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카피의 약속
「옹야」편雍也篇에 있는 다음 구절은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이 구절을 상품미학에 대한 반성으로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 君子 ―「雍也」
바탕이 문채文彩보다 승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승勝하다는 표현은 물론 지금은 쓰지 않지요. 그러나 과거에는 매우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말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승하다’는 말은 여러분의 언어로는 ‘튄다’로 해석해도 되겠네요. 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는 의미입니다. 행行과 언言, 사람과 의상衣裳 등 여러 가지 경우에 우리는 이러한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주장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말없이 어떤 일을 이루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보다 못한 옷을 입고, 그 사람보다 작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문文은 형식을 의미하고 질質은 내용을 의미합니다. 핵심은 내용과 형식의 통일에 관한 것입니다. 내용이 형식을 잃어버리면 거칠게 되고 형식이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면 공동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 시대의 문화를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광고 카피의 문장과 표현이 도달하고 있는 그 형식에 있어서의 완성도에 대하여는 누구나 감탄하고 있는 일이지만 광고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는 소비자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 사史하다(사치스럽다)고 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회운동 단체의 성명서처럼 도덕성과 정당성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주장을 전개하는 형식이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 언어를 적절히 절제함으로써 훨씬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을 떨어트려놓아 아쉬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지요. 질이 승하여 야野한(거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 같습니다만, 이 구절은 붓글씨 서체와도 관련이 없지 않습니다. 서예書藝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입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씨체를 민체民體다, 연대체連帶體다, 어깨동무체다, 심지어 유배체流配體라고도 합니다만 나로서는 매우 고민한 글씨체입니다.
나는 한글의 글씨체는 물론 오랫동안 궁체宮體와 고체古體를 바탕으로 하여 썼지요. 고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특히 궁체의 경우 더욱 그 특징이 쉽게 눈에 띕니다. 궁체는 궁중에서 궁녀들이 쓰던 글씨체에서 유래합니다. 여러분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귀족적 형식미가 추구되고 있습니다. 정연整然하고 하체下體가 연약하면서 전체적으로 정적靜的인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학美學을 가지고 있는 궁체와 고체는 시조時調나 별곡別曲, 성경구聖經句 같은 글을 쓸 때는 그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내가 자주 썼던 민요나 민중시를 그러한 형식에 담았을 때는 내용과 형식이 전혀 어울리지 못하였지요. 판소리 춘향가라든가 신동엽, 신경림, 박노해 등 민중적 정서를 담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글씨체였습니다. 마치 된장찌개를 유리그릇에 담아놓은 것같이 내용과 형식이 불화不和를 빚지요. 이러한 반성이 계기가 되어 글씨를 쓸 때는 항상 이 구절을 생각하게 되지요. 글씨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지지부진 답보하고 있습니다만 고민의 대부분이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여러분은 이 구절에서 상품미학의 허구성을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세대의 감수성이 상품미학에 깊이 포섭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세대뿐만 아니라 상품미학은 현대사회의 문화적 본질입니다. 상품미학이란 상품의 표현형식입니다. 상품이 잘 팔릴 수 있도록 디자인된 형식미입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물로 설명하고 이를 상품의 이중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상품은 교환가치가 본질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상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리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상품미학은 광고 카피처럼 문文, 즉 형식이 승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감성이 상품미학에 포섭된다는 것은 의상과 언어가 지배하는 문화적 상황으로 전락한다는 것이지요.
형식미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미의 끊임없는 변화에 열중하게 되고 급기야는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 상품 사회의 문화적 상황입니다. 상품의 구매 행위는 소비 이전에 일어납니다. 상품의 브랜드, 디자인, 컬러, 포장 등 외관 즉 형식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광고 카피 역시 소비자가 상품이나 상품의 소비보다 먼저 만나는 약속입니다. 광고는 그 상품에 담겨 있는 사용가치에 대하여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소비 단계에서 그 허위가 드러납니다. 이 약속이 배반당하는 지점, 즉 그 형식의 허위성이 드러나는 지점이 패션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반론이 없지 않습니다. 반품과 AS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자에 대한 보상입니다. 광고 카피의 허구성을 뒤집는 것이 못 됩니다. 더구나 사용가치를 먼저 만나게 하는 장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즉 상품 자체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며 더구나 상품 생산 구조 자체에 대하여 하등의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이지요. 결국 형식만으로 구매를 결정하게 하는 시스템의 보정적 기능에 불과한 것이지요. 반품과 AS 자체가 또 하나의 상품으로 등장하여 허구적인 약속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역설적이지요. 결국 많은 사람들이 그 배신의 경험 때문에 상품을 불신하고 나아가 증오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패션의 속도가 더욱 빨라집니다. 그러다가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오기도 하지요. 어쨌든 패션은 결국 ‘변화 그 자체’가 됩니다. 상품 문화와 상품미학의 본질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새로운 것에 대한 가치, 그리고 변화의 신선함이라는 메시지는 실상 환상이고 착각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품 사회에서 도달할 수 있는 미학과 예술성의 본질이 이러한 것이지요. 상품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세포라고 합니다. 세포의 본질이 사회체제에 그대로 전이되고 구조화되는 것이지요. 형식을 먼저 대면하고 내용은 결국 만나지 못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위나라 대부인 극자성棘子成이 말하기를, “군자는 본바탕이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문식文飾을 할 것이랴”(君子 質而已矣 何以文爲) 하였습니다. 당시에도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었던가 봅니다. 상당히 과격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자공이 반론했습니다. “애석하구나! 문文이 질質이고 질이 곧 문이다. (만일 무늬가 없다면) 표범의 털 뽑은 가죽이 개와 양의 털 뽑은 가죽과 무엇이 다르랴”(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鞹 猶犬羊之鞹)고 하였습니다. ‘곽’鞹은 털을 뽑은 가죽을 말합니다. 자공의 반론은 내용과 형식은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춤과 춤추는 사람을 어떻게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빈빈彬彬하기가(고루 조화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형식도 경시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형식이 먼저 만들어진 다음에 내용을 채우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습니다.
주자는 “극자성이 당시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다소 과격한 논리를 편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잃음이 지나치고, 자공이 또 극자성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나 근본과 지엽, 무거움과 가벼움을 구별하지 못하였으니 잃음이 또한 크다”고 주를 달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文이 이기는 것이 질質을 멸滅함에 이르면 근본이 망할 것이니 사史한 것보다 차라리 야野한 것이 낫다고 개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史와 야野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