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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8 01:24

도덕에서 과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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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최장집의 일관된 고민은 다음과 같다. "전세계적으로 매우 뛰어난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보유한 한국의 민주정부는 왜 실질적인 민주주의 구현에 처참히 실패했는가?" 최장집의 두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집요할 만큼 이 물음을 따라 이천년대의 한국사회를 면밀하게 검토한다.

누구나 얼마간은 알다시피, 식민지와 분단, 전쟁과 독재정권,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다양하기는 하나 사실은 단순한 대결들의 전선이 이어져 왔다. 거기에는 시기마다 각종 부역자들이 있었고 동시에 각종 저항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최장집은 이 일련의 싸움들을 분석하면서 일견 쌩뚱맞게 느껴질 수도 있는, '도덕주의'의 폐해를 드러낸다.

사실 언제나 운동의 기본 이미지는 '정의'였다.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의혈과 희생이 시대마다의 참혹한 싸움판에서 이렇게 저렇게 나부꼈다. 비록 극악한 적은 지금 저토록 강고하지만 내일, 우리는 이길 것이라는 다짐은 단지 신동엽의 노래만은 아니었다. 세상을 정의와 불의로 나누고 스스로를 정의의 사도로 자칭하여 옳고 그름의 전선을 긋는 모습은 그러나 단지 민주화 운동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는 굳이 유럽의 종교전쟁까지 떠날 필요 없이 모든 나라, 모든 전쟁마다 견지하고 있는 기본 포맷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도덕은 본질이기 어렵다. 도덕이 본질이기 어렵다는 이 말은 도덕이 결국에는 현상과 상황이 아니라 개념과 관념이라는 도덕 자체의 숙명 때문이다. 누가 무엇이라 반박할지라도 결국 도덕은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정당화는 어떤 소피스트의 말처럼 궁극적으로 "강자의 것"이다. 도덕은 같은 편이 공유하고 있는 정당화와 합리화와 접착제지만 다른 편에게는 한낱 조롱과 환멸과 혐오의 꺼리이기 쉽다. 도덕은 대부분 단상 위의 교설이자 행사장 속 현수막으로 남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소설가 김훈은 어느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의로운 언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아니다. 지금 정의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약육강식의 질서를 완성해 가는 이 합리주의의 정글 속에서 정의로운 언어는 쓰레기처럼 넘쳐난다."

게다가 도덕이란 '양날의 검'이기까지 하다. 적의 피를 흘리게 하는 강력한 무기인 동시에 언제든지 나의 피를 노릴 수 있는 지뢰이기도 하다. 또한 도덕은 자연스레 연민과 시혜로 연결된다.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을 건드리는 '도덕의 전략' 때문이다. 불쌍하다는 느낌으로 시작된 공명은 부끄러움을 자극하여 도와줘야 할 대상을 생산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진면목은 <사랑의 리퀘스트>에서 아낌없이 방영된다.

생각해보라. 우리의 70년대 노동운동사는 대부분 노동자들의 참상을 열거했다. 이러한 연민적 분노는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시혜적 운동과 '주체의 대상화'를 불러일으켜 왔던가. 그리고 90년대 이후 이러한 연민적 노동자관은 이제 자연스럽게도 "배부른 노동자들"을 개탄하게 만든다. 과거의 노동자들을 안쓰러워 했던 '도덕의 운동론'은 이제 현재의 노동자들을 되치는 자해적 무기로 전화된다. 노동운동의 숭고함과 비장함은 오늘, 조롱과 냉소로 변질되었다.

최장집의 다음과 같은 진단들을 보자.

"정치와 도덕은 다른 수준, 다른 영역에 위치한다. ... 정치에 대해 도덕주의적 접근이 강한 것은 사회경제적 갈등의 표출을 억압하고 자연히 갈등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배제하는 데 기인한다."

"운동에 진정으로 헌신하는 자는 도덕적 인간이 되어야 하고 역으로 도덕적 인간이 진정한 운동가라는 인식은, 자연스럽게 도덕적 인간만이 민주주의자이며 이들만이 민주주의를 잘 발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이는 민주주의를 제도와 매개된 정치적 실천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치와 규범적 차원에서 수용하는 태도이자 자세이다."

"도덕주의가 가져오는 민주적 과정에 대한 부정적 효과는, 그것이 현실을 현실 자체로서 접근하기보다 규범적으로 접근하게 함으로써 사회경제적 차원의 실질적 문제에 무감하게 만들고, 갈등과 권력 나아가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는 데에 있다."

최장집의 진단 속 핵심은 "도덕주의가 갈등의 실체를 은폐하고 배제하며 호도한다"는 것이다. 갈등론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기능론적 세계관에 함몰된, 다시 말해, 갈등과 대립을 부정적 개념으로 몰아내고 화해, 상생, 조화와 협조만을 편애하는 모든 논법과 인식론은 근본적으로 '순리'와 '이치'를 부르짖는 도덕주의의 포로에 다름 아니라는 말이다.

백주의 대낮에 드러나야 할 갈등은 가족주의와 온정주의의 세례 속에서 무책임하게 봉합된다. 대결이 존재해야 할 곳에 섣부른 화해가 종용되며, 그나마 그 아름다웠다는 화해조차도 훗날에는 영악한 사기술로 판별되고 만다. 곪은 곳은 눈부신 수술대의 불빛 아래서 벌려지고 도려내져야 하건만 '고통분담론'과 '후대의 심판론'으로 덧씌워져 가려진다. 생각해보면 자타칭 민주화 운동세력이라던 자들이 지난 십여년 벌여온 '용서 퍼레이드'의 본질은 그자들의 세계관과 도덕주의에 기인한 것이었다.

노동운동이 '이익집단 운동'으로 '전락'했다는 고발과 폭로조차도 도덕주의의 강한 악취를 뒤집어쓰고 있다. 지역이기주의라며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사진과 함께 기재된 이른바 '님비현상', '핌피현상' 역시 운동에 대한 도덕주의적 훈계주의의 당연한 귀결이다. 이러한 논법은 심지어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정당화 하고 숭배하는 우파적 논리에조차 맞지 않는다.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기적 욕망에 따른 사회질서를 주장한 시장주의와 의회주의는 논리적으로 모든 인간의 이익운동을 긍정해야 마땅하다. 이익집단 운동이 도대체 왜 나쁜가? 결국 도덕주의는 근대조차도 못되는, 전근대적 근대관인 것이다.

이제 세계관을 관념론, 유물론으로 대별하는 틀은 낡았다지만, 나는 여전히 유물론적 관점이 지닌 부분적 과학성을 적당히 신뢰한다. 도덕주의는 궁극적으로 관념론이다. 따라서 관념론자가 도덕주의자인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도덕주의자인 유물론자이다. 아니, 자신이 관념론자인지 알지 못하는 '자칭 유물론자'이다.

몇년 전에 친한 누나와 "운동은 도덕의 문제인가" 라는 문제를 놓고 다툰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당연히 운동은 도덕의 문제'라고 용감무쌍하게 주장했다. 정의와 불의의 문제이며, 옳고그름의 싸움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누나에게 운동은 '실존의 문제'였다.

여기서의 '실존'이 하이데거와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의 실존이 아님은 물론이다. 누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로또에 당첨되서 몇백억의 부자가 되면 당연히 한나라당을 지지할 거야." 운동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어디에 속해서 살아가는가 하는, 내 물적 토대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는, 처지와 형편과 상황과 계급의 문제였던 것이다.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장애인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흑인이 흑인이기 때문에, 노동자가 노동자이기 때문에, 성적소수자가 성적소수자이기 때문에, 이주노동자가 이주노동자이기 때문에, 피억압자가 피억압자이기 때문에 운동은 '운동'인 것이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흔히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팔짱을 끼고 올바른 판단자가 되려고 포즈를 잡는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 꼬락서니를 봤을 때 그 구경꾼의 논평가적 개폼은 역겨운 설레발에 지나지 않는다. 그 팔짱 낀 평론가는 결코 운동가가 아닌 것이다.

갈등은 '갈등'이고 억압은 '억압'이며 운동은 '운동"이고 도덕은 '도덕'이다. 이제는 생태주의와 탈근대론자들에게 만신창이처럼 공격 받은 말이기는 해도, 나는 이러한 운동론을 짚어내는 데 아직 '과학'만한 낱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근대성과 과학주의를 비판하는 모든 논의의 근본정신을 충분히 지지하고 존중하면서 나는 다시 '과학'이라는 말을 다소 조심스럽게 집어든다.

왜 싸워야 하는가? 싸우지 않을 수 없어서다. 왜 싸우지 않을 수 없는가? 도덕이고 나발이고 도저히 열 받아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싸움'이다. 이익을 보는 쪽에서 싸움을 피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손해를 보는 쪽이 싸움을 거는 것 또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1학년 1학기, 신영복 선생의 <사회과학입문> 첫 시간의 첫 수업은, "너는 누구 편이냐"는 것이었다. "산에 사는 사람은 해가 산에서 떠서 산으로 진다 하고, 바다에 사는 사람은 해가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진다 한다. 그들을 어리석다 하는 너는 지금 해를 어디서 보고 있느냐?" 어느 글에선가 썼듯이, 나는 나중에 선생께 질문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모든 입장을 긍정하는 얘기가 아닙니까? 전경련 입장과 민주노총의 입장이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다소 공격적이었던 내 질문에 선생은 다음과 같이 간결한 한 문장으로 답하셨다. "계급 간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나는 이제 겨우 겨우 선생의 말씀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단언컨대, 운동은 도덕이 아니라 과학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자의 운동은 운동이기 어렵다. 몸은 노동자인데 머리는 자본가인 자는 오늘도 신문과 방송을 읽으며 자본가의 눈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개탄한다. 누가 오늘날 감히 '계급'이란 어휘를 낡았다 일갈하는가? 추석이라고 고향에 갔더니 읍내 사거리마다 대문짝만하게 나부끼는 현수막은 <한미FTA 결사반대 - 영광군 농민회>였다. IMF 이후 심화된 양극화와 신자유주의의 영향권 아래 휘둘리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맑스는 어느 글에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너를 두고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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