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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6.12.31 12:28

영원한 외사랑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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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받은 전화로 시종 마음이 무겁다.
까맣게 잊고 있던 녀석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일 년간은....
그런데 이번에도 어기지 않고 새밑에 또 전화가 왔다.
평상시보다 늦은 전화라 드디어 잊었구나, 안심하고
한편으로는 조금 섭섭하달까, 뭐 그런 난해한 감정들로
어우러진 홀가분함을 즐기고 있었다.
그 녀석을 만난 것은 80년도 광주였다.
그 후로 그 녀석의 말대로 그는 미국으로 도망을 갔다.
도망?
모르겠다.
그 녀석의 말이다.
도망간 그 녀석은 매년 년말이 되면 어김없이 전화를 한다.
이제는 딸과 아들까지 다 둔 가장이 되어서도 전화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자신이 버린 '모국'을 잊지 못해서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잊어버리고 있다가 한해를 넘겨야하는 새밑이 되면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 고향을 찾듯, '그리움'이 '벌떡증'처럼 도지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있다.

-박여사, 별고 없이 잘 계셨어요?-
-누구세요?-
-나의 목소리를 잊어버리면 섭섭하지요.-
-너의 목소리 제발 이제는 그만 듣고싶다.-
-사람들은 내 목소리 다들 좋다고 하던데?-
-그건 너와 사는 여자말이겠지, 그리고 이제는 버린 것에 대해
제발 잊어버려라. 너의 말대로 그것이 조국이던, 모국이던.
버려놓고 잊지 못한 사람처럼 스산하고 비겁해 보이는 것은 없어.-
언제나처럼 나의 말에 대답을 회피한다.
-별일 없지?-
-여기 한국사정은 네가 더 확실하게 알면서 뭘 묻냐?-
-자네말야.-
내가 아무리 험하고, 거친말을 쓰고 별소리를 다해도, 나에게
결코 뒤지지않을 만큼 입심이좋은 녀석이지만 이제껏 여자에게
거친말을 쓰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다.
나는 '나쁜 놈, 비겁한 놈...별 말을 다해도 결코 나에게 뿐 아니라
다른 여자에게도 '야'.'너'.란  말조차 쓰지를 않는다.
필요할 때는 한 주먹하는 녀석이지만 평소에는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믿기지 않을 만큼 겸손하고 바보스러울 만큼 온순하고 차분하다.
-네가 존경하는 '자네'는 잘 계시다.-
-그럼 됐다.-
-웃기지 마. 너 실은 그걸 묻고 싶어 전화한 것이 아니잖아. 사람이 왜 그렇게
솔직하지 못하냐?-
-왜, 또? 뭘?-
-왜, 또?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냥 죽치고 한 번 떠났으면 거기서 살아.
자꾸 미련두지 말고.-
-누가 뭐래? 내가 어쨌는데?-
-귀신을 속이지, 나를  속이려고, 내가 모를 줄 아니? 너 또 그리운 벌떡증이
일어나 전화 한 거잖아. 이 못난 옐로우 멍키야.-
-....영원히 잊을 수는 없지. 내가 못난 옐로우 멍키인 이상.-
-하나도 감동스럽지 않아. 그러니 잊어. 이왕 버리고 떠났으면 잊는 것이 용감한
거야. 한 다리는 미국에, 한 다리는 한국에 걸치고 힐끔거리고 있는 너의 어정쩡한
모습,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아.  네가 그렇게 미련을 두고 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해서
아무도 너를 알아주지도 않고, 양다리 걸치고 있는 너의 다리와 마음만 피곤할 뿐이야.
-알아 달라기를 바래서 그런 것 아니야. 자네가 하는 말은 잘 알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어 주는 것이 아니지....-
-왜? 버리고 떠난 놈이 내 앞에서 감상에 젖은 애국심 운운 하려는 것은 아니지?-
-애국심은..무슨..-
-그럼 잊어. 한국이 너 필요로하지 않거든. 네가 홍세화도 아니고, 택시 운전수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너는 서울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는 거야.
그러니 제발 순진한 외사랑 그만하고 내년에는 네 놈 목소리 안 들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나 잘 키우고 살아. 아이들 엄마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새해에는 너의 목소리 안 듣는 것으로 믿고 살게. 내가 진부한 '새해 복 많이 받아라'는 인사는 하고 싶지 않고, 만일 내가 사랑을 했다면, 아마 너 같은 녀석을 사랑했을 거다. 이것으로 새해 인사는 충분하리라 믿는다~-
-귀 씻어야겠다. 여자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야 기분이 좋지, 여자가 아닌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욕이지.
-하하. 그래, 욕 먹었으니 오래 살겠다. 그럼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아~-
-오래 살면 뭐하냐? 살만큼 살았는데.-
-너나, 나나, 자식 놓아두고 그런 소리하면 안 되지. 자식을 다 키워놓고 그러던지
말던지, 그것은 나중에 심도있게 상의하자.-
-그런 건가...-
-그럼, 자식있는 사람은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어. '직무유기'잖아.
-그래. 맞다. 하하-
우리 고슴도치 부모들은 자식 얘기가 나오자 자신의 목숨조차 자신의 것이 아닌,
자식의 것인, 불쌍한 사람들이 되어서도 좋다고 웃는다.
부모는 그런 것이다.
그런 부모를 그리는 마음 또한 당연한 것이다.
그 녀석이 모국을 그리는 마음을, 자식을 키우는,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완전히 다 알 수는 없다.
내가 너가 아닌 이상..

나의 딸은 어제부터 준비한 것을 바리바리 싸서 남자친구의 엄마와 면회를
간다고 새벽부터 부산했다.
딸을 전철역까지 데려다 주며 나는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졌다.
-그 아이 엄마가 가져 올 터인데 무겁게 왜 이런 것을 네가 싸가니?-
-그래도 빈 손으로 가기에는 그렇잖아, 난 과일하고 과자 가져가기로 했어.-
-헤어진다며? 병주고 약주고..-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사귈 때까지는 최선을 다 해야지.-
-일단, 말은 좋은 말 같다.-
-엄마, 그 아이 포병으로 배치 받았대.-
-제대로 갔구나, 권총이 아니라, 조만간 곧 대포 가지고 들이 닥치겠구나.-
-히히..엄마, 그런 일 없어. 그 아이 여리고 착해.-
-뭘 모르는 구먼, 원래 여리고 착한 인간들이 탈선하고 탈영하는 거야.
독한 인간들은 탈선도 탈영도 안해.-
-그런가..-
-언제 철 들래?-
-여기, 여기에서 세워 줘~ 엄마, 갔다올게~-

엄마의 말을 뒷전으로 흘리며 무거운 짐을 들고 전철역을 향해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고슴도치 엄마는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하다.
모두 새해 인사를 하고 덕담을 주고 받는 새밑에도 말이다.
아마 새해에도 그럴 것이다.
자식을 향해 계산할 수 없는 영원한 외사랑..
그것이 부모다.
새밑과 새해와 관계없이..

이처럼 부모와 자식은 결코 만날 수 없는 각자의 평행선을 달리며
숨차하며 사랑하는 힘든 외사랑의 영원한 전형들이다.

결혼을 해 본 사람만이 진정한 절망과 희망들을 말할 수 있고
자식을 키워 본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과 용서를 말할 수 있으며
결혼을 해보고 아이를 키워 본 사람만이 살아 숨쉬는 삶을
말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되거나 틀린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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