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里仁」
이 구절을 함께 읽자고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부귀와 빈천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환상을 지적하자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해석에 다소의 이견이 있습니다. 가장 널리 통용되는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해석상의 이견이 있는 부분은 ‘불이기도득지’不以其道得之입니다. “그 도로써 얻지 않은 것”이란 뜻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는 쉽게 이해가 가지만 빈천의 경우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닌 빈천이 과연 어떤 것인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지요. 특히 도로써 얻은 빈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욱 막연합니다. 그래서 다산茶山은 이 경우의 득得을 탈피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대부분의 해석이 이를 따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도로써 얻은 빈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꼭 빈천은 아니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부귀와 상관없는 삶을 선택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그 도로써 얻은 빈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부귀를 얻기 위해 부정한 방법에 의존했다가 빈천하게 되는 경우가 이를테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도로써 얻지 않은 빈천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빈천은 불거不去해야 하는 것이지요.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고 싶은 이유는 빈천을 무조건 탈피해야 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빈천도 얼마든지 도로써 얻을 수 있는 어떤 가치라는 것을 선언하고 싶은 것이지요.
어느 경우든 우리가 이 글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부귀와 빈천에 대한 반성입니다. 부의 형성 과정이 정당한 것인가, 그 사람의 출세가 그 능력에 따른 정직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물음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보편적인 시각은 오로지 그 결과만을 두고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빈천의 경우도 그것을 당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세태입니다. 게으르다거나 낭비적이라거나 하는 시각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빈천의 역사를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과하지 않는 일입니다. 몇몇 드러난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그가 누리고 있는 부귀의 형성 과정에 대해 전혀 무지합니다. 특히 서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내려가면 그곳에서는 그 역사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조선조 말에서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자유당·공화당·신한국당 집권 시기를 거치면서 그와 그의 가계家系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역사가 줄줄이 구전口傳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부귀와 빈천이 있기까지의 전 과정이 소상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줄곧 고향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주로 나누는 대화가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과 역사가 드러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청산은커녕 과거가 은폐되고 있는 역사를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지요. 그 과정과 역사는 완벽하게 망각되고 오로지 그 결과만을 바라보게 하는 사회를 살고 있지요.
개인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이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대사회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한마디로 침략과 수탈의 역사입니다. 엄청난 집단적 학살로 점철된 20세기를 청산하고 평화의 세기를 갈망하던 우리들의 소망이 21세기의 벽두부터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의 부귀에 대하여 그 과정과 그 도道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우리가 선진 자본주의를 국가적 목표로 하여 매진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의 그 어두운 역사는 드러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침략과 수탈까지도 합리화되고 미화되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역사의식과 이러한 사회의식이 청산되지 않는 한 한 개인의 부귀와 빈천의 온당한 의미를 읽어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보학譜學이라는 문화 전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야 자손을 위해서라도 부정한 방법으로 부귀를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보학으로 될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사회의 관계망과 역사의 관계망, 즉 시공時空을 관통하는 관계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망網을 뜨개질하는 것이 근본적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은 우리들의 천민 의식賤民意識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지 않는 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