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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펜 신복희 나무님께서 <꽃무늬 저고리>에 이어
두번째 수필집 <가을비>를 발표하셨습니다.

<가을비>에 실린 글 중 '버림받은 지게'는
'2006년을 대표하는 문제수필'로 평론가들이 뽑았다고 합니다.

버림받은 지게 전문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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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지게
                  - 신복희

며칠 전에는 방천 둑을 걷다가 지게를 지고 오는 사람을 만났다. 참으로 오랜만에 본 지게였다. 그런데 그 지게는 예전부터 우리가 보아온 나무지게가 아니라 알루미늄으로 만든 것이었다. 비닐을 덧댄 플라스틱 소쿠리를 바소거리 마냥 끈으로 묶었는데 빈 채로 덜겅거렸다. 그런데도 지게를 진 사람은 어디에도 부릴 수 없는 난감한 짐을 진 것 마냥 허리를 꺾고 지친 얼굴로 천천히 지나갔다.

그는 이웃마을 방앗간 집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였다. 내가 인사를 했지만 알아듣지 못하고 스쳐지나갔다.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니 그 집 큰아들이 몇 해 전에 직장을 잃은 후로 실의에 빠진 날들을 보내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나는 시골로 이사 온 후로 내내 지게를 얻으려고 동리를 돌았다. 쓰지 않는 지게를 구할 수 있다면 마당 한편에 세워놓고 바소거리 가득 채송화를 심고 싶었다. 그러나 그 흔했던 지게는 어디에도 없었다.

리어카가 나오고 작은 손수레에 경운기까지 골목마다 밀고 들어오니 지게는 아궁이에서 재가 된 지 오래였다는 사실을 다리가 아프도록 마을을 돌아본 후에야 알았다. 돌담이 없어지고 마을길이 넓어지자 지게보다는 바퀴 달린 수레가 대접받는 세상으로 변한 것이다.

지금은 푸대접 받는 지게이지만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지게란 농촌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도구였다. 도구라기보다 농부와 한 몸으로 일하며 따라다닌 분신이었다.

들로 나가는 농부의 어깨에도,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나무꾼의 등에도 언제나 지게가 동무했다. 자식들 등록금을 맞추려고 쌀가마니를 지고 바쁜 걸음을 걷던 아버지도, 쌈짓돈이 될 푸성귀를 내러 장에 가시던 할아버지도 모두 지게 덕을 보았다. 새벽부터 해거름까지 지게는, 배고픔을 견디며 묵묵히 일하는 농부의 등뼈마디에 몸을 맞대고 이 땅의 가난을 함께 업어 넘긴 동지였다.

뿐 아니었다. 마을에 급한 병자가 생기면 자동차가 다니는 신작로까지 발 빠른 장정이 지게에 지고 뛰어야만 했다. 또한 상여마저 탈 수 없는 박복한 넋이 저승 가는 길도 거두었다. 헌옷처럼 벗어놓은 남루한 육신을 지게에 얹어 보내며 혼백을 달래었다. 지게는 긴 세월 서러운 백성과 눈물도 함께 나눈 피붙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게를 매정하게 버렸고 불태우고는 잊었다.

오늘은 이웃마을에 갔다가 외딴 비닐하우스 안에 지게가 언뜻 보여 안으로 들어갔다. 지붕에 그늘막 덮개를 한 겹 더 씌워서 음습한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니 버려진 듯한 지게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지게는 한눈에 보아도 몹시 허름했다.

가지가 돋친 장나무 두 개가 지게의 축이건만 하나는 부러졌는지 등에 닿는 부분의 나무에 홈을 파고 다른 나뭇가지를 끼워 넣었다. 처음에야 튼튼했을 밀삐는 그 낡은 모양이 비녀 풀린 할머니의 쪽머리처럼 숱이 다 빠져 부스스했다. 등태 역시 낡기는 마찬가지로 짚으로 촘촘히 짠 매운 솜씨는 흔적만 남았고 닳고 닳은 채 너덜거렸다.

너무 낡은 지게라 내 소용에 맞을까 싶어 손으로 만지며 살피는데 기우뚱하면서 모로 쓰러졌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 같아서 깜짝 놀라 뒤로 주춤하다가 나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쓰러진 지게가 나를 노려보는 듯했다. 문득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느껴져 어쩌면 지게의 억울한 항변을 들은 것처럼 가슴이 찡했다.

찡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자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쓸모없다고 버림받은 것이 어디 지게뿐인가. 젊은 날을 다 바쳐 지게보다 더 많은 일을 한 가장(家長)도 일터에서 내침을 당하는 세상이 아닌가. 나는 바소거리에 꽃을 심어 지게에 얹어두려 했던 마음을 멀리 던져버렸다. 누군가 버린 지게를 얻어온다 해도, 평생 일했던 집에서 버림받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언짢을 것 같아서 집에 두고 싶지 않았다.

(200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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