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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7.01.03 07:34

막차가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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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떠나야 하거나 혹은 먼 길을 돌아가야 할 때, 막차를 앞에 두고 몸이 주저하곤 한다. 몇 번을 다잡아 봐도 헐벗은 몸은 깜깜하다. 그러나 뒤돌아서면 영영 현실의 수렁을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다. 앞도 뒤도 없는 길. 그 길 위에서 지새우는 끝도 없이 깊은 밤. 아, 그 사이.

풍경하나
궁색한 살림이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가 은근했던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무렵이었다. 변변치 않은 성적에도 취직보다는 대학을 염두에 두었던 나는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었다. 고민 끝에 모 지방대학 입학을 마음먹고 원서접수 마감 전날 밤, 막차를 타기위해 친구와 함께 용산역으로 향했다. 부모님에게는 꾸지람만 들을 것 같아 말 한마디 없이 나선 길이었다.
열차시간을 앞두고 포장마차에 들러 마음 다짐을 하는데 어느 순간 스스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입학금은 어떻게 만들지, 피붙이 하나 없는 낮선 땅에서 자취라도 할라치면 갑절은 더 들 학비는 무슨 수로 감당할지, 도무지 깜깜했다. 어느 사이 새벽안개가 짙게 깔리었다.

풍경 둘
열아홉, 고3 실습 나온 아이가 그만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리었다. 아이는 고향에 연락하겠다는 것도 극구 만류하고 한 달여 치료가 끝난 후 예전과 같은 밝은 표정으로 태연하게 일을 했다. 그러던 중 설 명절이 다가왔다. 손가락 값으로 갖가지 선물을 꾸린 아이는 그날로터 표정이 어두워져갔다. 막상 떠날 날이 되어서는 몹시도 불안해했다. 안쓰러워 길을 따라 나섰다. 등을 다독이며 대합실에 함께 있는데 아이는 안절부절못하다 막차까지 시간이 남았다며 술 한 잔 했으면 좋겠단다.
서너 잔을 거푸 비운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연실 잘린 손가락만 바라보았다. 어느덧 충혈 된 아이의 눈 속에 부모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울음이 귓전을 맴도는 듯했다. 느닷없이 전화 할 곳이 있다고 나갔다. 나갔다 온 아이는 공장 일이 워낙 바빠, 졸업식에나 갈 수 있겠다는 말을 했다며 허깨비처럼 웃었다. 더불어 깜깜했다. 새벽까지 진눈깨비가 계속 되었다.

사람을 보았다
생각하면 끊임없는 길뿐이었다. 떠나는 혹은 떠나온 만큼 돌아가야 하는 길. 그 길 위에서 막막했던, 초라했던 시간이 계속되고 있었다. 생각하면 내 젊음에 철없음은 오래도록 그 막막하고 초라한 어느 길 위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막차를 앞에 두고 주저하고 망설이는 시간 속, 어느 날 문득 나는 내게 줄곧 눈길 뻗어 오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어머니였으며 아버지였고 내 누이, 형제들이었다.
소작을 부치다 날품팔이로 전전해온 ‘살림’,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안식이었고 굴레였고 또한 희구였다. 그들도 나처럼, 아니 내가 겪어 온 섣부른 풍파의 뿌리로부터 막막하고 초라하게 길 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막막하여 막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초라하여 초라하지 않았다. 그 속에서 ‘사람’을 발견하는 숨 가쁜 열광이 계속됐다. 그것이 내가 보낸 연대, 한여름 태양아래 작열하여 불현듯 찾아온 밤까지 지새며 보낸 풍경이었다.

고백, 상처
어느덧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지난여름 햇살에 여운을 잊지 못한 채 창가에 서성이었다. 때론 지난여름의 햇살, 열광을 끌어다 놓고 프리즘에 투과시키며 스펙트럼에 하나하나를 나름의 잣대로 재단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굴절되고 분사된 빛의 부분을 장님 코끼리 만지듯 더듬으며 보내는 나날은 다만 견디는 것이었다. 달리 견디는 것 외에는 아무 곳도 할 수 없는.
그 사이에 열광은 계속 됐다. 그 열광의 무대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열광하는 열광이 있었을 뿐이었다. 차츰 일상 곳곳에서 나는 열광으로부터 구석배기에 내몰리며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누군가의 지아비가 되고, 한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슬픔이 깊었던 아버지는 한결 늙었지만 예전과 갗은 모습으로, 아니 늘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생을 전전하며 기워갔다.
그즈음 나는 또 다시 막차를 앞에 두고 서성이었다. 외로웠다. 그 외로움이 깊고서야 나는 또 문득 외로움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상처는 나를 둘러싼 ‘사람’. 어머니가, 누이가, 형제가, 아! 나를 지켜 온 숱한 사람들이 내게로부터 받은 상처였다. 그 상처가 결국 나의 상처였다는 것을 아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나는 바로 내 이웃의 상처 속에 있었던 것이다.

서툰사랑
상처를 사랑하는 일은 상처로부터 억압되고 상처와 더불어 행방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일부이며, 나를 살아 숨쉬게 하는 온전한 전체를 이룬 너로부터, 그 상처로부터 억압되고 더불어 해방되는 길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한때 너의 가슴에 지폈던 불꽃, 한때 너와 함께 바라보던 별빛은 아미 사위었고 보이지 않는다. 또한 내가 살아가는 어느 길목에서 그것이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길을 가야한다. 그 상처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다는 것을 아프게 자각하면서.

후렴
미운 네 살에 접어 든 딸아이를 생각하다 빙긋 웃는다. 아이는 내게 있어 가장 깊은 상처가 될 것이다. 깊은 밤, 뽀뽀라도 할까 하여 잠 든 딸아이 곁에 다가갔다. 딸아이가 기지개를 힘차게 켜며 한 바퀴 뒹군다. 그 힘이 이글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딸아이에게 닥쳐 올 막차의 순간들, 세상 모든 딸아이에게 닥쳐 올 막차의 순간들, 나는 항상 그곳에 있어야 하리라. 그것이 지금 내가 막닥뜨리고 있는 상처이다.
      
              -'열린 창으로 바라 본 다양한 삶의 풍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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