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없는 빗속의 만남 형수님께
남을 도울 힘이 없으면서 남의 고충[苦情]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마음 아픔에 그치지 않고 무슨 경우에 어긋난 일을 하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도운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빈손으로 앉아 다만 귀를 크게 갖는다는 것이 과연 비를 함께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만 출소를 하루 앞두고 제게 일자리 하나 주선해주기를 부탁하던 젊은 친구에 관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동창 선후배가 이미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바로 그와 같은 밑바닥 인생들밖에 친구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그 친구가 바뀜으로써 최종적으로 바뀌는 것이라면 저는 이미 그가 생각하는 그러한 세계의 사람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망설임 끝에 겨우 입을 뗀 부탁이라 더욱 송구스러워하는 그와 마주앉아서 저는 그날 밤 갈 곳 없는 그를 위하여 동창 선후배들의 위치에 제가 있었더라면 하는 감상에 젖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에서 금방 제 자신을 건져낸 것은 만약 제가 그러한 위치에 있었더라면 그와의 만남이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는 분명한 깨달음이었습니다.
도울 능력은 있되 만남이 없는 관계와 만남이 있되 도울 힘이 없는 관계에 대하여 그날 밤 늦도록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의 의미에 관하여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만 그때의 아픈 기억만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는 무의무탁(無依無托)한 동료들이나 이제 징역을 시작하는 젊은 무기수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도울 힘이 없으면서 남의 어려움을 듣는 일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러한 고정(苦情)에 자주 접하게 됨으로써 아픔이 둔감해지는 대신에 그것이 고정의 원인을 깊이 천착해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조건이 되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 혼자만 쓰고 있는 우산은 없는가를 끊임없이 돌이켜보는 엄한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시인 몇 사람은 좋이 길러내었음직한 구봉산(九峯山)의 아홉 개 연봉(連峰)이 초하(初夏)의 반공(半空)을 우뚝우뚝 달리고 있습니다. 하도장성(夏道長成), 여름은 산이 크는 계절, 산이 달리는 계절인가 봅니다. 그리고 오월산은 단지 저 혼자 크고 저 혼자 달리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그를 바라보는 이곳의 갇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키워주고 달리게 합니다.
1985. 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