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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마다 참석하고 있는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에서 지역통화(화폐)를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에 제공받고 싶은 것, 제공하고 싶은 것 등등을 내놓고 되도록 '돈'을 통하지 않고 서로 ‘거래’를 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기능을 포함해서 거기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하도 없어 방안을 휘휘 둘러보며 집에 좀 쌓아놓았던 A4용지를 팔 것을 목록에 올리고 나니 책장 한쪽 위에 올려놓은 모기장에 눈이 갔다.

살다 보면 우연치 않게 내가 주인공이 되는 자리도 있게 된다. 그렇게 우연히 생일잔치의 주인공이 되어 어떤 이들에게 전에도 후에도 없을 생일선물을 받게 된 적이 있다.

그때 어떤 선배에게 받았던 게 바로 이 모기장이다. 처음 받았을 땐 좀 황당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생일선물로 모기장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면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그이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그 선배가 모기장을 선물했을 때 몹시 황당해한 후배가 있다던데, 그게 내가 아닌지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자신이 좀 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기약, 모기향 등 각종 모기 퇴치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모기장까지는 생각해내지 않는다. 아예 방충망을 쳐서 집안 전체를 모기장화하는 장치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행히 아파트 11층인 우리 집에는 여름철에도 모기가 거의 없다.  

그래서, 모기장을 선물받고 나선 언니네한테 주려고 했다. 우리 또래가 갖고 있는 모기장에 대한 재미난 추억을 조카들에게 물려줘도 좋을 듯 싶어서. 그랬더니 형부는 대뜸 “모기장은 더워서 싫다”는 거다. 모기약의 해악 등등을 아무리 설명해도 유난히 열이 많은 형부와 조카들을 아는지라 언니도 가만히 있다.  

그래서 모기장만 보면 어떤 아쉬움을 늘 느끼고 있었는데, 최근 오한숙희씨가 쓴 글을 보니 거기에도 모기장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도심에서 벗어난 곳으로 이사간 오한숙희씨의 가족들에게 당장 필요하게 된 것이 바로 모기장이랬다. 그래서 모기장을 치고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잠을 자게 됐는데, 더우니까 일단 선풍기가 모기장 안으로 들어오고, 또 텔레비전까지 들어왔다고 했다. 누군가 모기장을 드나들 일이 있으면 이런 저런 구박을 듣기도 하고, 그래서 키득키득 웃기도 하고... 실감나는 묘사 때문인지 다시금 모기장에 대한 향수가 생생해졌다.

침대없이 온 가족이 모기장 안에 옹기종기 살 부비고 잠든다는 건 이제 구차하게 느껴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모기장을 고정시키기 위해 벽에 무언가를 박거나 다는 일은 미관상의 무언가를 해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언니네가 거부하는 것은 어떤 '가난의 경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그 모임에 함께 하는 한 친구를 옆에서 가만 보니 필기도구가 ‘아직’ 연필이다. 그것도 분홍색 볼펜깍지까지 끼워진 것을 갖고 다닌다. 아직 연필깎기 기계를 갖고 있는 듯했다. 그러지 않아도 지난번 언니네 갔을 때 조카들에게 사주려다 시간이 안 맞아 못 사주고 온 것이 바로 연필깎이 기계여서 둘이 그 얘길 잠시 했었다.

우리 삼남매가 어린 시절 가져보지 못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연필깎이 기계다. 손으로 슬슬 회전시키면 날렵하게 연필을 깎아내던 그 기계. 다른 친구네 집에 가보면 손으로 돌리지 않아도 스윽- 깎이는 것도 있었다.

물론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서였기도 했지만 눈 딱 감고 하나 사주셨을 법도 한데, 끝내 부모님은 사주질 않으셨다. 지금은, 아마 부모님이 연필 정도는 스스로 깎는 법을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그래서 손의 섬세한 협응력 등등을 키우려 하셨을 거라고 애써 생각해 본다.

그래도 사실 학교 다닐 땐 내 연필 쓰는 것 자체를 좀 꺼리기까지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 학년엔 내 걸 쓰면 그걸 깎아야 하니 귀찮아서 좀 만만했던 남자애한테 아예 번번이 연필을 대놓고 빌려쓰기도 했다(날 좋아한 것 같지는 않지만 빌려주면서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던 그 남자애의 마음이 새삼 궁금해진다). 일정한 모양으로 단정하게 연필이 꽂혀있던 그 아이의 필통. 그 아이 것에 비해 내 연필들은 삐죽삐죽한 모양에 볼펜깍지가 끼워있는 것도 있어서 필통을 남에게 내보이기 꺼려지기도 했었다.

지나놓고 보니, 연필깎이 기계를 안 사주셨던 부모님의 판단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칼을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는 나이라면 연필 정도는 스스로 깎아서 쓸 수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연필은 초등학교 저학년때나 좀 썼지, 곧 연필과도 같은 심을 교체만 해주면 됐던 어떤 펜에, 좀더 지나선 더 날렵한 0.7mm, 0.5mm 샤프펜슬에 이내 자리를 내주질 않았나 말이다.

그래도 가져보지 않은 것이어선지 연필깎이 기계에 대해선 풀리지 않는 갈망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제 6살일 뿐인 조카에게 연필깎이 기계를 사주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마 그에 대한 묘한 보상심리였을까.

이런 이야길 언니에게 하니, “그래, 엄마가 연필 많이 깎아주셨었지”하고 기억한다. 사실 엄마가 깎아주신 것들 모아놓으면 기계로 깎은 것보다 훨씬 더 멋졌었는데....
맞벌이 직장생활로 바쁜 언니는 아마 연필까지 깎아줄 여유가 없을 게다. 그래서 아마 머지 않아 조카들은 연필깎기 기계를 갖게 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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