축제를 만드는 길이 나올 것 역시 자명하다.

그 첫 번째 것은 축제는 예술행사라는 관념, 즉 좋은 축제는 예술이 중심이라는 생각이다. 축제는 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예술지상주의는 '축제 기획자'와 '이벤트 업자'를 의식적으로 분리하는 우를 범해왔다. 그러나 문화기획의 훈련과정에서는 양자의 원리를 비교하고 두 매카니즘을 모두 가르칠지언정, 어느 하나가 우월하다는 사이비 미학적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축제와 이벤트는 모두 종합예술의 특성을 갖추고 있지만, 오늘날의 축제이벤트는 예술향수 이외의 다른 사회결합 기능을 갖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술행사 역시 예술이 아닌 소재를 함께 쓰거나, 예술행사를 만들면서도 불가피하게 시장의 욕구에 맞추게 되어있다. 관광이벤트, 산업엑스포, 판촉과 홍보를 위한 이벤트 역시 예술을 활용하지만 다른 목적을 추구한다.


축제가 예술이라는 생각이 암암리에 축제의 중심소재가 예술이라는 생각으로 치환되었지만, 이미 축제를 바라보는 사회적 패러다임은 변화했다. 예술표현이 아니라 소통을 축제의 주된 기능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축제경영 방식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예술가들의 고집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획자들의 문제의식 부재 탓이다.
지금은 예술감독의 혼으로 무장한 연출가 정신(dictatorship)으로 행사를 운영하는 시대가 아니다. 특히 시민참여를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한국사회의 풍토와 전통에서는 이런 유럽식 전통을 모든 예술행사에서 답습할 필요가 없다. 이제 좀더 창의적이고 독자적인 조직방식을 만들어도 된다.
오늘날은 연출가보다 개발자가 더 필요한 시대다. 이 말은 예술적 영감이나 오랜 관록이 묻어나는 예술감독의 경험지 뿐 아니라, 심도 있는 조사에 바탕을 두고 예술영역을 넘어 행사 아이템을 찾아내는 분석과 해석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좋은 프로그래밍은 장르 예술에 머물지 않고 예술의 개념을 확대하며, 사람들이 교감할 수 있도록 예술에 이질적인 것을 찾아내어 예술적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축제라는 미디어는 늘어나지만, 지금 그 콘텐츠를 잘 채울 수 있는 전문인력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음을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예술만이 사람을 모으고 예술만이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시절을 지났으니, 우리는 생활 속에서 예술다운 것을 찾아야 한다. 문화를 고집하면 몸이 굳어버리고 마음이 무거워지기만 하니, 평범한 일상에 문화라는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촛불과 붉은 티셔츠가 문화가 될 수 있는 시대니, 우리의 축제이벤트 또한 좀더 넉넉한 센스를 갖고 주위를 둘러봐야 하는 것이다. 좋은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예술 소재주의에 빠져 예술의 고유성을 훼손하고 마는 아이러니 같은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나눔문화포럼57 요약문

마당, 비움의 미학을 넘어 윤리학으로

민현식 (건축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원장)


   57차 나눔문화포럼에서 건축가 민현식 선생은 '비움의 구축'을 주제로 자신의 건축에 관한 이상을 풀어냈다. 아날로그 환등기로 슬라이드 필름에 담긴 사진들을 예시하며 진행된 강좌는 내용상 크게 자신의 건축이념을 해설하기 위한 전반부와 작업을 통해 구현하는 과정을 안내해 준 후반부로 나뉘어 이뤄졌다. 전반부에서 다양한 예시를 통한 감상과 영감체득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20세기 건축이념과 그 구현물들에 대한 비판의 안목을 형성했다면, 후반부에서 민현식 선생은 꾸준한 작업을 통해 인간과 자연에 거스르지 않으며 조화로운 건축을 구현하려는 꾸준한 실천과정을 보여주었다. [편집자주]


유럽 근대건축의 이념
유럽 건축사를 돌이켜 보면, 건축을 통해서 인간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 환경이 사람들의 사고와 생각을 지배한다는 믿음(환경결정론적 사회공학)이 잘 드러난다. 건축으로 인간을 개조하려던 르꼬르뷔지에의 파리 재개발 계획인 '300만을 위한 빛나는 도시', 르꼬르뷔지에와 신생국 인도의 개혁적 리더 네루가 만나서 만든 '찬디가르' 등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탈리아에서는 주세페 떼라니의 '파시스트의 집 Casa del Fascio'을 통해 무솔리니에 동조한 '7인의 건축가(그루포7)'들이 추구했던 평등사회의 이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지극히 추상적인 공간을 살림집으로 대체하여 만인평등의 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히틀러는 건축으로 그 속에 사는 사람의 생각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알버트 스피어라는 훌륭한 건축가를 부하로 두고 많은 건축물을 지었는데, 이 안의 군중들은 무의식적으로 "하이, 히틀러!"를 외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상징조작에 집중했다.

한국 전통의 건축공간'마당'의 발견
요즘 건축은 무엇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20세기를 지배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의한 개발은 우리의 미래를 우울하게 한다. 건축이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 건축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조작하려는 시도들을 반성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우리나라 전통건축이 갖고 있는 요소들 중 파격적인 것을 찾고 있던 중 나는 '마당'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움'으로 드러나는 이 공간은 일반적인 건축공간에 반하여, 어떤 기능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은 '불확정적 공간'이다. 나는 20세기 건축의 기본정신 중 하나인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는 교의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기능에 의해 형태가 결정되지 않는 공간, 그것이 우리의 마당이다. 불확정적인 공간이란, 기능에 적합한 형태 또는 형식으로 디자인 된 것이 아니라 '잠재력'을 디자인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놓인 대지의 특성, 대지에 대한 친밀함과 연관된 생활의 하부구조로서의 본질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불확정성과 예기치 못함에서 아름다움을 보기를 원하기에, 미래의 사용자들에게서 그들의 잠재력과 상상력을 제거하지 않으려 하는 정신, 제한된 자원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비움의 정신이다.
개심사를 방문할 때는 가능하면 밑에서부터 걸어 올라가는 것이 좋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계단, 길가의 돌, 장방형의 못, 외나무 다리를 만나게 되고, 외나무 다리 건너 해탈문에 이르고, 해탈문에 들어서면 절집의 가장 중요한 중심공간인 마당을 만나게 된다. 이 점이 감동적이다. 여러 과정을 거쳐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이르게 되는 최종목적지는 '비움'이다. 선불교의 정신을 느끼게 된다.
서구건축은 양식건축이고, 집을 아름답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기에, 근사한 장식의 문제가 미학적으로 중요했다. 그렇다면 비어 있는 것에는 어떤 미학이 내재할까? 마당의 미학은 '서로 다른 사물들을 구별하여 인지하게 되는 것은 그것들이 주변환경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 때문'이라는 데 근거한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특별한 순간, 세계가 신성하게 인식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가치 있는 시간들이 있다. 비 갠 뒤 햇빛이 보도에 번득이는 순간, 창들이 잡아내는 흘러가는 구름, 어두움이 낮게 깔리기 시작하는 길가의 가로수, 그 뒤로 솟은 종탑에 황혼이 내릴 때 이러한 경험들, 특별한 순간들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간들로부터 우리는 독립적이고 의미있는 리얼리티의 최상, 그리고 필수적인 감각을 구축해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여기서 건축 또는 건축공간은 시각적 향유의 대상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감으로 인지되고, 세계가 새롭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가치 있는 순간들을 담아낸다. 비움의 미학은 이런 것을 노리고 있다.

전통적 공간관과 세계관
일제시대의 지도를 본 적이 있는데 일본이 어떻게 하면 우리를 잘 수탈할 수 있을까하는 방법론이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그러나 한국 전통지도에서 나타나는 공간관에서는 산을 고립된 산봉우리가 아닌 능선의 연속적인 흐름과 그 분수령이 만드는, 마치 물 흐름과 같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룬 총체로 인식한다. 전통적 공간관은 원시 유학과 도가의 자연관, 불가의 선사상 등이 종합된 것으로 天地人을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로 인식하는, 인간-자연의 공존의 철학이다. 즉 한국인들은 땅을 생적 및 동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인간을 땅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한국의 전통사상은 아름답고도 심원한 생태적 지혜를 간단없이 보여준다.
이렇듯 한국사상에는 물(物)의 관점에서 인간을 봄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행태, 그리고 인간이 이룩한 문명에 대해 반성적으로 인식해 온 전통이 존재한다. 이러한 발상은 그 자체에 이미 인간과 물이 깊은 내적 연관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인간과 물이 상대적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런 '생태적 지혜'는 협소한 과학적 합리성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면서 '생태적 합리성'을 모색해 나가는 데 하나의 큰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그것은 근대적 합리성의 기저에 놓인 기계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인간의 이성을 '열린 이성'으로 변화시켜 줄 것이다.


'비움의 미학'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들

* 신도리코 공장, 기숙사, 식당
3교대 24시간 공장이 돌아가고, 늘 지쳐 피곤한 노동자들이 돌아오면 이들의 피곤을 덜어주는 집을 지어주고 싶었다. 밤에 보면 풍경이 근사하다. 입구-계단-복도-방에 들어가는 전과정에서, 끊임없이 주변풍경을 다른 프레임으로 볼 수 있다. 방안은 물론이고, 나중에 식당을 지을 때는 식사 중 기숙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마찬가지로 서울의 공장도 근사한 스페이스의 감동과 함께 곳곳에 나무를 심어 자연을 환기시켰다. 복도를 만들 때는 갤러리를 설계하듯 하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말 그대로 복도를 갤러리로 만들었다.

* 대전대학교 기숙사
승효상은 같은 학교 복지관을 설계했다. 땅이 너무 가팔라서 쓰기 어려웠다. 방에 들어가면 한쪽은 자연을 향해 열려 있는 공간이 되고 다른 쪽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승효상과 마음이 맞았는지 복지관에서 기숙사를 보는 풍경과 기숙사에서 복지관을 보는 풍경이 비슷했다. 두 건물의 가운데 부분에서는 기후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으로 구성했다.

* 파주출판도시  인포메이션센터
파주출판도시는 승효상과 나, 영국에서 활동하던 독일건축가 등 5인이 설계를 맡았는데, 파주출판도시 최초의 집인 인포메이션센터와 가장 큰 집인 아시아출판문화센터를 내가 설계했다. 파주에서는 건축의 조건이 주변 환경조건으로부터 추출되어 땅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 건축의 조건이 되도록 하는 이념을 실현코자 했다. 인포메이션센터는 아무 기능이 없다. 좁고 높은, 넓고 낮은 공간을 병치시키면 그 사이에 또다른 공간이 생기고, 그 사이에 유리벽을 만들고 언제든지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했다. 둘씩, 하나씩 열고 닫음에 따라 필요에 따라 새로운 공간을 연출할 수 있다. 뒤로는 심학산, 앞으로는 아름다운 한강의 낙조를 프레이밍했다. 탑은 단순히 조형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각 층에서 보게 되는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고자 세운 것이다.

* 한국전통문화학교
계곡 따라 논이 있는 전형적인 전원풍경과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논바닥의 경사를 살려 좁고 긴 마당 하나를 만들었다. 폭은 24미터로 사람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거리이다. 24미터를 벗어나면 사람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극장에서 객석과 무대 사이의 거리는 24미터를 넘지 않는다. 마당은 밑바닥에 무언가를 꺼내 쓸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구현했다. 마이크 장치, 텐트 설치 등의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길게 뻗은 공간은 주변 산과 지형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또한 본래 물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마당 안으로 끌어들여 옛날의 기억을 살려보았다. 몇 천년 동안 이어지던 땅의 역사를 캠퍼스 안으로 편입시켰다. 그럼으로써 학교는 거꾸로 이 땅의 역사에 다시 귀속된다.

미학을 넘어 윤리로
지난 2000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주제가 "덜 미학적인 집이 더 윤리적인 집이다"라는 것이었다. 이제 서양 사람들도 건축에서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기 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 건축의 윤리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등에 망가져 가는 현대를 보며 이런 주제를 잡지 않았겠는가?


비원에 가면 아주 조그만 집이 하나 있는데, 왕세자를 가르치던 기오헌(寄傲軒)이다. 기오는 오기를 부린다는 뜻으로 귀거래사(歸居來辭) 의 첫 구절이다. "남창에 기대서 오기를 부리면서 밖을 쳐다보니, 마음이 편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깐깐한 정신이 드러내는 표현이며, 장차 왕이 될 이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 같다. 내 사무실을 기오헌이라 한 것은, 내가 그런 식으로 건축하고 싶다는 뜻이다. 건축의 기능적인 면, 미학적인 면을 넘어서 관계에 대한 윤리를 획득하고자 하는 희망 때문이다. 이런 정신은 우리나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전세계에 퍼져 있고 뜻깊은 사람들이 계속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 내가 보기엔, 안이영노와 민현식을 각기 좌, 우 편향을 보이지만, 서구를 넘으려고 하면서도 아직 '서구의 개념'에 사로 잡혀 있는 것 같고, 윤한택은 '진, 선, 미'를 분리해서 자칫 독자의 오해를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2004.6.16 윤한택



>정의로운 것(The Just)

>보르헤스
>
>......
>
>볼테르가 소망했듯이, 자기 정원을 가꾸는 사람,
>
>단어의 기원을 찾아보는 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
>
>조용히 체스 게임을 즐기고 있는 두 사람의 노동자,
>
>색깔과 모양을 이윽히 살피고 있는 도자기 굽는 사람,
>
>책 내용에는 무관심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책을 잘 만들까 고심하는 조판공,
>
>의견이 다를 때, 상대방이 옳다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
>
>잠들어 있는 동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사람,
>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세계를 구원하고 있다
>
>***********************
>
>얼마 전 읽은 보르헤스의 시에 '구원'이란 단어가 언급돼서인지 요즘 문득문득 그 말이 입가를 맴돕니다.
>
>그리고 그 밖에 나를,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들을 가만 돌아보게 됩니다.
>
>그 중의 하나, 아침에 집을 나서면 만나는 삼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아저씨.
>아직 신호등이 빨간불일 때에도 교통체계상 사람들이 건너가도 되는 상황에서는 손짓으로 먼저 건너가라 하십니다. '기계'의 통제를 다소곳이 따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길 건너기쯤은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해왔던 일임을, 그 기계의 신호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범법'은 아님을 환기시켜 주시는 듯. 그 풍경을 보고 처음엔 비죽 웃음이 나오더군요. "아유, 난 사람의 저런 융통성이 좋아."
>
>길의 원래 주인이 사람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신 분. 과장을 좀 섞자면 그이 또한 세상을 구원하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
>**********
>
>조금 여유있게 사무실 근처 양재전철역에 도착하는 날이면 서초구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작은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산 속 길을 요리조리 잘 따라가면 사무실에 아주 가까이 닿는데요. 사실 너무 잘 닦여 있어 때로는 조금 맥이 빠지기도 하지만, 비온 다음날엔 습기 먹어 더욱 선명한 빛깔을 보이는 나뭇잎들을 따라, 봄에는 벚꽃, 늦봄엔 아까시 꽃잎들이 카페트처럼 깔려 그것들 살짝 즈려 밟으며 가는 길, 그 공간 또한 날마다 나를 구원합니다.
>
>또 지인이 기꺼이 내어준, 그이의 돌아가신 부모님댁 너른 마당의 텃밭. 자주 가지는 못 하지만 그곳 또한 나를 구원합니다. 거기에서 갖은 채소들을 뜯어 나오는 발길은 가볍기 그지없고, 그것을 맛나게 드시는 부모님의 얼굴 보는 것도 좋습니다.    
>
>************
>
>며칠 전 사물을 신나라 치고 있는 한 주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이에게 그 풍물가락이 얼마나 큰 구원이었을지, 괜히 코끝이 찡해지더군요.  
>예전에는 풍물께나 쳤던, 금융회사 다니는 한 남자동기. 이제는 빚 받으러 전국을 헤매며 빚쟁이 노릇을 하고 있는 그 친구, 다시금 풍물이 그 친구를 구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영혼이 더 상하기 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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