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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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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자마자 처음 한 일은 잠자는 거였다.
지난 밤 '더불어숲'과 행복한 씨름(혹은 시름)을 하며 하얗게 깨어있어야 했기에
잠이 우선 급했다.

성공회대 홈페이지에서 정말이지 운 좋게도 정보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영어학과 시간에 신영복 선생님의 특강이 있다는 공지사항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곧 바빠졌다. 책을 구입해야하고, 책을 읽어내야 하고, 독후감을 써내야 하고, 청강할 수 있는 지여부를 알아 봐야하고 ... 등등.
최소한 도강(도둑 강의수강)이 되지 않으려 밟아야 하는 절차들에 무슨 잔치 준비를
하는 것처럼 모처럼 수족들이 총총히 바빴다. 종종 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호떡집에 불이 난 것이다. (혹시 이 말이 호떡집 운영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께 모멸
의 언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왜 이리도 그 분 만나고 싶어 하는가?'하는 물음이 들었다.
마땅한 대답을 찾던 차에 해답은 루쉰에게서 나왔다.

'물 한점이 바다를 본받을 수 있다. 물 한점과 바다는 같은 물이므로
서로 통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도대체 닮을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앞으로 '나'라는 존재에
더 이상 희망을 찾기 힘들다는 결론이 나왔다. 루쉰의 말은 참 적절한 인용이었다.

물리적인 가까운 만남의 경험을 통해서 진정 닮고 싶었다.

항시 그렇듯이 아무리 사소한 것 일지라도 마음이 동(動)한 한 발을 내딛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작은 통과의례가 필요한 것인 지 모른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작은 의례'이라고는 하지만 닮고 싶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소심함에 비춰보아 분명 큰 행사가 아닐 수 없었다. 손,발,가슴을 비롯한 온 몸이
사시시 떨림이 그것을 증명했다.

한편 좀 더 핵심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사전에 경계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잊지 않았다.

선생님의 인생 경력에 주눅들지 말 것과, 박학다식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달변에
절대 쓰러지지 말 것이며, 혹시나 수려한(?) 외모에 좌절 당하지 말 것이며,
저자로서의 그 분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 포위되지 말 것 등등.

돌이켜 보면 위 사항들을 잘 준수했다고 본다. 하긴 그 성공의 이면에는 생리적 현상
이 기인한 바가 크긴 했다.
강의 초반에 부터 발생한 생리적 문제가 후반부에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뻔 하기는
했다.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 복병이었다.

그 복병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던 이유는 어제 저녁 청강을 부탁한 답변이
오늘 오전에서야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아침 9시 즈음 청강이 힘들 것 같다던 영어과 조교의 전화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집을 나서서 담당 교수님을 직접 만나 허락을 구해야 했다. 다행히도 애절한 눈매의
부탁은 어진 눈매의 승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마지막 산을 넘었음에 안도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후 1시간 남짓 동안을 한번 쯤
은 발생할 지도 모르는 생리족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는데 그걸 잊었드랬다.
더군다나 긴장을 풀려고 연거푸 마신 서너 잔의 커피가 결국 나를 악마의 길로 이끄
는 검은 사탕이 될 줄을 그때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어떤 분일까','어떤 식으로 강의가 진행될까', '그 속에 나는 얼마큼 뿌듯해 할까'
그렇게 오늘 하루종일 기대되는 포만감의 크기를 가늠하는 작업이 기다리는 동안 내내 반복되었다.

청강생이 앞 줄에 자리 잡을리 만무하지만, 덩치 산(山) 만한 사람 뒷 편에 앉아
겪게 될 어느 누군가의 고초가 내심 부담스러웠다. 훌러덩 뒷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
니 강의는 바로 시작되었다.

선생님 나름의 방식으로 당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 특강은,
영어의 몸으로 20년 20일 대학시절(?) 동안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 대한 한 토막,
두 토막 이야기들로 과거 당신이 관계했던 현장 한 복판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가면
서 처음 마주 대하는 피차간 어색함의 장막을 훌훌 걷어갔다.
그와 동시에 미처 내가 눈뜨지 못했던 고민의 대상들을 한결 쉽게 움켜쥘 수 있었다.

- 知의 대상은 바로 人이어야 한다는 점

'안다는 것의 대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재한 그동안의 내가 아니었던가.

-. '정직한 자신의 성찰' 을 통해서야 비로서 人에 대한 온당히 인식의 시작 가능하다
    는 점. 그리고 그 '정직함'의 그릇에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만나고 관계를 맺고,
    맺었던 사람들을 통해서 그 내용이 채워져한 한다는 점.
  
'정직함'이 주관적인 판단이 아닌 객관적인 사실들을 통한다는 부분이 내겐 정직할
수 있는 가능성과 방법이 제시된 것임에 기뻐한다.

사이사이 삽화처럼 채워진 선생님께서 관계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강의실을
웃음으로 종종 숙연함으로 우리를 이곳 저곳의 장으로 휘몰았다.
대체 어느 위인이 선생님 말투가 어눌타 했던가. 그 사람은 분명 속았다.

문제는 강의 중간 즈음에 발생했다.
한참을 무르익는 시간에 정신은 받아들이는 즐거움으로 벅찬데,
몸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생리적 문제를 안고 있는 몸뚱아리는 괴로움으로 벅찼다.
강의 초반부터 시작된 고통의 수위는 어느덧 한계점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소리없는 내전이었다.

'아 어쩌지, 내가 참을 수 있는 능력은 지금 바로 여기까진데.'
'아'...자꾸 신음 소리만 터졌다. 그 소리는 어느덧 선생님의 말씀 중간중간 동감의 자발적 표현인 아, 그렇구나의 '아' 소리와 섞여 묘한 불협화음을 내기에 이르렀다.

긍적의 탄식소리 뒤에 부정의 탄식 소리 '아'가 좀 컸었는지 앞에 앉은 여학생이
힐끗 뒤돌아 본다. 이렇다 할 이유없이 내심 쪽팔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선생님께서는 말씀 중에 '쪽팔린다'는 언어를 사용하셨다.
어느 재소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용된 언어였다고 기억된다. 강의실은 일순간 와
웃음이 터졌다.

정말 묘한 일이다. 내가 '쪽팔린다'라고 떠올리던 생각의 찰나와 세상밖으로 살아서
펄떡 튀어 나온 선생님의 '쪽팔린다' 라는 말의 순간이 일치하다니.
나는 그게 더 우스웠다. 절로 단전 깊숙이에서 부터 웃음이 터져나왔다.
낄낄...푸하하하. 박장대소는 눈물이 찔금 나게 했다.

결국 문제는 찔끔거림이 눈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곳에서도 찔끔거림이 발생한 것이었다. 샌것이다. 음. 어쩌나...

아마도 존재하는 동안 제일의 난관은 피부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들에서 부터 나오
는 것이 아닌지 생각된다. 손을 비틀고 허벅지를 쥐어 짠다. '과연 인간은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강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제 끝났구나 하는 순간에 드문드문 이어지는 질문들.
그리고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선생님의 다감한 답변.
그 다감함이 당시의 내게는 잔인함이었다. 선생님이 미워진다.

'괴로움이 지나치면 미워할 대상을 찾게 되는 건가? '
그런데 그 대상이 선생님이 될 줄이야. 더구나 이방인 신분인 내게 미움의 대상이
여기 제 수업을 듣고 있는 이곳 학생들까지 포함되어 있는 당연함이라니.
그렇게 내 속의 악마성의 기치가 높았드랬다.

'혹시 선생님께서 여름 징역살이 하시면서 옆 사람을 향한 '부단한 증오'가 바로 이런 유의 것이었을까?'
참으로 난감하셨을 것 같다. 지금의 나보다 더욱 그러하셨을 게다.

아무튼 파란만장한(?) 1시간 반의 강의가 종료되었다.
그렇게 설레던 기다림은 그토록 미움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어제 행복한 씨름했던, 이제는 꼼짝하지 않는 소품들 옆에서
꼼짝없이 잠을 잤다.

일어나 보니 저녁이다. 오전에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복귀해 본다.
오늘 마주친 사람들, 상황들, 선생님 모습과 들려주신 강의 내용들.

이젠 방 청소를 해야겠는데 자꾸 기억 하나가 나를 현실로 놓아주지 않는다.
선생님께서 강의 시간 끝날 즈음 어르신 한 분을 회상하셨다. 여든여덟 연세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고인되신 분이다. 선생님 부친이셨다.
선생님의 그 회상에 지금 내 생각의 소매가 걸려있다.

팔순의 연세에도 벽에 기댐없이 꼳꼳이 가부좌로 앉으시어 책을 보셨다 한다.
사진 한 장으로나마 뵌 적 없기에 생전 모습을 그려볼 순 없지만 선생님 회상을
연결고리로 해서 그려본다.

곧 어느 노신 한 분이 흑백의 실루엣으로 그려진다.

그림(畵)이란 '그리움'이라고 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에 따른다면 지금 나는 그분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그리움이라는 의미를 아직 내가 깨닫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선생님 부친께서는 여든여덟 미수(米壽) 연세되시던 해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지난 해(前年)의 생각이 어리석어서...'

여든여덟 봄가을(春秋)을 살아가는 즐거움이 어리석음을 깨닫는 데에 있다 하셨다 한다.

그 즐거움을 따라해 본다.
어제 어리석었던 생각은 무었인지를 반성하면서 그리고 내일 돌이켜 볼 오늘의 어리
석음은 어떠한 것이 될지를 예단하면서. 그리곤 자문해 본다. '즐거운가?'라고.
대답은 '잘 모르겠다'이다. 아직 즐거움의 의미를 깨치지 못한 까닭이겠지.

그 분이 몹시도 그립다. 사람이 못내 그립다.


11월17일 저녁 온수동에서 그리움으로 목마른 나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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