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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월요일 늦은 아침, 나의 퇴근 발걸음은 너무 너무 고통스러웠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뒤척이다가 천근만근의 몸으로 시작하는 업무와 동시에 나는 승객들의 원망스런 시선, 항의와 욕설을 받아야 했다.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는 말 이외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마감한 퇴근길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원망과 욕설의 표적이 되어야하는가’하는 무거운 자괴감에 짓눌렸다. 무력감만 안기는 직장에 대한 미련을 버린 지 오래여서 기대도 희망도 남아있지 않지만, 요즘처럼 역무원이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때가 있었던가 싶다.

그 날 신문은 이제 ‘시스템이 안정화되어 고장률이 3-4%’로 낮아졌다’고 했지만 아침의 내 경험은 다른 것이었다. 새 단말기는 누가 이름 붙였는지 모를 한심한 이름의 ‘T money’(신형교통카드)를 망가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멀쩡하게 사용해오던 다른 교통카드 마저 플라스틱 조각으로 만드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지하철 타기위한 개표가 엉뚱하게도 이미 ‘집표’ 처리로 오작동되어 문을 열어주지 않거나, 현금 승차는 비싸기 때문에 구입한 ‘T money’가 한 두 번 심지어는 사용도 못해보고 고장 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 때마다 역무원에게 문의와 항의 그리고 원망과 욕설이 쏟아졌다.

날짜에 맞추어 뚝딱 뚝딱 설치한 단말기는 자랑하고픈 ‘교통혁명’과 ‘신기술’이 무색하게 기존 단말기보다 감지력이 떨어져 두세 번을 대야만 했다. 그때마다 게이트 앞에서 정체가 일어나고, 요금도 제대로 정산 못하는 바보임을 증명하고 있었으며 또 차가운 시선은 역무원에게 꽂혔다. 바쁜 월요일 출근 시간 늘 그러리라는 일상적 흐름은 뚝 뚝 끊어졌고, ‘서울지하철공사’라는 공공기관의 신뢰가 바탕이 되었던 요금이 둘쭉날쭉이 되어버리니 누군들 짜증이 나지 않을까.

그러나 승객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역무원들도 뭐가 뭔지 모른다. 새로운 교통체계와 있을지 모를 고장 유형 그리고 원인에 대해 교육받은 사실이 없다. 노동자를 경영수단이나 구조조정의 도구적 수단으로 여기는 풍조가 팽배한 경영진에게는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은 중요한 일이 못되었다. 교통카드 사용 확대로 유도하는 운임체계 역시 궁극적으로는 역무원의 일을 줄여 감원으로 이어지도록 하고 있었으니, 노동자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경영진들로 하여금 교육의 필요성을 느낄 이유가 없도록 만들었다.

임명권자의 눈치 보기에 급급한 경영진에게는, 교육을 통한 연대성과 신뢰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자산과 직장동료간의 유대에 의해 생성되는 에너지가 회사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이로움을 준다는 안목이 있을 리 없었다. 설사 경영진이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하더라도 김대중정부 시절 ‘보여주기식 구조조정’에 강박적으로 매달린 결과 교육의 여건도, 노조를 통해 형성되던 조직의 공익적 목표와 상호작용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던 ‘연대의 공간’도 허물어졌다. 그러니 모든 교육은 그저 공문 읽는 일로 소방 교육도, 안전 교육도, 친절 교육도 그렇게 그렇게 대체되었다.

이명박 서울시장 임기 안에 ‘흑자경영 원년’을 경영목표로 새워놓고 날마다 구조조정 타령인 이 풍토에서 노동자들은 그저 몸만 일터에 있을 뿐이지 생각은 로또복권 숫자 연구나 무슨 부업이 돈이 되는지, 별 쓸모없는 자격증에 쏠려 있다. 이렇다보니 노동자들은 자기 근무시간에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사고가 팽배해지게 되고,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이기주의가 심화되고 있다.

‘지하철 운전이 운전 중에 가장 쉬운 운전’이라는 승무원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는 시장으로선 표 딱지나 파는 역무원의 역할은 안중에 들어올 리 없었다. 서울시의 시정이 어디로 향하든 시장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마치 천륜에 어긋나는 것으로 받아드리는 습성이 내면화된 경영진에게는, 문제 있을 거라는 현장 역무원들의 우려를 덮어두는 일이 시장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급한 일이었다.

오로지 시장의 생각만 옳다는 과신은 역무원이나 관련 종사자들에게 일의 진행이 어떻게 되는지 알리거나 공유할 필요도 없었고, 예견되는 문제에 대해 생각이 다름을 제기할 통로도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저 그의 훌륭한 뜻을 받드는 일에만 충성스럽게 따라야 했고 이의제기는 조직에 해악을 끼치는 자거나, 찍히면 언젠가 피볼 일 생긴다는 모종의 보이지 않는 공포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전제적인 질서 속에서 7월 1일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승객들은 카드 이상이나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역무원에게 오지만 매표실에는 신형 카드의 사용내역과 상태를 조회할 기기도 없다. 똑바로 설명해줄 수 없는 역무원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는 승객의 입장에선 역무원이 그저 ‘시민의 세금으로 월급만 타 먹는’ 한심한 인간일 뿐이다. 예외적인 일의 처리를 위해 일선에서 취할 수 있는 제도적인 수단도 마련되지 않았으니 화가 난 승객들에게 역무원이 해줄 수 있는 방안은 별로 없다. 이렇듯이 너무도 엉터리로 시작된 새로운 교통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된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으며, 엉터리 제도는 죄 없는 사람들끼리 불필요하게 부딪히게 만들고 있었다. 당장 드러나는 혼란은 며칠 가면 수그러들겠지만 준비되지 않은 제도는 소모적인 불합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미 새 단말기는 정착되어가던 교통카드체계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있으며, 대책이라고 엉겁결에 내놓은 ‘정기권’은 또 다른 혼선을 불러올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누구도 정직하게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소인배형의 서울시장체제는 모든 하위조직의 질서를 또 다른 소인배 인간형으로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엉터리 서울시가 그런대로 유지되는 일이 신기할 따름이다.  올바른 기풍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이 구석에서 언제까지 이런 모멸스러움을 감내해야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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