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에 발 담그고 아버님께
지난 9일 하루는 서화반 일곱 명을 포함한 10여 명이 사회참관을 하고 왔습니다. 그날은 마침 장마철 속의 개인 날이어서 물먹은 성하(盛夏)의 활엽수와 청신한 공기는 우리가 탄 미니버스의 매연에도 아랑곳없이 우리들의 심호흡 속에다 생동하는 활기를 대어주는 듯하였습니다.
우리는 먼저 금산(錦山)의 칠백의총(七百義塚)을 찾았습니다. 조중봉(趙重峯) 선생과 영규대사(靈圭大師) 등 7백 의병이 무기와 병력이 압도적인 왜병과 대적하여 살이 다하고 창이 꺾이고 칼이 부러져 맨주먹이 되도록, 최후의 1인까지 장렬히 선혈을 뿌렸던 격전지 ― 지금은 날 듯한 청와(靑瓦)의 사당과 말끔히 전정(剪定)한 향목(香木)들의 들러리, 그리고 잘 다듬어진 잔디와 잔디 사이의 깨끗한 석계(石階)를 울리는 안내원의 정확한 하이힐 굽소리, 연못 속을 부침하는 붕어들의 한가로운 유영(遊泳)……. 이 한적한 성역(聖域)의 정취는 그다지 멀지 않은 임란 당시가 아득한 고대사의 일부가 된 듯 격세의 감회를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오후에는 먼지가 일고 자갈이 튀는 신작로를 한참 달려서 신동엽의 금강 상류까지 나갔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흐르는 물에 발을 담가보았습니다. 저는 까칠한 차돌멩이로 발때를 밀어 송사리 새끼를 잔뜩 불러모아 사귀다가, 저만치서 고무신짝에 송사리, 새우, 모래무치 들을 담고 물가를 따라 이쪽으로 내려오는 새까만 시골 아이들 ― 30여 년 전 남천강가의 저를 만났습니다. 저는 저의 전재산인 사탕 14알, 빵 1개, 껌 1개를 털어놓았습니다.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라던 이오덕 선생의 아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돌아올 때는 매우 빨리 달려온 덕분에 저는 농촌과 도시를 거의 동시에(30여 분의 시차)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도회지에는, 원래 농촌에 있던 것이 참 많이 와 있었습니다. 큼직한 열매, 충실한 포기들이 도시의 시장에 씻은 얼굴로 상품이 되어 줄지어 있는가 하면, 볕에 그을고 흙투성이 속에 잃어버린 농촌 아낙들의 '아름다움'이 도시 여인들의 흰 살결이 되고 화사한 차림, 고운 몸매가 되어 포도(鋪道) 위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15척 벽돌담을 열고 오랜만에 잠깐 나와보는 '참관'은 저로 하여금 평범하고 가까운 곳에서 인생을 느끼게 하는 '터득의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1979. 7.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