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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4.07.21 14:10

토란잎에 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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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란(土卵)은 '흙에서 캐는 알'이라는 뜻이다. 흙에서 얻는 식품이 토란말고도 많은데 굳이 토란이라는 이름을 얻은 데는 땅에 묻힌 덩이줄기의 생긴 모양도 그렇지만 버릴 것 없이 옹골차게 다 먹을 수 있어서 오지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토란은 토련(土蓮)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가졌다고 하는데 두 이름 모두 어쩐지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올 봄에 우리 집 돌담아래 토란을 심었다. 밑거름을 넉넉히 넣은 땅에 씨를 묻고 매일 물을 주었더니 싹은 잘 자랐다. 나날이 커지는 토란 잎사귀를 보려고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돌담 아래로 간다. 어느새 토란잎은  부채보다 커졌다.
  
곧게 뻗은 잎자루는 대나무를 연상하게 하고 연잎처럼 늘어진 커다란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릴 때면 여인의 치마가 생각난다. 마른 날의 토란잎은 비스듬히 누워있지만 비 오는 날에는 열두 폭 치마에 숨은 솔기 같은 잎맥을 선연히 드러내며 수직으로 귀를 고고하게 세운다. 바람이 살랑 어루만지면 저희끼리 부딪치며 파문이 되어 출렁이는 모양이 참으로 아름답다.
  
가파르게 선 잎사귀 위에서 빗방울이 급하게 흘러내리며 깨어지면 물 알갱이는 햇살처럼 반짝이면서 흩어진다. 잎사귀에 구르는 물방울은 마치 수은처럼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구슬을 수없이 만들다가 떨어지지만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 잎은 한 방울의 물도 흡수하지 않고 고스란히 뿌리로 공급하는 것이다. 토란은 물을 아주 좋아하는 성질임에도 잎에서는 철저히 거부하며 뱉어내는 모양이 조금은 앙큼해 보인다.
  
옛 할머니들은 말씀하셨다. '여자는 토란잎에 물방울 같아야 한다.' 설마 앙큼한 여자가 되라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나온 흔적도 남기지 않는 잎사귀 위의 물방울처럼 항상 단정하게 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렇게 똑 떨어지는 여인이 되라는 뜻이겠지만 중요한 일은 흔적도 없이 비밀스레 하라는 이르심이 담겨 있다.
  
그 이르심은 조선시대 저 사대부가의 여인들에게 당부하던 말이었다고 한다. 가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라면 집 안팎으로 입단속을 시키고 밖으로 새나가지 말아야 할 비밀이 운무(雲霧)같이 집을 싸고 있어도 무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고 살던 여인들에게 준 교훈이었다.
  
조선 여인들이 살던 모습을 돌아보면 토란과 닮은 점이 참 많다. 단정하게 쪽찐 머리의 고운 두상을 떠올리게 하는 잎새에 구르는 물방울과 폭 넓은 치마를 닮은 잎사귀, 뿌리로만 빗물을 부지런히 나르는 잎사귀의 헌신과 비밀스러움, 고고하게 선 기품 있는 모습까지 사대부가의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정절과 가문을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끊을 각오로 은장도를 품고 살았던 여인들의 가슴엔 덩이줄기가 감춘 독(毒)보다 더 무서운 독이 응어리져 있지 않았을까.
  
한여름 뙤약볕을 견디며 도도하게 서 있는 토란은 '관이 향기로운 사슴'처럼 어쩐지 귀족이었을 것만 같다. 이렇게 귀티 나는 토란을 두고 내려오는 또 다른 말이 있다.
  
'알토란같다' 부실한 데가 없이 옹골차다는 뜻이다. 그 비유는 이제 갓 시집온 새댁에게 많이 썼다. 그러나 사대부 집 너른 대청마루를 오가는 여인이 아니라 여염집 부엌문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참한 새댁을 일컬었던 말이다. 어느 집 여인이든 다소 만만히 보이는 사람에게 주는 비유이지 솟을대문을 나오는 여인을 보고는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껍질을 깎아낸 알토란에는 더 이상 독이 없다. 땅속줄기에 독을 품고 고고하게 살아있는 토란은 안방마님에게 어울리는데 반해 밥상에 올리기 위해 감춘 독을 깎고 물에 담가 둔 알토란은 토담집 며느리에게 비유되었다.
  
같은 토란을 두고 한 말이건만 그것이 삶과 죽음 그리고 독이 '있음'과 '없음'의 상태에 따라서 그 말에 비치는 사람들의 신분이 나뉘어지는 것을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그 헤아림 속에서 서슬 푸른 양반들의 삶과 고달프게 살다 간 민초들의 죽음을 다시금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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