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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사람에 대한 온당한 이해가 되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먼저 필요해요. 대상이 처해있는 상황이나 당면 과제를 모르고 길을 제시할 수는 없지요” 좀처럼 외부강연이나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쇠귀 신영복 교수(64), 스스로의 이유(自由) 이다.

대신 소통의 장으로 지인들과 독자들이 참여하는 산행, 고전읽기, 함께읽기, 서도반, 더불어숲 학교를 열고 있다. 봄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내린천 더불어숲 학교 가는 길목에서 성찰과 종교, 깨달음의 사회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깨달음의 사회화는 “우리들이 갇혀 있는 소유, 소비, 물질적 가치와 같은 좁은 함정을 깨닫게 조명해주는 것이며, 이를 위해 종교는 궁극적 깨달음, 근본적인 성찰성, 인문주의적 가치를 본령으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떠오른 예화가 있다.

나와 같이 징역살이를 한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터 그려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이 어느날 장에 신발을 사러 가기 위하여 발의 크기를 본으로 떴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장에 갈 때는 깜박 잊고 탁(度)을 집에 두고 갔습니다. 신발가게 앞에 와서야 탁을 집에다 두고 온 것을 깨닫고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제법 먼 길을 되돌아가서 탁을 가지고 다시 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장이 파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 사연을 듣고는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탁을 가지러 집까지 갈 필요가 어디 있소. 당신의 발로 신어보면 될 일이 아니요”차치리가 대답했습니다. “아무려면 발이 탁만큼 정확하겠습니까?”

주춧돌부터 집을 그리던 그 노인이 발로 신어보고 신발을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오늘의 종교인은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반성때문이다. 탁(度)과 족(足). 교실과 공장. 종이와 망치. 의상(衣裳)과 사람. 화폐와 물건. 임금과 노동력. 이론과 실천……. 이러한 것들이 뒤바뀌어 있는 우리의 사고(思考)를 반성케 하는 관점으로 나온 책이 바로「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엽서」(1993), 「나무야 나무야」(1996), 「더불어 숲 」(1998) 「강의-나의고전독법」(2004) 등 이다.

또한 절망이 희망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존재론의 관점에서 관계론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감옥 20여년(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 의 성찰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출소한 이듬해인 89년부터 성공회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강의를 통해 최선의 가르침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것' 임을 실천하고 있다.

인터뷰 끝머리에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가 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는가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는 것은 실천적 관계론으로서의 연대, 그것이 담론에 그치지 않고 우리들 삶 속에서 확인되며 본질에 충실해달라는 나지막한 꿈과 위로가 담겨있을 게다.

깨달음의 달 4월이다.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는 깨달음의 달이기를 기원해 본다.

ps] 다음은 귀한시간 내어 주신 선생님께 감사의 뜻으로 더불어숲 나무님들께 전문을 소개합니다. 다만 월간교화는 원불교 교역자 전문지인 관계로 특정 부분에 한정된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월간교화 2005년 4월호. 대담: 양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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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론은
신자유주의와 패권적 질서에 대한 비판과 문명사적 전환, 인문주의 가치에 대한 실천적 개념


- 근대사회는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 일과 공부, 성과 속을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지배해 왔습니다. 종교 쪽에서는 인간의 정신을 바꾸면 물질 즉 사회구조가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사회변혁 운동 쪽에서는 사회구조가 바뀌면 인간의 정신도 자연히 바뀐다는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실패, 생태계 파괴에 의한 공멸(共滅)위기, 인식의 확대 등으로 무언가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단계입니다. 이러한 변화와 관련하여 선생님께서 주장하시는 존재론의 관점에서 관계론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신: 근대사회가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것들을 분석하려는 통합적인 사고가 아닌 분(分)과 석(析)을 인식의 기초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화(對象化)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상화는 나와의 관계성을 제거하는 인식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사회의 이러한 인식 틀을 지양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임은 물론입니다.

제가 제기하고 있는 관계론은 현대 자본주의의 패권적 질서와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상황의 근원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한 개념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이러한 패권적인 세계질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적인 당면과제를 입론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지요. 방금 이야기 한 이분법적인 사고와 대상화의 철학적 근거가 바로 존재론입니다. 관계론의 개념에 관해서는 앞으로 이야기하는 가운데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신자유주의와 패권적 질서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문명사적 전환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개념이라고 생각됩니다.

- 존재론적 사고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에 대한 반성의 예로 서양문명의 근본적 구조인 종교와 과학의 이원적 구성과 모순을 문제제기 하셨습니다. 동양학, 동양사상을 통한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기본관점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신: 서구문명의 기본적 구조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결합이라고 합니다. 흄과 칸트의 진단이 그렇습니다. 헬레니즘은 외부세계에 대한 과학적 탐구 즉 진리를 추구하고 반면에 헤브라이즘의 종교적 측면은 인간 내부의 문제 즉 선의 추구를 담당하는 구성이지요. 이 과학과 종교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동안 서구문명은 동양에 앞서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결함은 과학은 반종교적이고 종교는 비과학적이라는 모순입니다. 과학에 대한 종교의 압도적 지배가 행해지던 시기의 서구문명은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로 전락하였습니다. 수많은 역사적 사례가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십만 명에 이르는 마녀사냥은 물론이고 지동설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이의 진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례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과학의 압도적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선(善)의 문제는 그 입론의 근거 자체가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인간의 삶을 위기로 몰고 가는 공포 그 자체가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과학의 발전은 자본축적과 결합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의 삶이나 사회적 가치와는 별개의 괘도를 질주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서구적 구성원리에 비하여 동양문화에는 이러한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문적 가치가 문명의 핵심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인문적 가치를 저는 관계론이라는 개념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 과거와 현재의 관계, 주체와 대상의 관계, 정신과 물질의 관계, 등 중첩적 관계성을 그 중심에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와 관련하여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는 “물질문명의 발달에 비해 정신문명은 쇠퇴하여 인간이 만든 그 물질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 처방하고 근본적인 해결점으로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로는 관계” 로의 회복을 이야기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관계론의 배경은 불교의 연기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인지요?  

신: 불교철학의 연기론은 탁월한 관계론적 사유입니다. 기독교사상에는 물론이고 서구 근대문명에는 빈약하거나 없는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연기론은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까지 우리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사물과 사람을 하나의 거대한 순환 속에 위치 규정하는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윤회사상은 시간관념에 있어서도 최대의 규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연기론이라는 최대한의 관계론적 사유를 관계론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사회운동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환경운동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환경운동 그 자체는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체제가 자연과의 관계성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관계론적 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의 기본 축을 자연과 사회의 모순에 전선(戰線)을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전선이 지나치게 후방으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사회과학 전공자로서 근대사회의 모순의 기본 축은 자본축적 운동 그 자체에 내재하는 모순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보지요. 특히 초국적 금융자본 형태의 자본축적 운동은 그러한 모순의 어떤 절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당면과제로 절실하게 직면하고 있는 일국패권적 질서와 무한 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환경운동론은 문제제기에 있어서는 온당하지만 모순의 기본 축을 설정하는 위치에 있어서 대단히 우원하다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불교의 연기론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아쉬움을 갖는 것이지요. 연기론은 최대한의 철학적 사유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현실의 실천적인 의미를 읽어내기가 힘들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관계론은 넓은 의미에서는 연기론과 같다고 볼 수 있지만 시간관념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연기론의 시간관념은  단선적인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간이란 흘러가는 개념이 아니라 물질, 그 자체의 변화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연기론에서 시간개념은 단선적 성격 때문에 어떤 시점의 문제성을 시간의 흐름에 맡겨버리는 측면이 있어요. 이승의 문제가 왜소화되거나 시간이라는 객관적 흐름 속으로 해소해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다는 것이지요. 현대 자본주의 패권적 질서와 그러한 세계질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우원(迂遠)한 논리와 철학이라는 아쉬움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관계론은 최대한의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그것을 우선 동양고전에서 재조명하고 있고 또 시종 서구근대사회의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내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패권적 구조를 드러내자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와 종교의 본질은
    ‘인간관계가 지속적으로 작동되는 질서’이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


-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자 간의 상품교환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의 단절현상을 지적하며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관계의 지속성(持續性)에서 온다고 보셨는데요. 그럼 종교의 본질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신: 중복되는 이야기일수도 있습니다만 제가『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의 기본적 관점으로 삼고 있는 관계론은 그 중에서도 사회적 관계를 중심 개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본질이 곧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 경우에는 많은 논의들에서 다루고 있는 사회적 실천, 성찰의 문제, 특히 인간 관계론이 체제와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통합하는 개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사회라는 것은 ‘인간관계가 지속적으로 작동되는 질서’이며 이는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면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사회의 본질이라고 규정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개념과 관점은 인간관계를 급속하게 황폐화시키고 있는 제도로서의 자본주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배제된 상품과 상품의 교류, 다시 말하자면 인간관계가 배제된 소통구조가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라는 개념이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단히 뛰어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특히 인간관계라는 개념은 인간과 제도를 아우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금이야기 하였듯이 사회란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 즉 그러한 시스템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다른 철학적 사유, 윤리 도덕적인 메시지, 더 나아가 종교적 성찰과도 근본에 있어서는 같은 맥락에 있다고 봅니다. 보다 선량한 사회, 인간이 물질적 욕구에 갇히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조화 그리고 더 큰 질서와의 원융(圓融) 속에서 살아가도록 권하는 종교도 같은 문제를 지향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강조점이 조금은 차이가 있지 않은가 싶어요. 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과학적인 관점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우는 제도변혁 쪽에 과도하게 기울어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반면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종교가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실천적인 측면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 기존 사회운동의 이론과 방법론의 한계를 말하지만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거대담론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가? 우리시대 우리사회의 사상적 철학적 토대와 근본적인 과제는 무엇일까요?

신: 사회과학은 체제를 변화시키면 사회가 변화 할 수 있다는 신념이 강했습니다. 반면에 종교는 개인의 품성을 선량하게 함으로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체계입니다.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효과적인 방법은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변혁운동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정치권력을 획득하는데 몰두한 적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획득한 정치권력이 바로 나치스 정권과 스탈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회변혁에 실패했습니다. 반면에 모든 인간이 변화하면 사회가 변화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그 모든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사회적 제도 속에 인간이 놓여있다는 것이지요. 사회는 변하지 않고, 인간만 변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점에 그러한 방식의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회자체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막강한 포섭력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면 그 포섭력은 최고단계에 이릅니다. 물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포섭은 물론이고  인간의 감성까지 사로잡은 대단히 탁월한 포섭력을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다양한 어법과 미디어를 동원하여 민감한 청소년들을 완벽하게 포섭하고 있는 상품미학에 이르면 과연 사회제도의 변화 없이 개인이 변화할 수 있을까 회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회제도의 변화란 사회의 상부구조, 즉 문화의 변혁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제도로서의 문화와 상관없이 개인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 할 것인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은 것이지요. 제도와 인간,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시대가 이끌어낸 역사적인 결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과학 쪽에서도 물질적 토대변화 뿐만 아니라 헤게모니이론이라든가 사상투쟁의 중요성에 대하여 합의하고 있습니다. 의식구조의 변혁 등 특히 프랑스철학을 중심으로 이러한 담론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부문에서도 신학과 해방의 문제, 종교와 사회실천의 문제, 민중불교와 교화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관계론은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를 사회의 본질로 규정함으로써 제도와 인간을 동시에 포괄하는 실천적 개념에 무게를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회관계란 사실은 물질성보다는 인간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거든요. 인간관계가 사회제도의 핵심이기도 하구요. 한편으로 인간은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관계론 특히 인간관계라는 개념은 체제와 인간을 동시에 사고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닌가 하지요. 인간관계를 전략적 개념으로 하여 바로 이 인간관계를 황폐화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의 비인간성을 드러내려는 것이지요. 인간관계의 개념은 단지 현대자본주의의 패권적 구조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그 자체가 철학이고 최고의 인간적 가치임을 선언하려는 것이지요. 좀 전에 말씀드린 인문적 가치와 관련된 것입니다만 동양문화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입니다. 그리고 인성은 인간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품성(品性)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과 제도를 함께 사고하고 당면의 과제와 미래의 가치를 동시에 사고 할 수 있는 개념으로 정립하려는 것이지요.

- 묵자의 무감어수(無鑒於水) 감어인(鑑於人)을 통해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 사람에게 자신을 비춰보아야 진정한 자신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하시는데요. 선생님께서 비춰보는 사람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신: 군자는 불경어수(不鏡於水) 즉 물에 비추어보지 말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이 경구는 『묵자』에 나오는 경구입니다. 이 경구의 배경은 묵자의 반전평화론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국정목표인 부국강병(富國强兵), 더구나 전쟁방식의 부국강병은 오늘날의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적 패권추구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묵자가 물에 얼굴을 비추어보지 말라는 것은 몇 개의 전승국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패전 국가의 처참한 살육과 파괴를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몇 개의 전승국마저도 결국은 패망하게 된다는 역사적 사례를 거울로 삼으라는 것이지요. 이 경구는 반전평화론으로서 만이 아니라 광범한 반성적 의미로 발전했다고 봅니다. 특정한 의미가 보편적 의미로 일반화한 것이지요. 거울에 비추면 결국 자기 자신만을 비추게 되므로 주관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사람의 감각자체가 개인의 몸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가 대단히 어렵고 주관에 빠지기 쉽거든요. 사람에게 비추어보라는 것은 조감(鳥瞰)하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욕구, 물질적 욕망, 이시대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당해 있는 우리 자신을 조감하라는 것입니다. 이 조감의 지점은 역사적으로 훌륭한 실천가일수도 있고, 종교가 가르치고 있는 인간에 대한 높은 성찰적 개념이기도 할 것입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성공회 대학은 대단히 열려있는 학교입니다. 신학과의 신부님들, 사회과학부의 비판적인 교수님들도 제가 나를 비추어보는 거울입니다. 특히 제가 가르치고 있는 새내기들은 젊은 사람들의 정서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거울입니다. 제가 겪었던 감옥 20년도 좋은 거울이었지요. 세상의 밑바닥에서 살아온 일반수형자들은 나의 사회학을 형성하게끔 해준 거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전후의 격동기를 온 몸으로 겪은 수많은 사상범과 정치사범은 근현대사의 모순구조를 비춰보는 거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자기를 비춰보는 행운을 가졌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광복 60주년을 맞으며 돌이켜봐야 할 진정한 의미의 광복과 해방은?

신: 60년이란 생명이 완성되는 한 주기(週期)라고 선조들은 생각해온 것 같습니다. 나이가 60이 되면 사람도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듯 우리 사회도 이제 근본 구조를 성찰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해방 60주년은 완성의 해가 못되고 있습니다. 미완성의 가장 큰 부분은 물론 분단(分斷)입니다만 정치 군사적 주체성, 경제의 자립성, 문화의 정체성 등 어느 부분에서도 진정한 해방이나 독립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주역의 64괘의 마지막 괘 (화수미제-火水未濟)가 미완성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작은 실수로 끝나게 되고 이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이 미완성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광복 60년은 완성의 의미가 아닌 또 하나의 출발의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이룩하지 못하고 있는 과업들을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
   가장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공감과 연대! 그 자체가 가치이고, 세상을 바꾸는 역량

-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형태라 보셨는데요. 그 입장의 동일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그것을 확인하는 척도, 방법은 있으신지요?

신: 입장의 동일함이란 의미는 인간관계론, 넓게는 관계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담론입니다만 제가 이 입장의 문제를 제기하는 까닭은 실천적 관계론으로서의 연대(連帶)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입장의 동일함이란 의미는 물론 좌파경제학에서 생산에서 차지하는 지위, 계급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입장은 물론 계급적 연대와 강력한 집단결속력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강력한 실천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입장이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은가라는 준거는 당대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실천적 과제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크게 보면 세상에 관계없는 사람이 없기도 합니다. 이러한 유연성이 결여되는 경우 입장의 동일함은 집단이기주의라는 존재론의 논리로 전락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노동운동과 변혁운동이 때로는 부정적인 집단 이기주의로 기울기도 하고 배타적인 존재론적 편향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입장의 문제는 계급적 이해관계라는 존재론적 관점보다는 바로 그 존재론을 토대로 하고 있는 근대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관계론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일국 패권주의를 지양하고자 하는 의지와 실천적 입장이 준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장의 동일함을 새롭게 규정하는 이유는 관계론을 연대론으로 만들어 가야겠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연대란 현 단계의 희망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구원한 삶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대론에 있어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대단히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겸손한 깨달음입니다. 절제와 겸손은 우리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 상대성에 주목하는 절제와 겸손은 연대와 실천의 전 과정을 대단히 인간적인 것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 원불교의 개교표어인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민중본위의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시국과 시운에 맞는 실질적인 처방을 내리려 한 점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태생은 불법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표방하였지만 새 시대 새 종교로 혁신적인 면모를 가져가지 못하고 답습한다는 내부적 반성이 있습니다. 원불교의 이미지와 종교의 역할은?

신: 종교에 대하여 또 원불교에 대하여 제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방금 제기하신 문제는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사회의 변혁운동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원불교는 일제시대 상당히 어려운 여건 속에 탄생한 종교이지만 우리민족의 정서에 맞게 토착화에 성공하였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는 변혁역량이 매우 취약합니다. 역량이 취약하다는 것은 단순히 모이는 사람이 적고 목소리가 작다는 양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질적 역량입니다. 질적 역량이란 각 부문의 역량이 조직화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역량들이 어떠한 결합형식으로 연대하고 있는가 하는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종교 또는 특정 부문운동의 내부적 반성에 앞서서 사회연대의 관점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 단계가 바로 그러한 고민이 필요한 단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조직에 몸담고 있다고 해서, 또 그 조직이 추구하는 도덕적 목표가 뛰어나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역량은 어느 경우에나 전체 역량의 한계를 뛰어 넘지는 못합니다. 각개인은 물론이고 특정 교단 특정 부문운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 부문의 소통과 연대가 필요한 것이지요.

이왕 연대론 이야기가 다시 재론됩니다만 연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방연대(下方連帶)입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노자의 철학은 '물'의 철학입니다. 노자의 물의 철학은 그 험난한 춘추전국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철학입니다. 물은 약한 것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가장 약한 민초들의 철학과 전략전술이 바로 연대론이었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세상에 있는 물 중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물이 바로 바다입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시내를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다. 수많은 단체가 자신을 좀더 강한 존재로 키우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지요.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하방연대가 제기되는 것이지요. 낮은 곳으로 연대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물량적 크기의 의미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공감과 연대야 말로 그 자체가 가치이고, 그 자체가 세상을 바꾸는 역량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지요.


   종교는
   궁극적 깨달음, 근본적인 성찰성, 인문주의적 가치를 본령으로 해야

- 우리사회의 변화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시민운동의 성장입니다. 시민단체들은 정치개혁, 경제정의, 환경, 여성, 교육, 언론, 보건, 소비자, 부정부패추방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이슈화하여 민주주의의 사회적 지반을 확대해 왔습니다. 그중 촛불집회, 새만금을 살리기 위한 삼보일배, 방폐장 반대시위, 천성산 환경공동조사 등 시민운동의 중심에 종교의 역할이 증대되는 현상을 어떻게 보시는 지요?

신: 두 가지 말씀을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거대담론이 소멸하고 부문운동이 활성화 되는 것에 대한 우려입니다. 여성, 환경, 언론, 주거, 교통 등 소위 시민운동 담론은 체제변혁담론이 소멸된 공간에 나타나는 담론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본질에 있어서 무장해제 된 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장해제 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까닭은 사회변혁담론은 기본적으로 체제문제에 관한 담론이기 때문입니다. 시민운동은 본질에 있어서 체제담론을 유보하거나 우회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고전적 의미에 있어서 시민이란 부르주아 계층을 의미합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제 3세계 국가들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기전에 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들 제3세계에서는 국내의 계급적 모순을 유보하고, 당면한 민족적 모순에 대처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 주체로 형성되는 것이 민중(民衆)이란 개념입니다. 민중개념은 그런 점에서 시민개념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시민운동의 활성화란 이러한 민중적 변혁운동이 일정하게 해체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시민운동의 활성화 그리고  종교부문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변혁에 대한 소극적 자세가 결합해서 자연스럽게 옮겨 가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 생각입니다. 우리사회에서 민중개념을 부차적 개념으로 하는 시민운동은 결국 한계에 부딪히게 되리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한강 물을 김포하구에서 정화하려는 노력은 성공적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한강하류에서 정화하더라도 상류에서 계속 폐수를 방류하면 그야말로 백년하청이지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향하여 추동해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시민운동도 이를 진보적 입장과 연대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종교운동 역시 이러한 실천적 목표를 공유하고, 진보적 방향을 열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합니다만 흔히 많은 사람들이 지금이 인문학의 위기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적 가치가 폐기되는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인문학의 위기라는 표현은 우리사회가 그만큼 천민적 사회라는 표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민적이란 인문학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 다시 말하자면 이윤의 창출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한다는 뜻이지요. 팔리지 않는 물건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상품생산사회의 본질입니다. 팔리지 않는 지식 역시 하등의 가치가 없음은 물론입니다. 이러한 상품사회에서 인문주의적 가치를 세우는 일은 어쩌면 모든 실천운동의 전제조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종교가 오늘의 상황에서는 시민운동과의 연대보다는 바로 인문학적 가치를 세우는 일에 보다 더 많은 역량을 할애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저는 인문학적 관점의 절정은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견해가 없지 않겠습니다만 인간의 삶과 관련된 궁극적 가치와 궁극적 깨달음을 제시하는 것이 종교의 본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궁극적 가치와 궁극적 깨달음의 문제는 종교의 사회적 실천이나 참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환경운동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궁극적 깨달음, 근본적인 성찰성, 인문주의적 가치를 본령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종교사를 보면 종교주의의 폐단에는 교단주의가 오게 되고, 교단주의의 폐단에는 사제주의가 따릅니다. 종교가 이러한 폐단에 떨어지지 않고 성자의 깨달음의 정신을(사랑, 자비, 은혜) 실천하는 깨달음의 사회화의 길은 무엇일까요?

신: 근대사회는 자본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가장 강력한 물적 토대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종교, 교단도 역사적으로 물질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여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이나 개신교는 말할 필요도 없고 원불교 교단의 발전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각 교단의 물적 토대가 교단의 발전적 토대가 되기도 하지만 반면에 이는 교단의 배타적 고립성, 교단간의 소통에 소극적일 수 있는 조건이 되지요 당연히 장애로 작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봅니다.

종교인 한 분이 종교가 없는 제게 “메신저를 보지 말고 메시지에 주목해주면 좋겠다.” 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교단간의 분립성이란 이론적으로는 메시지에 충실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 문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교단간의 그리고 교파간의 소통지점(疏通地點)을 고민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각 교단의 상층부가 소통지점이 되기는 어렵고 하부의 일반 평신도를 소통지점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반 평신도는 타 교단과의 소통지점으로서 뿐만 아니라 비종교적 사회분야와 소통하는 데에도 유력한 지점이 되리라 봅니다. 다 같이 민중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이지요. 깨달음의 사회화란 그런 점에서 교단을 넘어서는 소통구조에 대한 고민과 연결되는 문제라고 봐요.

그리고 깨달음의 사회화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의 내용과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지극히 명상적인 것으로 가지고 가기보다는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지배기제를 드러내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소유, 소비, 물질적 가치와 같은 좁은 함정을 깨닫게 조명해주는 것이 깨달음의 사회화가 아닐까 생각하지요. 사회가 우리를 가두고 있는 벽, 그 벽을 허물어내는 것 그것이 사회화의 의미가 아닐까요.


   성찰이란
   매일 매일의 크고 작은 것들을 하나하나 깨트려나가는 것
   머리보다는 가슴(Warm heart) 으로  

-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께서 끊임없이 제기하는 근본담론에 대한 필요성은 인지하면서도 자본주의 모순과 위기구조가 갖는 한계 때문인지 나와는 관계없는 고준한 이야기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감옥에서 종교집회에 참석하며 느낀 떡신자의 공감대처럼 정서적인 연대를 갖는 길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신: 제가 근본담론을 문제 제기하는 까닭은 오늘날의 담론지형에 있어서 근본담론이 실종되는 상황을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부패문제, 주거문제, 환경, 여성, 고용, 교통, 교육 등 부문운동 중심의 담론지형은 기본적으로 해체적인 담론형태라 해야 합니다. 이러한 해체적인 담론은 문제설정 지점이 대단히 주변화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선(戰線)이 지나치게 후방에 그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는 결국 개인의 성찰이든, 성찰의 사회화든 근본적인 사회변화는 어렵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근본담론을 관념적인 것, 또는 고담준론으로 여기는 사회 환경에 주목해야 합니다.

근본담론은 사회의 근본구조 다시 말하자면 체제문제이며 사회의 계급적 구조에 관한 논의입니다. 방금 예시한 각 부문운동 또는 해체적 담론은 체제 문제를 유보하거나 은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 문제 자체를 해체해버린다는 것이지요. 춘추전국시대는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전쟁방식으로 추구하던 시대였고 사활적인 무한경쟁의 시대였다는 점에서 오늘날과 닮았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담론, 거대담론이 백가쟁명 백화제방으로 화려하게 꽃피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그러한 담론구조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거나 미시적 담론으로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번에 출간한 『강의』에서 화두로 걸어놓고 있는 ‘관계론’이 바로 그러한 문제 제기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고전의 오래된 담론을 대비함으로써 패권적인 세계질서를 드러내고 문명전환의 문제를 제기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반성이 그야말로 고담준론 진행되기보다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그때그때의 사회현상에서 비판과 성찰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질문하신 교도소의 떡신자 이야기가 적절한 예화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론적 성찰이나 머리로 하는 비판이 아닌 삶의 도처에서 갖게 되는 느낌과 정서가 중요하다는 예화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교도소의 종교집회에서는 예배와 찬송 그리고 설교가 끝나면 위문품으로 가지고 온 떡도 하나씩 나누어주지요. 어느 교회에서 떡 가지고 위문 온다는 소문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참석하려고 하지요. 어느 종파교회를 막론하고 모든 떡 있는 교회는 다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을 '떡신자'라고 그러기도 하고 '기천불 종합신자'라고도 합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참 신자들의 핀잔을 받아가면서 참석하는 떡신자들은 서로 대단히 친밀한 유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떡신자끼리의 관계란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념적인 관계도 아니고 무슨 높은 가치를 위해서 함께 싸우는 동지적인 관계도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인간적인, 때 묻어 있는 정서의 교감이 삭막한 교도소를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깨달음은 일차적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성찰이어야 하고 인간관계는 정서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사상은 쿨 헤드(Cool Head)가 아니라 웜 하트(Warm hearts)라고 생각해요.

성찰이란 매일 매일의 크고 작은 것들을 하나하나 깨트려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보다는 가슴(Warm heart) 으로 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의 크고 작은 일들은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의 형태로 다가온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들이 겪는 모든 기쁨과 아픔의 근원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이러한 삶의 애환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의 어떠한 구조가 이러한 인간관계를 황폐화시키고 있는가를 묻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일련의 반성이 바로 근본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담론이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요. 그것이 일상적 반성의 형태이든 종교적 의식의 성찰이든 사회 도처에서 광범하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성찰의 사회화는 이론이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말 소중한 가치 하나씩은 가지고 살면 좋겠어요. 자기 영혼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종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종교를 사회사상 또는 문명사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런 점이 오늘 인터뷰 과정에서 다소 부담이 되었습니다. 논점이 다소 빗나가게 하지 않았을까 우려되기도 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가 보다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는가” 에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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