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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쓸 짬을 내지 못한 탓도 있지만 이 걸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을 하느라 그동안 쓰지 못했습니다. 이미 블랙타이거님의 글에 대해서 저 말고도 다른 분들도 웬만큼 이야기했고, 또 게시판 분위기도 그렇고......해서 말입니다. 그래도 시작을 했으니 어떻게든 끝은 맺는 게 도리란 생각이 들어 편치 못한 마음으로 이 야심한 밤에 마무리합니다.

끝으로, 블랙타이거님께 부디 님의 사고와 글과 행동이 맹목적이지 않기를, 책임감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발걸음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신영복 함께읽기>란 책을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제가 님의 글에 이렇게 하나하나 다른 생각을 이야기했던 까닭은, 내 삶의 등대처럼 여기며 존경하는 신영복 선생님에 대해서 님께서 터무니 없는 비판을 해서 화가 나서 한 일은 결코 아닙니다. 만인지하님의 지적처럼 ‘제식구 감싸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님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제 느낌은 ‘황당하다’는 그런 느낌과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하는 것이었지, 분노나 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여러 번 님의 글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님처럼 맑시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고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여기는 사람에겐, 자신의 아전인수식 해석이 가장 과학적인 사고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비판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며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겠군......정도였습니다. 그럼 하나하나에 다른 생각을 쓴 까닭은 뭐냐? 왜? 그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듯이 님같은 사람도 이곳에 자기의 생각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내가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듯 님같은 분도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생각이라 생각했으며, 처음의 단편적이고 허약하고 피상적인 인식들과 이야기들은 이야기가 거듭될 수록( 토론과 논쟁 속에서) 총체적이고 짜임새있고 깊이 있는 인식과 이야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그만큼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런 속에서 님이 선생님에 대해 잘못 이해하거나 오해한 부분들이 제대로 이해될 수도 있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쌈박하지도 못하고 부족한 데 많은 긴 글, 무엇보다 재미없는 글 읽느라 모든 분들 고생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에게 누가 되지나 않았을까 걱정 가득합니다. 그래도 이런 저런 분위기나 눈치 안 보고, 내 생각을 내 언어로 이야기했다는 점을 위안 삼으며, 언제가 박경리 선생님이 하신 말을 생각해봅니다.

  ‘ 긍정과 부정의 사잇길에서 오늘도 나는 멈추며, 걸어가며,
   절망과 희망이 엇갈리는 현실 속에서, 그래도 존재해 있다는 것은
   아름답고 경이롭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좋아하던 벗이 편지에서 해주던 말도 떠오릅니다.

‘ 발레리였던가요?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오늘은 그말이 좀 멋있게 들립니다.’

2006. 9. 10.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

17. 부르주아의 지배와 프롤레타리아의 지배 모두를 부정하는 그의 和의 논리는 계급성을 갖지 못하며, 따라서, 관념적이며, 과학적이지 못합니다.

==> 위의 17번에서 님께서 ‘부르주아의 지배와 프롤레타리아의 지배 모두를 부정하는 그의 和의 논리는 계급성을 갖지 못하며, 따라서, 관념적이며, 과학적이지 못합니다.’라고 한 말은 님처럼 맑시즘을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여기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 변혁시키는 유일한 대안처럼 생각할 땐,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며 따라서 조금도 무리한 주장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연장 선상에서 “ ‘동’의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는 한 비생산적 논의를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지 않는 한, ‘화’의 논리는 21세기가 추구해야 할 새 패러다임이기도 합니다.”고 하신 신영복 선생님의 말에 대해서도 계급성이 결여된 관념적이고 과학적이지 못한 논리라고 비판하는 게 조금도 이상할 게 없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점, 그러니까 님의 맑시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그것을 마치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만능해결사인양 여기기 때문에 신영복 선생님의 말과 글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자주 오독하고, 주관적으로 왜곡해서 이해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저도 생각이 얕고 고민이 얕아, 신영복 선생님의 삶과 태도를 배우고 본받으려 하는 사람이면서도 선생님의 모든 말과 이야기를 온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더러는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과 달라서, 선생님에게 더 여쭤보고 싶고 물어보고 싶고 궁금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의 논리가 바탕에 깔려있는 한 비생산적인 논의를 계속할 수 밖에 없다는 선생님 말씀엔 당연히 공감하는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면, 의문이 생기고 궁금증이 생깁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 즉 ‘화’의 논리를 모든 영역과 모든 대상에 다 적용할 수 있겠는가?하는 궁금증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도저히 서로 용서되고 인정될 수 없을 것 같은 적대적 증오감과 대립을 오랫동안 지속시켜 온 계층, 집단, 사회, 국가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데, 이런 경우에 과연 ‘화’의 논리가 들어설 자리가 있겠는가? 문제 해결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서 양 측에 얼마나 설득력있게 다가갈 수 있을까? 제 짧은 머리로 이해할 땐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군더나 양 쪽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을 때, 그러니까 어떤 한 측은 힘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강자이고 다른 한 측은 압도적 열세에 있는 약자일 경우에는 더욱더 ‘화의 논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사라엘에 의해 초토화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레바논 사람들에게, 강자에 의해 언제든지 유린당할 수 있고, 평화를 바라지만 스스로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조차 없는 약자들에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화의 논리’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입니다. 더 좁혀서 생각해봐도, 예를 들면 ‘조선일보’와 같은 악질적인 언론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가? 만일 백번 양보해서 우리는 하려고 하는데 그들이 하지 않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화의 논리’를 말하는 대상에 대해서조차도 우리는 다름을 존중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방법과 실마리를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이런 것들이 제 궁금증들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화’의 논리가 21세기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말씀하셨지, 그 일이 쉬운 일이라고 하신 적은 없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결해보려고 해왔던 동의 논리로 해결이 안 되니 비록 쉽지 않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힘든 일일 지 모르지만, 새로운 희망은 지금까지의 동의 논리를 넘어서서 ‘화의 논리로 가야되지 않겠느냐...그렇게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신 건데, 마치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인양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고민에 빠지는 게 아닐까....그런 생각을 했지요..    



18. 신영복의 '양심'에 대한 언급은 부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은, 그가 속한 계급에 따른, 사회적 의식과 행동이 강제되기 때문입니다. 이념이나 양심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님의 말대로 이념과 양심은 대립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이념이나 양심이 사회적 존재에 의해 규정된다는 말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그가 속한 계급에 의해 사회적 의식과 행동이 강제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도, 절대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신영복의 양심에 대한 언급은 부적절하다’는 말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님이 신영복 선생님의 말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오독한 탓이지요. 신영복 선생님은 이념과 양심이 대립된다고 하신 게 아니라, 이념에 치우친 사람보다 양심적인 사람이 더 강하다는 걸 옥중에서 여러 수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양심적인 사회가 진정 강한 사회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을 뿐입니다.

  

19. 신영복은 이제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명제조차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대와 상부구조의 상호작용과 침투는 너무나 당연한 변증법의 원리입니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재검토해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 이 19번도 님의 따옴표로 인용한 신영복 선생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독한 탓으로 하게 되는 잘못된 주장, 엉뚱한 주장입니다.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명제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고 현실에 맞게 제대로 재해석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사람은 바로 블랙타이거님입니다.


21. 심지어, 신영복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부르주아적 자유조차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상품생산과 교환이 지배적인 자본주의조차 신영복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상품생산과 교환이 지배적이지 않은 물물교환 수준의 시장의 자유에 대한 논의라면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기도 합니다.

==> 신영복 선생님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브르주아적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 게 아니라 시장의 자유가 내포하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서, 그러니까 개인의 개성과 다양성과 창의성을 높여주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22. 신영복의 최대 오류의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이론적 표현을 '과학'이 아니라, '예술'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서 올바른 연대는, '양보'운운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과 혁명운동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의 계급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독립성과 주도성을 보존하고 증대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배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착취와 억압으로무터 해방시키고,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공동의 이해를 가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 신영복 선생님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이론적 표현을 과학이 아니라 예술로 인식한 게 아니고, 과학’보다 단수가 더 높은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예술‘에 비유해서 생각해보자, . 만일 사람들이 사회변혁을 최고의 종합예술에 비유할 수 있다면, 논리적으로 단순화되어 있는 이론적 지침에 따를 때보다 주체의 편성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일이 당면과제가 될 것이고, 만일 우리들이 그런 노력을 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주목했던 과학적인 역량의 결집 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그러니까 직선적인 사고가 아닌 곡선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단수가 더 높은 방식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을 결집해낼 수 있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부분은 저도 고민이 더 필요하고 제 생각이 확실히 정리되지 못한 상태이므로, 단지 님이 오독한 사실만 지적하고 그칩니다.



23. 우리는 자본주의적 질서내에 태동하고 있는 새로운 질서를 건설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신영복은 아래와 같은 공상적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나아나게 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삶의 형태,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기업같은 틀에다 몬드라곤이나 가나자와 같이 자립적이고 수준높은 공동체적 전망을 그 속에 심어나가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신영복)

==> 몬드라곤이나 가나자와 같은 공동체는 실천적인 노력을 통해 만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자립적이고 수준높은 공동체입니다. 결코 공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선생님은 이런 예를 통해,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한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보다는, 그러니까 ‘理想의 現實化’보다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삶의 형태인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과 같은 틀에 몬드라곤이나 가나자와 같은 자립적이고 수준높은 공동체를 심는 것, 그러니까 ‘現實의 理想化’라는 낮은 자세를 갖는 것이 오히려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한계를 정직하게 인식하는 보다 실천적인 태도가 아닐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24. 그의 행복론이 관념적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너무 가혹할 까요. 물질적,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중요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여유있는 분이라면 모르겠지만요.

"우선 남한의 경우를 두고 말해 보죠. 우리는 이제 나는 어느 때 행복한가, 또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어느 때 행복할 것인가 라는 시각을 가져볼 필요가 있읍니다. 제 경우에는 뭘 소유하거나 소비하는 경우보다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애정과 신뢰를 받을 때 그때 참 행복하다는 느낌입니다. 그게 비단 제 개인적인 정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많은 사람들도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다들 그런 것들을 내밀하게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사회가 추구할 가치에 대한 새로운 반성 같은 게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신영복)

==> 24번의 님의 주장에 대해선, 3년전 쯤 제가 쓴 아래의 글로 대신할 까 합니다. 한편으론 신영복 선생님의 생각과 같고 또 한편으론 님의 생각과 같기도 한, 그러니까 신영복 선생님의 생각과 님의 생각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 행복지수가 1위인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입니다.
  가난 때문에 불행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까뮈도 말했습니다. "    - 천양희 -

천양희 시인의 책을 읽다가 '그래..정말 그래...'하고 밑줄을 그었던 대목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가난 때문에 생활고 때문에 이틀에 한 가정 꼴로 가족이 동반 자살을 한다는 이 염치없고 한심하고 부끄러운 나라에선 이런 생각도 사치스러운 생각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4백만 신용불량자들이 제발 먹고 살 일자리를 달라고 아우성이고, 비정규직이 노동 인구의 절반이 넘고,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가구가 150만에, 전기세를 못내 전기가 끊긴 집이 이미 백만 가구이며, 이런 조건에서 밥을 굶는 아이들이 2백만이다. 온 백성의 빚이 4백조원에 이르는데도 다른 한편으론 가진 자들의 부동자금 4백조원이 오로지 이윤 남길 곳을 찾아 부동산이며 미국 증권가를 떠돌고 있는 이 천박한 사회에서 가난한 우리의 미래를 저당 잡아 저희네 현재를 사는 이 야만적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아, 우리는 언제쯤, 언제쯤 이 땅에 살면서,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마음만은 풍요롭고 행복하다고 그렇게 느끼며 살 수 있을까.      2003. 11. 13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25. "공산주의자의 이론적인 명제들은 결코 이러저러한 세계 개혁가에 의하여 발명 또는 발견된 이념이나 원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명제들은 현존하는 계급투쟁, 우리의 눈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역사적 운동으로부터 솟하나오는 실제적인 관계들을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이들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는가는 <<선언>>자체가 말하고 있듯이 어디서나, 언제라도 당면하는 역사적 조건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마르크스 / 공산당 선언)

"하지만 역사에서의 발전이라는 일반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제 자신 상당히 유보적인 입장입니다. 나는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론에 대해 최근에 제기되는 회의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르크스저작도 중요한 내용은 자본주의 분석이었지 어 떤 대안에 관한 구체적 담론은 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어떤 원칙에 지나치게 매달리 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제 자신부터 역사의 전개과정을 법칙성에 귀납시키는 관 점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신영복)

==> 따옴표로 인용된 선생님의 말은 맑시즘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그런 뜻에서 인용한 것 같은데, 제 생각엔 오히려 님께서 님이 신주단지처럼 여기는 그 맑시즘에 대해, 그리고 모순과 부조리 가득한 이 사회와 세계에 대해 보다 깊이 있고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꼭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부디 진지하게 새겨 들으셔서 지금보다 한단계 더 성숙한 인식의 지평을 열어가시길 바랍니다.



26. '강자의 논리', 강자로 하여금 그러한 논리를 주장하고 관철하게 강제하고 강제할 수 밖에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운동법칙' 중의 하나입니다. '법칙'과 '강자의 논리'가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 것은 형이상학 적입니다.

==> ‘법칙성에 앞서 강자의 논리라고 한’ 선생님의 말씀은 ‘법칙’과 ‘강자의 논리’가 분리되었다는 님의 주장과는 좀 다른 듯 합니다. ‘강자의 논리’에 좀더 방점을 찍고 싶었던 표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27. 신영복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반혁명에 의해 변질된 국가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의 초보적 단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가 생산력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신영복의 지적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생산력 경쟁에서 패배한 것은 '반혁명에 의해 변질된 국가자본주의'일 뿐입니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생산력 경쟁에서 패배하는 따위의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주의 질서는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완전히 전개된 후에라야만 전지구적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전망입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의 질서는, 자본주의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방해하게 되는 조건에서야 도래한다는 것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전망입니다.

==> 신영복 선생님은 ‘현실 사회에서 존재했던 사회주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님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다보니 이런 난센스 같은 주장을 하게 된 듯 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말했던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는 그 사회주의는 님의 표현으로 하면 ‘반혁명에 의해 변질된 국가자본주의’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게 자본주의와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건 님도 27번 주장에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영복 선생님이 틀린 말을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서 신영복 선생님이 '과학적 사회주의'와 '반혁명에 의해 변질된 국가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의 초보적 단계'를 구분하지 못한 게 아니라, 님이 ‘사회주의’란 용어를 두 가지 개념, ‘과학적 사회주의’와 ‘반혁명에 의해 변질된 국가자본주의’로 구분해서 쓰다가 저지른 난센스라는 게 더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20세기에 몰락한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를 ‘반혁명에 의해 변질된 국가자본주의’라고 해석하는 것도 논란이 될 수 있는 말인데 이건, 논외에 해당하니 그냥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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