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죄'는 있어도 '맞을 죄'는 없다.

by 권종현 posted Apr 2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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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학교 전교조 분회 게시판은 난리입니다.  우리 학교에 학생 체벌을 무지막지하게 습관적으로 하는 교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교사생활 2년차일때 체육부실에 불려가 문 걸고 1시간 30분동안 쌍소리(이새끼, 저새끼 등)를 들으며 그 사람에게 훈계를 들은 적도 있었죠...  그 땐 그러고도 살았습니다.

그 사람이 올해 학생부장이 되더니 학교가 군대가 되고 있습니다.  난리가 아니죠.

급기야 학생들이 전교조 게시판에 [폭력교사추방], [학생폭행반대], [학생인권보호]등의 말머리를 달고 수 많은 불만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부학생회장은 자기의 실명을 걸고, 공개 토론회를 조직하자고 나서는 등....  (물론 몇몇 교사들의 조언과 후원이 있습니다만..)    학생들의 자신들의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사들은 명목적으로는 조용합니다.  사실 이 일은 '삐따기'의 무지막지한 학생 폭행으로 나온 말이긴 하지만, 학교 문화 전반에 '체벌'은 늘 따라다니는 일이거든요.  그리고 대부분의 교사들이 방법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체벌'을 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교사용 게시판에 글 하나 썼습니다.    얼마전 결혼한 유연아가 작년에 제3회 서도반 전시회에서 출품한 '꽃으로도 때리지마라'라는 작품이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라는 책의 서평을 찾아서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정말 이젠 학교에서도 체벌은 사라질 시점이 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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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죄'는 있어도 '맞을 죄'는 없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

당나라 때의 시인 동방규가 흉노의 왕(單于/선우) 호한야(呼韓邪)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던 왕소군(王昭君)을 생각하며 지은 詩중 한 구절입니다.  진달래와 벗꽃이 피었다 지고, 캠퍼스 앞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도 교무실 앞 마지막 목련 꽃잎과 함께 아득해지는 즈음에도 날씨는 여전히 스산하기만 합니다.  오늘처럼 황사 바람까지 부는 날이면 그야말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입니다.

요즘 학생용 게시판을 들어가 보면 여러 가지로 마음이 어수선합니다.  봇물 터지듯 묻어두었던 자신들의 목소리로 절규하는 학생들의 글을 보는 교사로서의 마음이 참으로 편치 못합니다.  이는 수면위로 드러난 특정 선생님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도 아이들과 부대끼며 때로는 함께 웃고, 설명하고,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훈육하고, 또 때로는 화내고, 짜증내고, 때리고.... 하는 우리 교사들의 교육 문화 전반에 관련된 저항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90년대 후반 이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다양한 계층의 이해와 요구가 정책 결정에 다양한 형태로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마치 우리 사회는 동토(凍土)의 왕국을 벗어나 ‘봄날’을 경험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무하는 학교는 여전히 과거의 문화에 대한 진솔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지 못함으로써, 오늘과 같은 사태를 맞이하고 있고, 또 그럼에도 모두들 ‘침묵의 카르텔’로 나의 이야기가 아닌 특정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春來不似春이 황사때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이유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저 역시 지금까지 학생 체벌을 자주는 아니더라도 심심찮게 가하던 교사입니다.  때로는 감정을 100% 거세하였다고 확신하고, 그야말로 교육적 목적으로 아이들의 손바닥, 엉덩이, 종아리 등을 회초리로 때리기도 하였고, 때로는 학생의 태도와 반응에 따라 체벌의 과정에서 감정의 엑셀레이트를 느끼며 손찌검을 가하기도 하였지요.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는 나의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스스로 주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학생과 ‘레포(공감)’가 형성되어 있기에 나의 행위는 무분별한 폭력과는 구분될 것이라는 ‘자기 면죄부’입니다.  설사 감정이 섞였다 하더라도, 나의 행위는 그것조차도 교육 행위의 일부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스스로 ‘자기 최면’을 겁니다.  또는 추후에 학생을 다독거려 놓고는 이것을 남자대 남자로서 겪을 수 있는 캠퍼스의 로맨스로 미화시키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은 후 학생과 관계가 더 돈독해지거나, 학생 행동의 변화를 경험하기라도 하면, 나의 ‘폭력적 체벌’은 교직 생활의 상큼한 양념으로 둔갑하여 차후의 또 다른 폭력적 체벌을 정당화시키는 사례가 되곤 합니다.

그러나, 저 억눌렸던 학생들의 아우성을 들으면서 진솔하게 성찰해봅니다.  과연 인간이 인간을 때릴 권리가 있는가?  세상에 ‘맞을 죄’라는 것이 존재할까?  내가 누군가에게 신체적 억압을 가해 상대의 어떤 행동의 변화를 얻었을 때, 그것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교사라는 직분을 떠나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해보면 세상에 ‘죽을 죄’는 있어도 ‘맞을 죄’는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상식입니다.

연쇄 살인범이 우리의 눈앞에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그는 ‘죽을 죄’를 지었을까요?  ‘맞을 죄’를 지었을까요?  그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사회 정의를 위해 당연히 법률적 절차에 따라 처벌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그 처벌 방식은 반드시 법률적 절차에 따라야 합니다.  설사 ‘죽을 죄’를 지었어도 반드시 절차에 따라 죽여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나쁜 놈아’라며 돌을 던지거나, 뺨을 때리거나, 혹은 조사관이 조사 과정에서 신체적 고문을 가했다면 그런 행위들은 또 다른 폭력일 뿐이라는 것이 민주주의의 상식입니다.  

우리의 형법은 ‘사형’이라는 형벌은 인정하면서도 ‘태형’이라는 형벌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죽이는 것보다 사람의 신체를 때리는 것이 더 비인간적이고 반인권적이라는 것을 우리 형법이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형 제도도 조만간 폐지될 것이라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그런데, 그 상식이 유일하게 통하지 않으며 ‘자의적 처벌’을 정당화시키는 곳이 학교입니다.  최근에는 군대나, 교도소에서 조차도 적어도 명목적으로는 ‘자의적 처벌’을 철저히 금하고 있으며, 그런 일이 발생하면 해당자는 합당한 책임을 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단지 학교만이 아직도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온갖 형태의 체벌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최근 들어, 학교에서도 체벌 문제는 심심찮게 법률적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인권 의식이 향상된 데에 비하여,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들의 문화는 낡은 관행을 답습하고 있기에 그 간극의 차이에서 나오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논쟁의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에 대법원 판례로 교사들의 체벌(징계권의 행사)의 한계에 대하여 규정하여 놓았습니다.  

교사의 학생에 대한 체벌이 징계권의 행사로서 정당 행위에 해당하려면,
첫째, 그 체벌이 교육상의 필요가 있고,
둘째, 다른 교육적 수단으로 교정이 불가능하여 부득이한 경우에 한하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그와 같은 경우에도 체벌의 방법과 정도에는 사회 관념상 비난 받지 아니할 객관적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라고 밝혀놓고 있습니다.  
즉, 1. 교육 목적 타당성,  2. 대체 불가능성,  3. 체벌 방법과 정도에 관한 사회 관념상 타당성입니다.  

3.번의 경우가 매우 애매한데, 이에 대해서는 몇 해 전 회초리의 길이와 두께 등을 교육청에서 정해주는 웃지 못 할 일이 있을 정도로 최근에는 신체적 체벌에 대해 사회적 관용을 베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손찌검을 가하고, 야구방망이나 전기줄, 각목 등 사회적 통념을 벗어난 체벌 도구를 사용하고, 또는 부모나 환경 자체를 탓하며 인격적 모욕을 주는 핀잔 등은 모두 교육적으로도 비교육적일 뿐 아니라, 법률적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저 대법원 판례조차도 이미 낡은 판례(1976년 대법원 판례)가 되어, 제 견해로는 앞으로 10년 안에 우리 사회도 모든 종류의 체벌을 금하는 시대가 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이미 국민들의 인권 의식은 그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학생용 게시판에 올라오는 학생들의 글을 단지 철없는 몇몇 아이들의 반항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교사들의 학생 지도 방법과 교육 문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몇 해 전, 우리 학급에 아주 ‘말썽꾸러기’가 한 녀석 있었습니다.  그 녀석의 어머니께서는 저만 보면 제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저 녀석은 제 말은 안 듣습니다.  선생님께서 꼭 때려서라도 사람을 만들어 주세요.”  수시로 지각하고 도망가는 그 녀석으로 인해 저는 자주 어머니와 통화를 하였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제발 엄하게 때려주세요.”를 부탁했었습니다.

한 번은 정말 저도 아이에게 화가 났고, 그 녀석과 저와의 약속도 있었기에 저는 그 녀석에게 정말 매서운 체벌을 가했습니다.  어머님께 사전 양해를 구한 것은 물론입니다.  다음날 저는 어머님으로부터 ‘잘하셨어요, 선생님~’이라는 말을 들을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 어머님과는 통화는 할 수 없었지요.  아이를 통해 들은 그 아이의 매맞은 엉덩이를 바라보고 어머님이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엉덩이를 이렇게까지 만든다니?”  어머님의 교육 방식의 시시비비를 떠나 그것이 어머님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오늘 우리 둘째 아이가 또 병원에 갔습니다.  지난 겨우내 감기로 고생을 하다가 결국 2월 들어서는 폐렴으로 8일 동안 입원을 했었는데, 지난 주에 다시 아이 기침소리가 요란해지더니, 다시 폐렴 증세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 상태를 봐서 입원 여부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일이 이렇게 많은 손과 마음이 가는 줄은 내 새끼를 키워보기 전에는 정말 상상도 못했지요.  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고 의젓한 인간으로 키워낸다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1,500여명의 학생들 하나 하나가 모두 그 누군가의 그러한 ‘정성’과 ‘사랑’의 결정체들입니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하지 않은 아이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버릇이 없고, 수업 분위기를 해치고, 교칙과 질서를 안 지키고,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면 반항으로 일관하고, 막말로 ㅆ ㅏ 가지가 없는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이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 부모가 드린 ‘정성’과 ‘사랑’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저의 순간적인 속상함과 분노와 교육적 열정은 미약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 아이의 일탈 행위는 ‘교육의 대상’이지 ‘자의적 체벌’의 대상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더구나 학생의 일탈 행위가 제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죽을 죄’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맞을 죄’가 될 수는 없다는 민주사회의 상식을 다시 한번 되새겨봅니다.

이제 말을 마쳐야겠습니다.

조선시대 때 어느 고을 사또가 향시(鄕試)의 과제로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를 내걸었다고 합니다.  이에 응시한 대부분이 왕소군의 고사를 인용하여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으나, 한 사람만은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를 네 번이나 반복하여 답안을 제출하였다지요. 그가 장원으로 급제한 것은 물론입니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 오랑캐 땅에 꽃이 없다하나,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 오랑캐 땅인들 꽃이 없으랴.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 오랑캐 땅에 꽃 없다지만,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 어찌 땅이라고 꽃이 없겠는가?
(胡는 ‘어찌 ~않겠는가?’라는 뜻으로도 쓰인답니다.)

봄다운 봄이 그립습니다.  
어찌 꽃이 없겠습니까?  
우리가 그 꽃을 피우고, 또 우리가 어우러져 꽃이 되는 꿈을 황사로 잔뜩 찌푸린 봄같지 않은 봄날에 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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