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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5.10.20 10:28

가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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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뀔 때면 언제나 비가 내렸다. 가을이 깊어가니 또 비가 내린다. 이 비가 지나가면 산줄기는 가슴뼈를 한층 드러낼 것이고 겨울은 들판을 가로질러 내려와 대문을 밀고 성큼 들어설 것이다.
  
오슬오슬 내리는 가을비는 멀리 산을 고요히 적신다. 단풍들어 유화처럼 채색된 가을산에 무채색의 비가 덧칠을 하니 모두가 뿌옇게 변하며 가물거린다. 젊은 날의 추억처럼 가물거린다.
  
추수가 끝난 마을엔 이제 아무도 비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 가을 마지막 향을 뿜는 토종국화꽃잎마저 시들게 할 빗줄기라 생각하면 더욱 반갑지 않다. 반갑지 않은 가을비가 골짜기 마을에 내리는 날은 그 적요(寂寥)를 혼자 감당하기 버겁다. 그러나 함께 젖어보는 여유는 차라리 축복이 아닐까.
  
조용히 산을 적시던 비가 빠른 걸음으로 능선을 타고 내려와 들녘에 모인다. 이제 ‘물꼬싸움’이 끝난 빈 들판에서는 할 일을 잃고 잠시 당황하다가 여유가 생긴 김에 놀아볼 심산인지 빗줄기는 흥겨운 풍악놀이를 벌이듯 논바닥을 세차게 두드린다. 추임새도 없이 강한 장단으로 고조되고 여름들판에서 땀 흘리며 일한 농부의 노고를 치하하며 춤을 춘다. 빈 들판에서 혼자 덩실거린다.
  
춤추던 비는 들녘을 건너 개울로 뛰어든다. 이제 곧 살얼음이 덮일 개울에는 뜨겁던 햇볕 아래서 유년의 추억을 만들던 개구쟁이들도 어느덧 떠나고 비어있다. 너른 개울에 빗방울이 와르르 뛰어 내려와 물장구를 치다가 물위에 수많은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깔깔거린다. 어렸던 옛날, 급한 물살에 떠내려 보낸 새 고무신을 찾으려는지 돋보기 같은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마른 풀잎 아래까지 기웃거린다.
  
바퀴도 무거운 경운기가 개울을 누르고 지나가자 빗방울은 비명을 지르며 일어선다. 살아오면서 밟힌 젊은 날의 꿈이 기억났을까. 성난 얼굴로 마을에 들어온다. 저를 반가워하지 않는 농부에게 시위하듯 지붕 위에서 한바탕 아우성치고 닿는 곳마다 깨어지는 고통을 참으며 애끈한 마찰음을 내면서 흩어진다. 푸성귀가 시든 남새밭에서 깨어지고 시멘트로 단장된 뜰에서는 미끄러진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마당을 헤매다가 붉은 열매 다 털어 낸 대추나무 가시에 찔려 통곡소리를 내며 깨어진다. 그래도 내다보지 않는 사람들이 야속한지 빗방울은 처마 밑으로 눈물을 흘려보낸다. 한동안 비가 소용되지 않을 빈 밭들을 바라보며 서러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듯 비장하게 주먹 쥐고 대문을 나선 가을비는 지난 태풍으로 무너진 돌담을 보자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화해를 한다. 젊은 날의 오만 같은 거센 손아귀로 마을을 할퀸 상처를 돌아보다 후회하며 흐느낀다. 긴 흐느낌은 한숨으로 잦아들고 소리 없이 돌담을 따라 흘러내린 비는 주먹을 풀고 서로 손을 잡고 흐르다가 개울물과 만나 조용히 마을을 빠져나간다. 눈물을 닦으며 말없이 나간다.
  
마을을 떠난 개울물은 다시 힘차게 출렁이는 강물을 만나 도도하게 흐르리라. 그리고 대지가 겨울 갈증을 느낄 때 해갈해주는 생명이 되리라. 또 순환을 거듭하여 새싹이 기다리는 봄비가 되어 돌아오리라. 꿈과 이상을 알고 오만을 다스리는 여유로 상처와 괄시를 이해하는 따뜻한 봄비가 되어 꽃들의 소망이 마침내 향기로 이루어질 때까지 키워주리라.
  
반기는 사람 없이 빈 밭을 적신다해도 가을비는 쓸모없는 비가 아니라 화해의 비다. 무지개를 좇던 어린 날의 꿈과 젊은 날의 만용을 돌아보게 하는 사색의 비다. 빈 들판에서 잠시 밀려난다고 서러워할 일도 아니다. 들판을 푸른 이랑으로 가득 채우고 출렁이던 지혜로 겨울을 견딜 줄 아는 인내의 비다. 상처 입은 중년에게 다시 세상을 향해 악수를 청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깨달음의 비다. 가을비 내리는 날의 적요는 슬픔이 아니라 고요한 성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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