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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6.09.09 03:38

거짓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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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릴 때 들었던 얘기들 중에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새빨간 거짓말들도 많았다는. 책이라는 것이 있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많이 읽어야 한다고, 그래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했다. 책 속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 얘기들이 들려주던 한결같던 가르침들이라는 게, 물론 아이들 수준에서, 대개는 몇 가지로 좁혀지곤 했다. "착한 사람들은 복을 받는다" 든가, "나쁜 사람들은 벌을 받는다" 든가, 아니, 이런 뻔한 얘기들보다는 뻔하지 않은 거짓말의 파괴력이 훨씬 강력하다. 예컨대 "어린이는 꿈을 가져야 한다" 든가, 혹은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 든가 하는 말들은 그 교묘한 설득력 때문에 더욱 무서운 말들이었다.

이런 생각도 한다, 자본주의는 무슨 경찰과 군대 같은 폭력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환상과 꿈'으로 하여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어릴 적 일요일 아침마다 즐겨봤던 만화영화 중에 <은하철도 999>가 있었다. 그 속에서 철이와 메텔은 우주 공간 속을 내달리는 증기기관차를 타고 별들을 여행한다. 그런데 그 여행은 세월 좋은 유람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 여행'이었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며 승차권을 구했던 철이엄마의 유언은 "반드시 안드로메다에 가서 기계인간의 몸이 되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연히 완행열차에 올라탔던 철이는 피할 수 없는 여행을 거치면서, 마치 어린왕자처럼,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숱하게 만나고 만다. 결국 철이는 안드로메다에 도착해 자신의 '꿈과 목표'를 거부한다. 영생과 불사의 기계인간이 되는 꿈을 거부한 철이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제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그가 '목적을 배반하는 여행'을 해냈다는 결말 자체는 어린 내게 분명히 충격이었다.

거짓말은 교묘하고 완벽할수록 치명적이며 위험하다. 게다가 다수를 속인 거짓말은 그 자체가 이미 강력한 위력을 행사하는 물질적 힘이 된다. 모든 거짓말은 속는 자의 눈을 가리고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착각하게 만들거나 호도한다. 아니, 더욱 단순하게 말해 모든 거짓말하는 자의 목표는 단순하다. 다름 아닌, 거짓말하는 자의 이익을 위해서다.

제대로 속은 자는 결코 자신이 속고 있는 거짓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이미 익숙한 구도다. 소수 유사 종교의 독신자나 한낱 다단계 판매조직의 하부구성원에게서도 어김없이 확인되는 사기술의 기본 법칙이다. 만일 이들에게 동료가 생기고 이러한 동료의식이 조직의 구성으로 발전해 재생산의 교육과정까지 갖추게 된다면 더 이상 단순하지 않은 스토리가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결코 히틀러의 파시즘이나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론, 그리고 황우석 지지의 국민여론 등을 허투루 웃어넘길 처지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내가 지난 시절 그토록 안주삼아 조롱하고 야유했던 자본주의의 진짜 힘이란 이러한 환상과 꿈을 생산하고 유포하며 파종하고 재생산해낸 데에 있지 않을까? 나는 과연 '속은 자'가 정말 아니었을까? 나는 '안 속아넘어간 자'랍시고 속아넘어간 사람들을 끌끌 혀를 차며 개탄하거나 안쓰러워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는 '이미 속아넘어간 자'의 전형적인 심리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무슨 상품을 준다고 응모하라는 행사에 내 이름을 써 넣어본 기억이 없다. 남들 한 번씩은 해봤다는 '로또'에도 손사래를 치기 일쑤였다. 어쩐지 거대한 꿍꿍이의 굿판에 휘둘리는 말판이 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수학적 확률이 어떻고 결국에는 내 이익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익에 한몫 보태주느니 하는 잘난체를 버무려 나는 환상이나 허위의식을 경멸하고 비웃어대며 우쭐한 마음으로 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로또'나 '월드컵'이나 '바다이야기'에 넋을 앗긴 사람들을 전처럼 손쉽게 쳐다보지 못한다.

몇 페이지의 비판사회이론을 읽고 "자본주의는 환상을 창조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나 역시 그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고 말하기란 고통스러운 일이다. 예컨대 내가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아가는 사교육 시장의 전형적인 논리는 '서울대'라는 환상이다. 그러나 "인생역전"이라는 꼬드김에서 '서울대'와 '각종 고시'와 '승진'과 '연봉 인상'과 '더 큰 집'과 '더 비싼 차'와 '로또'의 차이점을 나는 손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논술강사인 탓에 대학입시라는 전쟁터에서 나는 교실과 칠판 사이를 누비고 원고지의 네모 칸 사이를 누비고 아이들의 눈물과 한숨 사이를 누빈다. 시험을 목전에 둔 아이들은 이천자 원고지 위에 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린다. 그 고통이 '합격'이라는 축보가 되기 위해 나도 아이들도 다 같이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야바위 판에서 병졸로 똥줄이 타게 뛰어다녔으면서도 그 동안 나는 백화점 응모함에 영수증 집어넣기조차 거부해온 것이다.

지난 8월 중순, 드디어 7년만에 성공회대 사회과학부를 졸업했다. 입학하기 전부터 걱정했던 등록금과 생활비 마련의 어려움은 늦깎이 대학시절의 내내 나를 괴롭혔다. 결국 휴학과 복학을 반복해가며 꼬박 7년만에 한 졸업은 고스란히 학원강사 7년 경력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학원계는 끊임없이 명문대 컴플렉스를 자극해서 작동하는 기계장치다. 그 '명문대의 꿈'을 부풀리는 공장에서 나는 성공회대라는 내 학교 이름을 자랑스레 밝히기 어려웠다. 때로 학원 아이들을 성공회대 교정에 데려와 놀기도 했지만 우선 학원 자체가 그런 내 행동을 싫어했고 나날이 나는 주눅이 들거나 위축이 되곤 했다.

졸업을 한다고 사람들은 이제 뭘 할 꺼냐고 물어댔다. 나이도 서른셋, 겨우 대학을 졸업한 나는 그들의 반복적인 심문 앞에서 더더욱 쪼그라들었다. 나는 마치 무슨 피난처라도 되는 듯 '대학원'을 남발했다. 어쩌다 누구는 자연스레 "그럼 서울대 대학원 가야지!"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흔들, 했다.

차별에 반대하고, 불합리에 분개하고,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떠들어대며, 이 시스템에 동의할 수 없다지만, 나는 '서울대'라는 낱말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전전긍긍했다. 과연 나는 정말로 '속은 자'가 아니었는가? 버젓한 결혼에 두세돌인 아이를 데리고 해외여행을 다녀오며 근사한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최소한 연고대 출신의 동갑내기들 앞에서 나는 구두코만 내려다보는 열패감과 쓰라림을 겪었노라고 말하기엔 너무 나약하고 어리석은 것일까?

그러던 와중에 하늘도 어둑어둑한 모교의 교정에서 선생님의 은퇴기념 콘서트가 였렸다. 결코 반갑지 않은 손님들과 지나치게 방만해진듯한 행사의 뒤안에서 선생님이 무대에 오르셨다. 오늘 내가 여기를 찾은 유일한 목적이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먼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성공회대학교는 서울에서 먼 곳에 있습니다. 이 먼 곳까지 찾아오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 학교는 단지 공간적 거리만 먼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중심적 가치로부터도 멀리 있는 학교입니다. 그래서 성공회대 졸업생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각별한 것입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주 이름인 "처음처럼"이 떠올랐다. 성공회대에 입학하던 때, 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얼마나 마음으로 새기며 기뻐하고 들떴던가.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나는 그 동안 이 거대한 거짓말들의 은밀한 가랑비 속을 거닐어왔다. 그러나 나쁜 것은 가랑비가 결코 아니다, 그 가랑비를 업수이 보고 오만방자하게 자신을 방치해온 나 자신인 것이다.

누가 무슨 거짓말을 해대도 현재 한국사회는 분명히 계급사회다. 이 계급사회는 '환멸의 90년대'를 건너오며 한 층 더 강고해지고 정교해졌다. 이제 더 이상은 소 판 돈을 훔쳐서 대재벌이 될 수 없으며, 판 자체가 이미 국경을 넘어 전지구적으로 커진지 오래다. 당연한 말이지만, '서울대'는 선명한 거짓말이다. 서울대니, 고시패스니 하는 거짓말의 진정한 목적은 두말할나위 없이 이 시스템의 유지와 작동에 있다. 그리고 그것의 진정한 키워드는 학벌이나 직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언컨대 '계급'에 있다. 그러나 거대하고 정교하며 치밀한 이 거짓말들의 체계는 이 시간에도 수 없이 눈먼 자들의 "나만은!"이라는 환상을 통해 어김없이 건재하고 있는 중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난삽한 글의 핵심어구는 '학벌주의 비판'이 아니라 '허위의식'이다. 여기서 '서울대'를 '고액 연봉'이나 '부동산 재벌'이나 '고소득 전문직'이라는 낱말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나귀를 전진시키는 코앞의 당근의 이름이야 무엇이든 상관 없다. 문제는 그렇게 짜여진 구도에서 열심히 당근만을 노리고 전진하는 나귀 일생의 운명이다. 늙고 비루한 나귀는 제 등에 올라탄 자를 보지 못하고 오직 흔들리는 당근에만 매혹당한다. 어쩌면 어떤 나귀에게 당근은 '신념'이자 '신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근은 당근이고 나귀는 나귀이다. 설사 나귀가 당근을 문다 해도 나귀 주인과 나귀의 자리는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아이들에게 "이겨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지면 어때?"를 말할 수는 없는지, "꿈을 가지라"고 말하기보다는 "오늘을 소중히 하자"고 얘기할 수는 없는지, "잘나고 멋지게"보다는 "참되고 바르게"를 나눌 수 없는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자"가 아니라, "어떤 목표"인지 함께 생각해볼 수는 없는지. '바다이야기'는 생각보다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적어도 내가 이 시스템을 지지하거나 인정하거나 승인하지 않는 한, 이 시스템을 가리우고 나를 호도하며 궁극적으로 이 시스템의 이익에 복무하게 만드는 모든 거짓말들에 대해 나는 늘 눈밝아야 할 것인다. 왜냐하면, 나는 성공회대학교의 졸업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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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벌써 2006년입니다. 숲에 제가 들락날락한지도 벌써 7년이 되었네요. 지난 몇 년 동안 별 다른 글을 올리지는 못했어도 숲에는 꾸준히 들어와 눈팅하곤 했습니다. 현원이 형이나 복희 누님 등 간만에 뵙는 너무 반가운 분들도 계시네요. 그 동안 잊지 않고 살고 있기는 한데 부끄러움이 많아 선뜻 자신은 없었어요. 문득 지난 홈페이지에 가보니 제가 2000년 2월에 썼던 부끄럽고 철모르는 글들이 아직도 남아 있더군요. 생각해보면 산다는 일은 아직 나이 어린 제게도 상처 모으는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들이 힘이 되기도 한다고 믿습니다. 선생님에 관해 아래 어떤 분께서 쓰신 글에 관해 저 역시 하고 싶은 말이 수북하지만 이미 많은 분들께서 충분히 말씀하셨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또 우리 숲에 소중한 기회였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졸업을 했어도 계속 선생님을 뵙고 싶기도 하고 이곳에 계신 몇몇 분들께는 과분한 애정을 받기도 하여 부끄럽지만 다시 숲 속을 거닐어도 될까 고민 중입니다. 하지만 만일 허락된다면 예전처럼 천방지축으로가 아니라 조심스럽게 천천히 모임과 만남에 기웃거리고 싶습니다. 콘서트 때나 고별강연 때 반가운 분들 간만에 많이 뵈었는데 함께 긴 시간 가지지 못하고 헤어져 많이 아쉬었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밤바람 차거운데 건강하게 가을 시간들을 향유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진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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