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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7.05.09 09:38

수신자부담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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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8시에 전화가 왔다. 수신자부담 전화다.

- 선생님, 저 여기서 나가면 안 돼요? 힘들어 죽겠어요.
- 뭐가 힘드냐?
- 전부 다요. 공부도 힘들고, 기숙사 생활도 힘들고, 일요일에 학교 가는 것도 힘들어요.
-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내일(금요일) 외출 나와서 전화해.
- 저 외출 금지 됐어요.
- 또? 왜?
- 일요일에 자다가 일어나니까 12시라서 학교 안 갔거든요. 그것 때문에 벌칙도 받고 너무 괴로워요.
- 알았다. 내가 시간 내서 갈 테니 니 맘대로 나가거나 하지 마. 그럼 주~욱어.

의뢰 받아 만나는 녀석이었다.


녀석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11월쯤으로 당시 졸업을 앞둔 중3이었는데, 녀석의 학교를 통해 의뢰가 되었으며, 의뢰 사유는 무단결석, 무단조퇴에 성적까지 너무 저조하여 진학이 불투명하며, 몇몇 아이들로부터 따돌림과 괴롭힘도 당하고 있는 등 학교 부적응 상태가 심하고, 집에서도 아이에게 적절한 지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이 아이에게 필요한 조치들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의뢰인은, 개입을 하는 사람이 남자였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성 역할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모델링을 할 수 있는 대상도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어찌어찌해서 내게 최종 낙찰이 되어 녀석을 만나기 시작했다.

녀석과 만나 일단 잡은 목표는 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달성하기 결코 쉽지 않은 것이, 결석을 한 날이 너무 많아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어 졸업을 할 수 있을 지 여부가 간당간당한 상황이었고, 성적은 완전 바닥을 쳐서 이 녀석 뒤에 있는 아이가 전교 통틀어 한 명, 혹은 두 명 밖에 없기 때문이다. 녀석을 괴롭힌다는 아이들은 학교 상담실에 놀러 왔을 때 붙잡아 대충 협박을 하여 약간은 '쫄게' 만들었지만 나보다도 훨씬 덩치가 큰 놈들이라 약발이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어쨌든 졸업 사정 때까지 버텨 학교는 졸업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문제는 진학이었다. 집에 방문을 해 가족들을 만나 보니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 어찌 할 바를 모를 정도였다(이런 상황들에 놓인 이들을 상대적으로 꽤 많이 만나 봤음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이 녀석이 집안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아이 진학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녀석이 지원한 학교들에 같이 가보기도 했지만 99.*%라는 경로운 성적은 일반 학교는 물론이거니와 학력 인정학교에서도 받아 주질 않았다. 몇 군데 대안학교도 찾아 봤는데, 상태가 괜찮은 곳들은 입학 조건이 까다롭거나 학비가 만만찮거나 해서 녀석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꽤 낙천적인 편인 녀석은 재수를 해서 가면 된다고 별로 걱정하지는 않아 보였지만, 진학을 하거나 다른 확실한 대체물 없이 방치가 될 경우 녀석은 이후 학교, 혹은 제도권 교육과는 단절 될 가능성이 무척 커 보였다. 그럴 경우 미래에 선택 할 수 있는 것들은 지극히 제한이 될 수밖에 없고, 빈곤이 대물림 될 것이 거의 확실 할 것이다.

어찌어찌하여 찾아 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학교(녀석은 입학 할 수 있는 하한 연령을 겨우 넘겼다)는 녀석에게는 행운이었다. 입시를 위한 교육 보다는 취업을 위한 교육이 녀석에게는 적절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녀석 자신부터 시작해서 녀석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을 하는 상황이고, 녀석의 교육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집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지낼 수 있는 기숙사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다닐 경우 탈락하지 않도록 생활 관리까지 해주고, 게다가 교육비, 기숙사비가 무료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정 출석률을 넘길 경우 다달이 훈련수당까지 나온다고 하는데, 정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마감 바로 전날에 녀석을 데리고 가서 견학하고, 입학 상담을 받은 후, 마감 하는 날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 다녀 꽤 많은 입학 관련 서류 준비해서 겨우 접수하여 입학을 시킬 수 있었다. 다니는 동안은 면제라고 해도 입학금은 있었고, 방송통신고등학교 등록금도 필요했지만 집에서는 만들어 줄 상황이 안 되었는데, 운 좋은 녀석에게 마침 교복지원을 위한 후원금이 들어 온 것이 있어 그것으로 충당을 했다(진학이 무산되었다면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했을까 싶다).

입학을 하게 되어 이제는 종결을 해도 될까 싶었는데, 며칠 안 되어 녀석은 외출을 하고선 복귀하지 않아버렸다. 그 직전까지 전적으로 통제된 환경에서 지내보질 않은 지라 견디지 못한 것이다. 녀석을 찾아 이런저런 말로 꼬셔서 다시금 데리고 갔는데, 녀석을 들여보내며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더 엄격한 것 같았다. 아무튼 녀석은 바로 외출금지에 각종 벌칙을 부과 받게 되었다.

간간히 전화 통화만 하다가 외출이 풀려 밖으로 나온 날에 녀석을 만났는데, 의외로 표정이 밝아 보였다. 그 동안 안에서 친구도 사귀고, 어느 정도 생활에 적응도 된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몇 번의 외출 때 더 만나도 이 정도면 무난하게 생활하겠다 싶었다. 의뢰된 아이에게 개입 할 수 있는 한계 시간도 다 되었기에 종결을 해야겠다 싶었는데, 난데없는 전화가 온 것이다.


그날 오전에 기숙사 사감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녀석이 갑자기 나가고 싶다고 한단다. 나도 그런 전화를 받았다고 얘기하며 조만간 방문해서 만나보겠다고 했다.

그날 오후에 또 수신자부담 전화가 왔다. 녀석이 더는 못 견디겠다며, 오늘 나가겠단다. 지금 갈 테니 일단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갔다.


녀석과 일단 단 둘이 만났다.

- 뭐가 그리도 힘드냐?
- 벌칙으로 면벽수련(面壁修練)하고 봉사활동을 하는데, 둘 다 힘들어요. 수업도 힘들고, 방통고 가는 것도 힘들고요.
- 벌칙은 왜 받았어?
- 일요일에 집에서 자다가 늦게 일어나서 방통고 못 갔거든요.
- 인마 한 달에 두 번 가는 것도 빠지면 어떻게 하냐. 성적은 안 좋아도 출석은 꼭 해야지 졸업하잖아. 봉사활동은 어떤 거 하냐?
- 왁스칠해서 복도 청소 다 해야 돼요.
- 너 똥 퍼봤냐?
- 예?
- 인마, 나는 똥도 퍼봤어. 너, 똥 푸는 게 힘들 거 같냐, 복도 청소하는 게 힘들 거 같냐?
- 똥 푸는 거요.
- 똥도 푸는데, 복도 청소 못하겠냐?
- 봉사활동은 좋은 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데, 면벽수련은 정말 힘들어요.
- 인마, 나는 돈 3만원 내고도 그런 거 한다. 너 템플스테이 아냐?
- 몰라요.
- 그게 그런 거야. 돈 3만원 내고 가서 주구장창 잠도 별로 못자고, 계속 그런가만 하다 왔어. 넌 돈도 안 내고 하잖냐. 좋게 생각해라.
- 몰라요. 나가고 싶어요.
- 나가면 뭐 할 건데?
- 검정고시 볼거에요.
- 방송통신고등학교는 어떻게 하고?
-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돼서 힘들어요.
- 음.. 널 무시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검정고시는 그냥 시험만 보면 붙는 줄 아냐? 그거 쉽지 않아.
- 그래도 공부해서 볼거에요.
- 니가 그만큼 공부 할 수 있냐? 방통고 얼마나 좋냐. 한 달에 두 번씩만 가면 3년 후에 졸업하는 거야.
- 그런 걸 3년씩이나 어떻게 해요.
- 인마, 계산해보자. 한 달에 두 번씩 가는데, 방학 빼면 앞으로 한 50번 정도만 더 가면 졸업하는 거야. 니가 바라던 고등학교 졸업장 완전히 거저먹는 거잖아.
- 어, 정말 50번이에요?
- 계산해봐, 인마.
- 그래도 나가고 싶어요. 좀 쉴래요.
- 얼마 전까지 맨날 쉬었잖아. 집에서도 쉬고, 학교에서도 맨날 쉬고. 아무튼 그럼 1달만 더 다녀봐. 그 후에 얘기하자.
- 아, 정말 힘들어요. 저 지금이라도 그냥 나갈래요.
- 나갈 거면 너 입학금하고 방통고 등록금 다 물어내 인마. 나한테 직접 안 물어내고 나가면 아주 조져버릴껴. 너 000알아? 00중 졸업하고, 00고 갔다가 자퇴한 녀석.
- 몰라요.
- 그 유명한 000을 몰라? 00역서 놀아봤음 알 텐데? 아주 잔인하게 애들 패는 녀석이야. 작년에 내가 상담하던 녀석인데, 내 말은 아주 잘 듣거든. 만약에 너 말없이 나가면 애들 푼다. 아주 두고두고 괴롭히게 만들 껴.
- 뻥이죠?
- 인마, 내가 너한테 이런 뻥 친 적 있냐? 아무튼 1달만 더 견뎌봐. 초반이라서 빡시게 해도 좀 지나면 괜찮을 껴. 하여튼 나오면 아주 주~욱어.

녀석과 함께 기숙사 사감님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가 돌아왔다. 일단은 나간다는 얘기는 더 이상 안 하기로 약속을 했다. 녀석의 말로는 기숙사에 있으면 집에 가기 싫고, 외출로 집에 가면 기숙사로 복귀하기가 싫어진단다. 이해가 된다. 제대로 된 식사 규칙적으로 할 수 있고, 문화생활이나 공부도 하는 것이 자기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집에 가 무절제한 생활의 맛을 다시 보게 되면 기숙사의 통제된 생활로 복귀하고픈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리라.

어쨌든 녀석이 잘 적응하고, 무사히 졸업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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