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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제가 당신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야유와 조롱을.. , 또다른 마을 사람들로부턴 상찬과 갈채를 동시에 받고 있는 한 사람에 관한 소박한 스케치입니다.

그의 이름은 당신도 이젠 익숙해졌을 "칼 맑스"라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 사람을 스무살에 처음 만났고 마흔이 넘은 지금도 가끔 만나고 있으며 자연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삶이 허락된다면 읽을 수 있는 여력이 있는 한 생의 마지막 날에도 그를 만나고 싶습니다.

21세기를 살고있는 제가 동시대인들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며 여전히 그와 조우 하고자 하는 까닭은 그가 탁월한 계시를 안겨주는 예언가이기 때문도 아니고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약속해주는 신통력을 발휘하는 점성술사이기 때문은 더욱 아닙니다.

제가 그를 잊지 않고 늘 곁에 두고자 하는 이유는 내가 살고있는 세상이 여전히 그가 정밀하게 판독하고 철저히 해부하고자 했던 자본주의라는 엔진으로 움직이는 사회이기 때문이며 그가 보았던 비참과 우울이 세계 도처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 오늘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축의지의 해체(맑스는 종종 새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을 건축의지로 표현하곤 했었지요)를 이야기하는 담론들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제가 굳이 맑스를 다시금 이 자리에 생환시키고 싶은 절실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맑스의 삶과 그의 고전들을 통하여 우리 삶의 조건들을 역사적 맥락(현재와의 연관속에서)에서 좀더 명징하게 돌아볼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에서 연유합니다.

이제 우리는 맑스를 그 자신에게로 돌려주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를 우리는 신화와 우상의 구름에서 불러내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그를 향한 편견과 폄훼의 늪에서 건져올려야 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맑스는 스스로를 이데올로그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가 비판하는 모든 이들을 이데올로그라고 조롱하고 규탄했습니다. 맑스의 후예들이 맑스를 공산주의 이데올로그로 만들고 그의 저작을 극히 일부만 도식화하여 성서처럼 신성시하고 정통과 이단을 규정하며 숙청하고 축출했습니다. 그러는동안 그들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팠습니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본](Das Kapital/Capital) ; 상품의 비유에서 맑스가 그토록 비판했던 물신숭배가 바로 그러한 허위의식(Ideologie)을 겨냥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칭 맑스의 후예들은 또한 망설임 없이 '정치경제학'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맑스는 단 한번도 '정치경제학'을 한 적이 없으며 그가 수행한 작업은 [자본]의 부제에서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정치경제학 비판"이었으며 그에 대한 "요강"을 저술한 것입니다. 이는 얼핏 보면 단어 하나 차이에 불과한 듯 보이지만 그의 [자본]이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인식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노동가치론(설)과 잉여가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스미스나 리카아도의 연장선에서 잉여가치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의 이론을 정면에서 극복하는 지평에 서있는가를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한 관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에 관한 좀더 설득력있는 분석을 보고 싶다면 맑스 코뮤날레에서 발표되었던 조정환과 김경수의 논쟁이나 수유+너머의 이진경이 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참조하시길 권합니다.

이른바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의 축약과 건너뛰기, 그리고 맥락을 상실한 발췌의 흔적들은 논자들 사이사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에 관한 아주 명료하고 설득력있는 칼럼 한편을 소개합니다.
필자에게 사전에 동의를 구하지 못해 실명은 거명하지 않겠습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와 갈리아의 수탉>>

  박종철출판사에서 출간한 [맑스엥겔스 저작선집]의 첫 관문은 <헤겔 법 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이다. 전집도 아니고 선집이나마 독파하겠다고 결심한 이들에게 그것은 매우 낯설고 당혹스러운 텍스트일 것이다. 이 미완성 저작의 <서설>로부터 그것의 직접적 비판대상이었던 헤겔의 《법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피는 것은 단지 지적 사치일까?  

  80년대 대표적 사회과학출판사 ‘녹두’의 《세계철학사》를 한장 넘기면 “모든 理論은 灰色이며 오직 永遠한 것은 저 푸른 生命의 나무이다”라는 경구가 나타난다. 책은 십년 전에 읽었으나 이것의 연원을 알게 된 것은 겨우 일년 전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학생들을 향하여 “모든 이론은 잿빛이며, 둘레에 무성한 것은 황금나무”라고 말한다.  

  헤겔은 《법철학》의 <서문>에서 “철학이 회색에 회색을 칠한다면, 생의 한 형태는 노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회색에 회색으로써는 생이 갱신될 수 없고, 다만 인식될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어둑어둑한 황혼에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라고 쓴다.  

  괴테의 뜻이 《세계철학사》에서 각인되던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공식’들과 헤겔의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정신’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헤아리게 되었다. 철학자는 세상의 사태가 마무리 된 다음에야 자신의 사유를 벼린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뒤에 가서 해석만 할 뿐이라고 자괴하는 이들을 관념론자나 사변철학자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자의 ‘관조’를 냉엄한 현실 인식을 위한 이성의 ‘통찰’로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간 사람은 다름아닌 맑스였다.

  이미 경험한 현실에 대해서 냉철하게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을 때 철학은 해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무기가 된다. 그러하기에 당시 낭만주의자들의 주관주의적 인식을 거부하던 맑스가 헤겔로부터 변증법의 핵심을 읽어내고 실천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올빼미는 밤에야 활개친다고 조롱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사냥이라는 실천, 즉 자신의 임무를 시작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마치 장자의 ‘붕정만리’처럼 헤겔이 절대정신으로 자신의 여정을 마무리하였기에 그의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이론에 이론을 덧칠하지 않고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런 맥락을 빠뜨린 채,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11>로 곧장 치닫는다면 우리는 맑스의 결론만을 얻게 될 뿐이다.

  맑스는 <서설>에서 “모든 내적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독일 부활의 날은 갈리아의 수탉의 울음 소리에 의해 고지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철학을 집대성한 헤겔의 마무리와 출발을 상징한다면, ‘프랑스의 수탉’은 역사의 신새벽을 알리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가리킨다. 헤겔을 지양하기 위해 청년헤겔학파는 ‘행동철학’으로 관심을 돌렸고 그 가운데서 가장 치열했던 청년 칼 맑스는 천재적인 혜안으로 혁명의 주체 프롤레타리아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문득 이 칼럼을 읽게될 당신의 표정이 궁금해집니다. 부디 이 글이 당신의 독서를 방해하지 않고 맑스의 철학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좋은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각난 김에 적지 않은 독자들이 빠지곤 하는 오독(誤讀) 내지 남독(濫讀)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진술하는데 이 문맥을 종교인들과 무지한 맑스주의자들은 대부분 맑스가 종교를 비난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맑스는 종교가 인민에게 아편처럼 위안을 주고있는 현실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이는 아마도 신랄한 이중비판이며 그 방점은 오히려 인민을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당대 자본주의 현실을 겨누고 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와같이 맑스의 저작을 독해하는데 있어서 성실하고 침착한 태도만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통해 기대 이상의 지적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으며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적 통찰에도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칼럼의 필자는 우리에게 아주 색다른 '맑스읽기'의 지혜를 전해주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맑스의 [자본]을 읽을 때에 '자본'을 주인공으로 '노동자들'을 중요한 인물로 배치한 일종의 "소설" 형식으로 이해하면 [자본] 독해의 아주 유용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수많은 풍자적 표현과 패러디로 가득한 본문들, 시적인 은유가 풍부한 문학적 표현들, 그리고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작품에서 아무런 설명없이 가져온 인용구들을 온전히 음미하는데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자인 김수행 교수는 '과학(science)'을 중시하여 [자본]에 별처럼 반짝이는 문학적 표현들의 번역에는 소홀하며 심지어 영어판 Capital(Penguin)에 있는 것들도 빠뜨리거나 축약한 채 번역하는 등 맑스의 텍스트에 온전한 생명을 부여하지 못하는 학적 풍토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자본]을 대하 장편소설로 비유할 때, 비록 주인공은 '자본'이지만 그가 어떻게 성장하고 과욕을 부리다가 끝내 파멸하는지를 추적한 일종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역사소설, 시대소설의 측면도 찾아볼 수 있는 루카치 식으로 말하면 19세기 말에 풍미했던 '비판적 리얼리즘'에 해당하는 장대한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참고로 맑스 자신은 [자본]을 가리켜 "예술적 총체"라고 자평하였으니 Dickens의 소설들과 맑스의 [자본]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그 당시 영국 자본주의의 현실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둘 다 Bentham과 그 시대의 상식에 대한 비판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으니 디킨스가 소설로 한 작업을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분야에 적용한 것이지요.

제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안에 미처 필자의 동의를 얻지 못한 글을 인용하는 것은 이보다 더 실감있게 그의 진면목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적절한 길라잡이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아울러 맑스의 혜안이 반짝이는 저작들을 경제학 이론서라는 협소한 틀에 가두고 단일한 하나의 관점만을 부각시키려는 일련의 경향들에 대한 경계의 의미와 동시에 깊이있고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과 문화적 향기를 지닌 근대지성으로서의 맑스를 새롭게 바라보는 유의미한 계기를 마련하고 싶은 의지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맑스를 보는 눈과 그와 관계 맺는 무늬들은 아주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맑스를 헌신적인 혁명가로 생각하거나 피도 눈물도 없는 과학적 이론가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를 교양이 넘치고 유머를 잃지 않으며 유쾌하고 낙천적인 사람으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프랜시스 윈이 보는 맑스가 바로 그런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사야 벌린은 좀더 학자풍으로 본다는 군요(저는 아직 벌린의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부분은 다른 분의 촌평입니다.)

아무튼 맑스는 당대까지 유럽의 문명이 형성해온 다양한 학문적 문화적 교양을 젊은 시절 풍부하게 익힌 사람입니다. 그리고 늘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데 정성과 시간을 쏟았습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온고지신의 전형을 유럽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맑스를 추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는 읽고 쓰고 토론하는 것을 평생 멈추지 않았습니다.

맑스를 읽는 눈, 그의 정신과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교조적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전들을 통해 배운 지혜와 당대 현실의 문제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검은 흙을 파헤쳐 광맥을 찾아내듯 진실을 읽어내려는 열린 자세 등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고전을 읽고 다양한 예술작품을 향유하는 것은 반드시 특정한 목적에 복무하는 것으로 제한되어선 안되며 민중이 저항정신을 잃고 지식인이 radical한 태도를 상실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맑스가 보편적 교양을 적셔주는 우물이 되어 현대의 고전으로 음미되는 현상은 지극히 권장할 만한 일이라 믿고 싶습니다.

맑스는 서양 문명이 수천 년간 축적되고 도달해온 근대의 지성, 지식, 지혜를 체계적으로 익힌 "최후의 르네상스인"이었다는 어느 진실한 벗의 음성을 조심스레 전하며 이글을 마치려 합니다.

이 가을!  시간과 공간의 축을 넘어서 삶의 진실이 배어있는 인간의 숨결을 그리워하는 당신과 내가 더불어 맑스를 얘기할 수 있어 참 따뜻한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녁에 브레히트는 내가 정원에서 [자본]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이 이제 와서야 맑스를 읽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더구나 사람들이 점점 더 그를 거론하지 않는 이 마당에서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해 나는,
   "많이 거론된 책은 그것이 일단 유행이 지나간 후에 읽기를 좋아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 1938년 7월 25일, Walter Benjamin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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