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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5.05.18 12:38

잡담(雜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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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서른 일곱해 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 지점에서 저는 점점 확언을 하는데 조심스러워짐을 느낍니다.

너무나 자명해 보였고 불변의 진리라고 여겨지던 것들조차도 오만과 독선이 섞인 편견에 지나지 않았음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뒤늦게 알아차렸던 경험들 때문이겠지요. 확신에 차 발언하고 주장하며, 선명하게 행동한다고 한 것이 결국은 자기착각, 자기체면 속에 이루어진 자기만족적 행위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던 경험들 때문이겠지요. 논리와 이성으로는 무장한 것처럼 폼을 내어 보았으나, 나의 능력과 나의 도덕성 그리고 나의 신념을 과대 포장한 자기기만이었음을 부끄럽게 인정해야 했던 많은 경험들 때문이겠지요.

그러한 경험의 축적으로 인해 더 사려가 깊어지고 풍성해졌다기보다는 소심해지고 소극적이게 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전 그릇이 매우 작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작은 그릇의 크기로 살아가는 일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괜히 제가 갖고 있는 그릇의 크기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하려고 욕심내고 버둥대는 일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요즘처럼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고 인내와 기다림보다는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는 풍조 속에서, 저마다 자기와 자기 자식의 그릇의 크기를 크게 하기 위해 애쓰고, 또 크게 보이기 위해 치장하는 몸부림이 몹시도 애처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속한 모든 집단 내에서 가급적이면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하는 일보다는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몸을 쓰는 것을 선호하게 됩니다.  ‘가장 큰 진보는 단순화’라는 명제가 참으로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회피하려 한다는 핀잔을 받기도 합니다. 제가 속한 전교조 조직 내에서도 비난 아닌 비난과 질책 아닌 질책을 받기도 하구요. (뭐, 요즘은 그런 소리에도 크게 마음 쓰지 않고 있습니다만...)



두울.

교무실에 30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싱크대가 하나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수업을 하고 난 후 분필 묻은 손을 씻고, 찻잔도 씻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요.  그런데 공동으로 사용하다 보니 참으로 지저분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배수구를 오랫동안 치우지 않아 미끌미끌 물때와 각종 이물질이 쌓여 있는 거름채를 꺼내서 치우는 일은 누구라도 하기 싫어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치우려 하지는 않으면서도 버리는 일은 쉽게 합니다.  녹차를 우려마신 후 물기를 빼고 찻잎을 옆의 쓰레기통에 버리는 작은 움직임에 매우 인색합니다.  그대로 씽크대 배수구에 버릴 뿐입니다.  심지어는 양치를 하고, 가래침을 칵칵 뱉아 내기까지 합니다.  내가 뱉은 가래침을 누군가는 반드시 손으로 닦아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주변에 누구보다도 이념의 선명성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행동의 과감성과 결단력을 주변 동지들에게 요구하며,  스스로 전위적 진보를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정치적 판단에는 원리와 원칙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이지요.  참으로 그 명철한 판단력과 순발력,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주장에 실린 목소리의 힘이 부러운 사람입니다.  다만, 그 사람은 자신의 그릇은 남과 다르고 자신의 역할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그 오만과 착각으로 인해 주변에 사람을 머물게 하지 못하는 점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후배 교사와 진보에 관한 한담(閑談)을 나누었습니다.  이러 저러한 진보적 운동에 관한 다양한 정의와 주장이 있었지요.  저는 후배 교사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 싱크대 배수구에 묻어있는 타인의 가래침을 내 몫이라 여기며 닦아내지 못하면서 論하는 진보는 허구”같다구요.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에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물음에 난 어떤 답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혹시 세상을 뜨겁게 한다고 하면서 개별적 주변 사람들은 외면하지 않았을까?  주변 사람을 온 몸으로 화끈하고 한방에 뜨겁게만 하려고 했지, 따스하고 훈훈한 입김을 불어주는 일상적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았을까?  상대방의 차가운 손에 내 손 갖다대며 함께 차가워지는 불편함은 사양하고 있지 않을까?

일상적 성찰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엣.

직업이 사회 선생이다 보니 아이들과 ‘정의’니 ‘도덕’이니 ‘민주’니 하며 떠들 때가 많습니다.  남들보다 크게 정의롭지도 도덕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못하면서 학생들 앞에서는 본의 아니게 위선을 떨게 됩니다.

어느 날 이런 물음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최고의 正義란 무엇일까?” “인간이 가장 道德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正義란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리려는 항구적인 의지’니 뭐니 하는 철학자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들 말고, 정말 개인이 가장 도덕적이고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정의롭고 도덕적인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라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아이들의 생각이 이렇게 저렇게 오고 간 후, 저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최고의 도덕적 삶이란 자기 밥벌이 하는 삶이며 스스로 자기 뒤치다거리를 하는 삶이다.  그리고 가장 정의로운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밥벌이와 자기 뒤치다거리를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보장 받는 사회이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으로 소비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오늘 먹은 밥 한 숟가락, 오늘 입은 옷, 오늘 학교에 오기까지의 이동 수단, 지금 읽고 있는 책, 글자 한 줄에 이르기까지 타인의 노동에 기초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지요.  사회가 고도로 분업화되어 그 역할의 나뉨이 매우 세련되고, 우리는 그것을 당연시하며, 나의 역할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지만요.”

“그렇지만, 제아무리 복잡하게 분업화된 관계망으로 위장 하더라도 결국은 타인들의 노동과 노동의 관망에 의해 생산된 것들을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난 내가 소비하는 만큼 생산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내가 하는 노동을 자본주의에서의 교환 가치적 틀로 평가하지 않고, 자연 상태에서의 사용 가치적 틀로 평가하여 내가 소비하는 물질과 문화의 양만큼 노동하며 생산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장 도덕적인 삶이란 바로 각자가 소비하는 만큼 생산하는 노동을 하는 삶입니다.”

“배설하고 청소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일 배설합니다.  아침에 학교에 오면서 지하철역에서 또는 학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늘 배설하고 어지르지요.  내가 배설하고 어지르고 또 소비하면서 각종 쓰레기를 배출하는데, 그런 만큼 반드시 누군가는 이 사회에서 치우고 정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에서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지하철에서는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학교에선 청소 당번이 그렇습니다.  

“최고의 도덕적 삶은 단순한 것 같습니다.  자기가 배설하고 자기가 어지르는 만큼 자기가 청소하고 정리하는 삶입니다.  배설한 것을 치우는 것이 환경미화원과 청소부 아주머니들의 당연한 몫으로 생각하지 않는 삶입니다.  항상 내가 사회적으로 배설하는 총량과 뒤치다거리 하는 총량의 균형이 맞는지 생각해 보는 삶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도덕적 삶은 자기 밥벌이 하는(소비하는 만큼 생산 노동을 하는) 삶이며, 스스로 뒤치다꺼리 하는(배설하는만큼 청소하고 정리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생산하는 것보다 많이 소비하는 사람은 제아무리 교양을 말하고 점잔을 떨어도 부도덕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배설하는 것을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닦는 것을 당연한 사회적 분업 시스템이라 생각하고, 마음 한 구석에 사회적 부채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제 아무리 말끔한 복장에 멋을 내어도 추악하고 부도덕한 사람이겠지요.”

“正義란 이 밥벌이와 뒤치다꺼리가 사회적으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각자가 생산하는 만큼 소비하고, 배설하는 만큼 치다꺼리하게끔 제도적으로 분배하는 사회가 가장 정의로운 사회라 봅니다. 즉 남의 노동에 기생하여 사는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도록 하는 사회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래도 꽤 많은 학생들이 공감을 표시해 줍니다. 특히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일수록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주제라고 덧붙입니다.


네엣.

청소 특별 구역으로 화장실을 배정받았습니다. 화장실이라는 곳은 누구나 청소하기 싫어하는 곳입니다. 특히 화장실에 숨어서 담배를 피운 후 바닥, 소변기, 대변기 가리지 않고 꽁초를 버리는 숱한 아이들 때문에 화장실은 툭하면 막힙니다. 소변기 주변에 달라붙은 누런 가래침, 조준 실패와 분사형(?) 대변으로 변기 주변에 덕지덕지 말라붙은 똥 덩어리들. 툭하면 막혀버리는 대걸래를 빠는 배수구. 어느 것 하나 더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아이들과 청소를 하면서 집게를 들고 소변기에 꽁초를 주우라 하면 십중 팔구는 인상부터 씁니다. 내가 안 버렸는데 왜 내가 이걸 치워야 하느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표정이 역역합니다. 특히 막힌 대변기라도 뚫을라 치면 온갖 인상을 쓰며 서로 안하려 난리입니다.  어쩔 수 없이 뚫개를 잡은 녀석은 고개를 돌리고 발과 엉덩이를 멀찌감치 뺀 채, 형식적으로 몇 번 뚫는 시늉을 할 뿐입니다.

그래도 저의 도덕론과 정의론을 듣고 공감을 표한 몇몇 녀석들은 고맙게도 그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매일 아이들 앞에서 마른 똥은 불리고 솔로 닦고, 오물을 줍고, 막히면 뚫고, 그렇게 시범을 보이고 아이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저는 한 술 더 뜹니다. “우린 매일 매일 싸는데, 너희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청소가 돌아오니 얼마나 불공평하냐?  그러니, 우리 인상 쓰지 말고 똥냄새도 기꺼이 맡으며 청소하자. 음~~  상큼한 똥내음.”    

과연 학생들이 얼마만큼 노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자각하고, 나아가 노동자적 관점에서 사고하고 판단하며, 더 나아가 이 단순한 도덕적 원리에 입각한 삶을 추구하게 될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교사로서 살고자 할 뿐입니다.


다섯.

공동 육아를 시작한지 어느덧 15개월이 흘렀습니다.  우리 이람이도 그 시간만큼 부쩍 컸습니다.   공동 육아를 시작하니 참으로 일이 많습니다.  툭하면 청소에 회의.  더구나 올해 ‘교육 이사’라는 능력에 맞지 않는 역할까지 맡고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툭하면 어린이 집 일을 해야 한다며 여러 모임, 술자리 등에서 빠지는 저에게 어떤 선생님이 이렇게 핀잔을 주시더군요.  “아이를 얼마나 대단하게 키우려고 그렇게 극성이야?” 공동 육아를 한다는 것이 외부에서 보면 강남의 사교육 열풍 속에서 극성을 부리는 부모들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면서 “그래, 도대체 난 이 아이를 어떤 대단한 사람으로 키우려고 하지?” 스스로 질문해 봅니다.  교육의 영역에서 ‘인적 자원’, ‘경쟁력’, ‘효율성’이라는 용어가 갖는 폭력성에 몸서리치면서도, 한편으론 그래도 내 아이는 창의력 있고 경쟁력 있는 아이로 성장해 주길 바라며, 나중에 노동 시장에서 고가의 상품 가치로 거래될 수 있도록 일찌감치 철저한 무장을 해주기 위한 차별화된 전략적 방편으로서 공동 육아를 선택한 것은 아닌지 뒤돌아봅니다.

난, 우리 아이들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 주기를 바라는걸까?  단지, 통제보다는 자유, 인위적 공간보다는 자연, 더 질 좋고 안전한 유기농 먹거리와 같은 환경적 요인의 우위에 공동 육아의 모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동체 속에서의 자아 형성, 노동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적적인 태도, 생태적 삶의 실현과 같은 보다 본질적인 삶의 태도와 유아기의 가치 내면화 등은 부차적인 문제로 등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육의 보다 본질적인 과제에 대해서 우린 어떤 교육적 방법을 갖고 있는 것일까?  반말, 나들이, 들살이, 마실, 품앗이 등의 공동 육아적 기재들 만으로 그런 교육의 본질적 과제를 수행해 낼 수 있을까?

“부모가 공동체적으로 살지 않으면서 아이가 그렇게 성장할 수 있겠는가?”,  “부모의 삶이 경쟁과 효율의 패러다임에 갖혀 있는데, 아이는 통합과 공존의 공동체적 패러다임 속에서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는 이기범 교수님의 말씀(지난 2월 통합 교육 강연)을 떠올려 봅니다.

그런 면에서 저의 삶의 지향은 곧 아이의 삶에 대한 기대이며, 저의 삶은 살아있는 아이의 교육적 텍스트라 생각합니다.

나는 어떤 삶을 추구하는가?  혹 내 그릇의 크기를 키우려 무리하게 애쓰고 있지는 않는가?  주변인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 그리고 근거도 없는 우월감으로 자신을 갉아 먹으며 스트레스를 스스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갖고 있는 그릇의 크기보다 더 많은 것을 담으려 애쓰고, 심지어는 더 크게 보이기 위해 위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역할은 남들과는 달리 더 고상하고 더 중요하고 더 의미 있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정작 단순하면서도 본질적인 ‘도덕’과 ‘정의’를 외면하지는 않는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학생들을 어떻게 만나고 소통해야 하는지?
난 어떤 삶을 추구하고 있는지?

진보는 단순화인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며 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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