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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렸을 때 들었던 거짓말로, 사람은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그 말에, 그 꿈이 과연 어떤 꿈이냐를 되물어야 한다는 지난 생각에 덧붙여,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위해 지금 버젓이 있는 오늘을 치루어내는 일이 정당한지 새삼 질문해본다.

요즘 두근대며 읽고 있는 만화들 가운데, <슬램덩크>의 작가, 다께히코 이노우에의 <배가본드>와 <리얼>, 그 <리얼>에서 섬짓하게 마주친 장면 하나, 이 만화의 그야말로 '한심'한 주인공 아무개는 별 다른 꿈도 희망도 없이 무슨 이사짐 나르기 같은 아르바이트 중이다. 같이 일하는 한 녀석은 내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산다. 어느 날 문득 '이어폰'이 '한심이'에게 실실 웃어가며 묻는다. "너, 꿈은 있냐?" 한심이가 없다고 한 뒤, "그러는 넌 있냐?" 라고 묻자 이어폰이 대답한다. "있지, 난 밴드를 할 꺼다. 그거 하려고 이 알바를 하고 있지" 한심이는 덤덤하게 대답한다. "난 꿈 같은 건 없지만 오늘을 살고 있다. 네가 네 꿈을 위한답시고 짓밟아버리고 있는 지금을 말이지"

그 대사를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나는 늘 당장의 현실보다는 꿈이나 희망 같은 말을 좋아했다. 지금의 나를 제대로 쳐다본 일은 사실 별로 없었다. 나는 늘 변하고 싶다며 중얼거렸고 항상 내 지금을 한사코 부인, 외면했으며 늘 다른 나, 내일의 나, 내 마음 속에나 살고 있는 나를 그려대고 지웠다가 또 그리곤 했다.

세월은 흘러갔고 변한 건 없는데 남은 건 있다. 무수히 남아 있는 내 지난 날의 '지금' 더미들, 돌이켜보면 결국 남은 것은 어딘가의 주변만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던 어지러운 기억들, 늘 마음에 들지 않던 오늘들, 앉지 않고 서 있지도 못하던 시간들, 창문 너머로 저 너머 웅성대던 사람들 풍경을 쳐다보면서 누구 하나 쳐다봐주지 않는데 저 혼자 포즈 잡고 있던 우습던 내가, 갖가지 공간에서 갖가지 풍경으로 이렇게 저렇게 남아 있다.

무엇을 꿈꾸었는가 하는 문제만큼, 꿈 꾸는 일을 위한다고 지금을 소비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는 일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왜 나는 이제서야 아프게 깨무나. 순간의 기울기가 곡선 전체의 기울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미분학의 명제는 이미 그 자체로 인생론이었는데 나는 수학에도 꽝이었고 인생에도 꽝이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소설의 작가 박민규의 말로,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혹은 "시간은 흘러넘치는 것이다." 또는 "세계는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해 나가는 것이었다." 소설 속 어느 주인공은 '삼미의 야구'를 이렇게 말했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고.

작년 이맘때였나, 어느 논술학원 회식자리에서 나는 대안학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물었다. 아무개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낙오자들이죠." 그 때, 나는 비겁하게 가만히 있었다. 그 학원에서 '프로'니까 양복을 입어야 한대서 나는 양복을 입고 출근했고, 사원증 같은 것을 목에 걸고 교실에 들어섰다. 아이들은 그걸 왜 거냐고 물었다. 역시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소설 속에서 대기업에 다니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쁜 친구를 보며 아무개는 이렇게 한탄한다. "어쩌다 프로 같은 게 됐지?"

일주일에 한 번 마포에 있는 대안학교에 나가 아이들이랑 중학교 <지리>를 가지고 놀고 있다. 게임을 하면서 아이들과 술래를 정하고 문제를 풀다가 설명도 하고 하면서 그 동안 학원에서 아이들과 씨름해오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에서 사회 수업을 해본다. 이게 나의 지금이다.

단지 먹고 살아야 해서 시작했던 학원생활이었는데 나는 지난 7년 간을 살다가 그만 아이들과의 시간들로부터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단지 다른 삶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인데 사실 나의 지금은 아이들과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수업 준비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낄낄 대고 무슨 일이 생긴 아이와 가만가만히 마주 얘기하고 그러다 아이한테 고맙단 문자 한 통에 괜히 부끄럽고 하면서 나는 나도 몰래, 어느 새 지금을 살고 있었다.

많은 꿈이 있었다. 많은 몽상과 환상과 그림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사실 지금을 외면하고 매정하게 방치하며 살아왔다. 여기에서 '지금'을 '현장'이라 바꾸어 말한대도 아무 상관 없으리라. 찌루찌루와 미찌루였나? 파랑새가 온 세계 어디에도 없었는데 사실은 자기 집 뒷 마당에 있었다는 이 섬뜩한 이야기는 사실 내게 "이것은 너를 두고 하는 얘기"였던 것이다.  

최근에 다 늦게서야 '교사'를 생각해보고 있다. 아이들이 나를 '선생님'으로 불러주는데, 뭐 어차피 적당히 불러줄 호칭이 빈약해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사람은 불리우는 이름대로 된다고, 나는 선생님이라는 내 칭호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강박에 시달려 덜 망가진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내가 '선생'이라니, 이빨 닦다가도 웃을 일이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 사람들에게 사실 삼천포는 그래서 더 없이 소중한 곳이다. 하물며 나처럼 잘 나가지도 못한 사람에게라야. '여행의 역설'이라고 장자의 말 맞다나, 길이란 이미 있어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니다보니 길이 되는 것이다. 길 가면서 길 만든다고, 삼천포는 탈선이 아니라 생성이며 호도가 아니라 창조인 것, <은하철도999>의 철이 역시 기계인간이라는 '주어진 목표'를 거부하고 삼천포로 빠졌으니까.

지금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인생은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인생 자체가 이미 목적이다. 아니, 누군가의 일침처럼, 목적과 수단은 분리불가능한 일자(一者)다. 목적과 수단은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슬램덩크>의 노감독은 자신의 농구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농구는 여전히 제미나게들 하고 있나?" 우리는 어느새 노감독님이 말씀하신 대 전제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떠야 한다. 눈 감고 귀 먹고 스스로를 프로라 마인드콘트롤하고 뒤쳐진 이들을 경멸하며 살아가는 삶이 그렇게 스스로를 좀먹고 망치면서 전락하는 동안 그의 지금은 살살 증발하고 있다. 지나간 지금들과 남아 있는 지금들, 인생에서 내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다만 '지금' 뿐이다. 나는 내가 살며, 나는 오늘을 살며, 나는 인생 자체를 즐기고 누린다. 나의 주인됨을 가로막고 획책하며 홀리는 모든 것들과 맞서기 위해 나는 눈을 떠야 한다. 프로는 아름답다? 부디 천년만년 아름다우시길! 나는 오늘을 따라 나의 삼천포로 간다네. 룰루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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