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대상 게시판

청구회추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나무야
더불어숲
강의
변방을 찾아서
처음처럼
이미지 클릭하면 저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숲속의소리

2007.02.04 01:51

쓰러진 자의 꿈

댓글 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이틀 뒤면 개학이다. 특별히 열심히 무엇을 한 건 아니지만 아쉬움과 후회가 별로 없으니 그럭저럭 잘 보낸 방학이다. 대부분 집에 처박혀 5살 되는 꼬맹이를 위해 시간을 내어준 셈이지만, 틈틈이 짜투리 시간을 만들어 아이들과의 수업을 위한 공부와 준비도 좀 했고, 보고 싶던 책들도 좀 보고, 한번 더 읽어봐야지 했던 책도 보는 여유를 가졌으니 그리 나쁘진 않다.

오늘도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었던, <쓰러진 자의 꿈>이란 시집과 약관 26살에 맑스가 썼다는, 현실과 정면으로 맞서 썼다는, <경제학-철학 수고>. 그 세 번째 초고 중 <화폐(돈)> 부분을 읽고 뭔가 끄적거리고 싶은 느낌이 있어 이렇게 쓴다. 온 사회, 온 시민들이 스스로 알아서 기고 자발적으로 복종하여 자기 발 아래 무릎꿇도록 만드는 우리 사회의 전능한 힘, 그 ‘돈’과 ‘화폐’에 대한 건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쓰러진 자의 꿈>에 대해서만 써 본다.

혹 “쟤는 왜 맨날 저럴까”하고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가 될까. 산다는 건 함께 한다는 것, 사랑이란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모자라고 상처난 것들 데리고 함께 가는 것,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온전히 있도록 하는 것이지 않나. 바다가 바다로, 나무가 나무로, 숲이 숲으로, 사람이 사람으로.....그래서 씩씩하게 느낀대로 쓴다.

언제부터 생긴 버릇인지는 모르지만 내게 오랜 버릇이 하나 있다. 마음이 헛헛할 때면 습관처럼 책방에 들러 시를 읽는, 그러다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시가 있으면 그 시가 실린 시집을 무조건 사들고 나서는 버릇이다. 오늘, 책꽂이에서 뽑아 다시 펴든 신경림 시인의 <쓰러진 자의 꿈>이란 시집도 그렇게 만난 시집이다. 너무나 많은 것이 너무도 빨리 뒤바뀌고 쓰러지던, 값지고 소중한 것들이 찬밥처럼 내팽개쳐지던, 암울하게 느껴지던 1993년 무렵 내게 큰 위안과 힘이 되었던 시집이다.

십년이 훌쩍 더 지난 지금 다시 이 시집을 펴든 까닭도 다르지 않다. 안타깝고 답답하기 때문이다. 쓸쓸하고 외롭기 때문이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우리 사회 분위기가, 소위 사회 개혁을 위해 고민한다는 사람들과 진보적이라 일컬어지는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딱하기 때문이다. 비록 빛바래고 먼지 앉은 허름한 꼴로 책꽂이에 꽂혀있지만, 여전히 이 시집 속의 시들은 '쓰러지는 것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려'주는 힘을 잃지 않고 있으리란 믿음 때문이고, 시집 뒤에 시인이 남긴 말처럼 '이럴 때일수록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올바른 목소리를 가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스스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해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역시 이런 내 바람과 믿음을 조금도 실망시키지 않는다. 해서 그중 몇 편 옮긴다. 그냥 아무거나 옮긴 것들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내 마음, 내 생각, 내 입장을 대신하는 시들이고,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는 시들이다.



      굴참나무 허리에 반쯤 박히기도 하고
      물푸레나무를 떠받치기도 하면서
      엎드려 있는 나무가 아니면
      겨울숲은 얼마나 싱거울까
      산짐승들이나 나무꾼들 발에 채여
      이리저리 나뒹굴다가
      묵밭에 가서 처박힌 돌멩이들이 아니면
      또 겨울숲은 얼마나 쓸쓸할까
      나뭇가지에 걸린 하얀 낮달도
      낮달이 들려주는 얘기와 노래도
      한없이 시시하고 맥없을 게다
      골짜기 낮은 곳 구석진 곳만 찾아
      찾아들듯 흐르는 실개천이 아니면
      겨울숲은 얼마나 메마를까
      바위틈에 돌틈에 언덕빼기에
      모진 바람 온몸으로 맞받으며
      눕고 일어서며 버티는 마른풀이 아니면
      또 겨울숲은 얼마나 허전할까

      - 신경림, <겨울숲> -


  
      번듯한 나무 잘난 꽃들은 다들 정원에 들어가 서고
      억센 풀과 자잘한 꽃마리만 깔린 담장 밖 돌밭
      구멍가게에서 소주병 들고 와 앉아보니 이곳이
      내가 서른에 더 몇해 빠대고 다닌 바로 그곳이다.
      허망할 것 없어 서러울 것은 더욱 없어
      땀에 젖은 양말 벗어 널고 윗도리 베고 누우니
      보이누나 하늘에 허옇게 버려진 빛 바랜 별들이
      희미하게 들판에 찍힌 우리들 어지러운 발자국 너머.
      가죽나무에 엉기는 새소리 어찌 콧노래로 받으랴
      굽은 나무 시든 꽃들만 깔린 담장 밖 돌밭에서
      어느새 나도 버려진 별과 꿈에 섞여 누워 있는데.

      - 신경림, < 담장 밖> -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때리고
      닥치는 대로 팔다리를 꺾는 바람을 피하느라
      뼛속 깊은 곳까지 후벼 파는 추위를 견디느라
      이토록 작아지고 뒤틀린 우리들의 몸통을
      말하지 말자 아름답다고

      메마른 돌밭에 뿌리박기 위하여
      천길 벼랑에나마 매달려 살기 위하여
      보아라 굽었지만 더욱 억세어진 이 팔다리를
      햇빛을 향하여 꼿꼿이 들려진
      이 짧지만 굵은 목덜미를

      말하지 말자 눈물겹다고도
      아픔과 눈물을 보랏빛 꽃으로 피울 줄 아는
      눈비 속에서 얻는 우리들의 슬기를
      서로 받고 준 상처를
      안개에 섞어 몸에 두르기도 하는
      악다구니 속에서 배운 우리들의 웃음을

      우리들의 울음을

      - 신경림, < 난장이패랭이꽃 > -
      
  

     지금 우리는 너무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무 편하게만 살려고 드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먹고 자고 뒹구는 이 자리가
     몸까지 뼛속까지 썩고 병들게 하는
     시궁창인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짐짓 따스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 자리가
     암캐의 겨드랑이나 돼지의
     사타구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음습한 그곳에 끼고 박힌 진드기처럼
     털과 살갖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에 길들여져
     우리는 그날 그날을 너무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큼한 냄새와 떫은 맛에 취해
     너무 편하게 살려고만 드는 것은 아닌가,
     암캐나 돼지가 타 죽는 날
     활활 타는 큰 불길 속에 던져져
      함께 타 죽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서.

      - 신경림, < 진드기 > -




  2007. 2. 3     새벽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1705 웃음! 9 달선생 2007.02.06
1704 &lt;함께 여는 새날&gt;전시회 번개 (2/7 13:30) 6 이승혁 2007.02.06
1703 프랑스의 93지역 4 조은아 2007.02.07
1702 숲이 아닌 사막에서 여자 혼자 살아 남는 법 4 박 명아 2007.02.06
1701 2월 새내기모임 후기~ 그루터기 2007.02.06
1700 2월에 나누는 축하 ^o^ 6 그루터기 2007.02.05
1699 할머니의 끝말 잇기 ^_^ 2 류지형 2007.02.05
1698 스스로 선택한 우직함으로 7 조은아 2007.02.05
1697 강아지와의 동거 2 박 명아 2007.02.05
» 쓰러진 자의 꿈 7 조원배 2007.02.04
1695 울음 9 박명아 2007.02.03
1694 책 '처음처럼'을 받아 보고... 5 안중찬 2007.02.03
1693 [re] 신년대담을 마치고(윤한택 나무님)(1/31경기신문) 그루터기 2007.02.01
1692 교육공동체 두리하나에서 함께 할 실무교사를 모집합니다! 두리하나 2007.01.30
1691 [새내기모임]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10 그루터기 2007.01.30
1690 신영복 서화 에세이집 '처음처럼' 출간 3 나무에게 2007.01.30
1689 퇴근하고나서 하는 푸념 3 장경태 2007.01.28
1688 감악산에서 세 여자의 동침 2 박 명아 2007.01.28
1687 1월 신년 산행모임 정산 4 그루터기 2007.01.27
1686 엽총..그 이후 5 박 명아 2007.01.25
Board Pagination ‹ Prev 1 ...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 167 Next ›
/ 167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