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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이들마다 인사가 휴가는 다녀왔느냐는 거다. 머리를 깎으러 가도, 가스안전 점검을 하러 오신 아주머니도. 이 ‘휴가인사’를 이제는 조금은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가볍게 받아들인다’란 말은 그간에 이런 인사에 대해 맘에서 넉넉하게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지 못했다는 것이며, 그래도 여전히 나에게는 휴가가 미덥지 못한 구석이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본시 시골 태생인 나는 꼭 이맘때면 텔레비전 뉴스나 라디오에서 휴가가 늘 주요 얘깃거리가 되는 것을 듣고는 했는데, 완전히 내 생활과는 먼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런데 '휴가'라는 말이 환청 처럼 들릴 것 같이 많이 얘기 되는 이 여름이야말로 농촌에서는 가장 힘들면서도 가장 바쁜 철이기도 하다.

학기 중에야 합법적으로 밭에 나가서 밭 매는 일, 깨 터는 일이나 고추 따는 일을 하지 않아도 좋았지만, 방학이면 영락없이 어머니에 끌려서 들로 나가서 그런 일 중 하나를 돌아가면서 해야 했다. 당시 어머니는 고구마 밭 한 이랑을 매는데 아이스케끼를 사주신다거나, 다음 장날에 고무신을 바꿔준다거나, 그렇게 철모르는 새끼들의 손을 빌려 혼자 감당하기 힘든 밭일을 조금이라도 덜어보시고자 하신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때부터 밭으로, 또는 나무하러 산으로, 이것 저것도 아니면 닭 먹이로 개구리 잡으러 논둑으로 동생들과 뙤약볕을 나다녀야 했다.

그러니 뙤약볕에서 고통스런 노동을 하고 있을 때, 산뜻한 차림으로 기분전환을 위해 맘껏 자유롭게 보낸다는 것은 나에게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평생 휴가와 영화, 연극 같은 것을 구경도 못하신 우리 어머니들을 생각하면, 또 한편으로 아직도 생활의 여유가 없어서 그 ‘휴가’라는 것을 일생에서 누려보지도 못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에게는 그 휴가의 인사가 편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소외된 노동환경에서 인격을 저당 잡히며 보냈던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지위의 변화 욕망이 담긴 ‘일로부터의 휴식’이 더욱 강박적으로 짧은 휴가를 요란하게 보내게 만들 수 도 있다. 그리고 노동에서 상처받은 심성을 보상받으려는 휴가의 배후에 숨어서 작동하는 여가와 오락산업의 밀착, 매일의 노동생활 속에서의 자신의 본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며칠간의 휴가에서 화려하고 돈을 쓸 줄 알며 능력있는 아버지나 아들로 변하는 이미지 전환이 주는 이데올로기적 기능까지 논하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세상에 대한 호기는 있어서, 재벌의 돈벌이 노릇을 할 수 없었고, 반민주적이고 정당성이 없는 국가의 손발이 될 수 없어서 취직을 포기하고 밑바닥 생활을 하던 적이 있었다. 운동이라는 것을 할 만큼 강단이 세지도 못했지만, 내가 재벌과 국가에 대한 좋지 못한 인상을 갖고 있었던 이상 도저히 그들의 일부가 될 수 없었다. 설령 보편적인 삶에 타협을 했다면 나의 성격으로 보아 그 구조 안에서 꾹꾹 가슴을 누르고 그렇게 그렇게 또 살 것만 같았기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는 일을 택했던 것이 한겨레신문 배달이었다.

어느 비오는 새벽 가득 실은 쓰레기 리어카를 아버지는 앞에서 손잡이를 위로 바짝 올려 뒤꽁무니를 땅바닥에 끌게 하여 속도를 줄이려 힘쓰고, 뒤에서는 그의 아이와 아내 둘이서 쓰레기를 가득 실은 손수레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끌어당기면서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 너무 슬펐다. 저 아이가 이 일을 마치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그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일을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하니 마음이 저며왔던 것이다. 혹시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아이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오는 것을 창피스럽게 여기지는 않을까, 아버지의 직업을 감추려는 생각의 혼선 속에 생겨날 그 소년의 번민과 갈등, 아픈 마음이 읽혀지는 듯 싶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부터 나는 혹시 배가 나와서 운동을 하더라도 방안에서 숨어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먹고 살기 위해 새벽을 뛰어야 하는 이들과 살을 빼기 위해 멋있는 운동화와 운동복으로 근사한 조깅을 한다는 것은 내가 지향하고자하는 가치관과 양립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그 무엇들에게는 늘 이런 나의 원칙들이 대립하여 가볍게 넘겨버리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언제나 몸살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난 이 아픔이 좋다. 그런 것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나의 모습이 어땠을까를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끊임없이 인간성을 쇠락시키는, 날로 복잡해지고 고도화되는 문명의 거침없는 물결에 압도되어 사회적 섬세함을 잃어버리고 헛똑똑이가 되거나, 영혼을 갉아먹는 이 소비사회에서 편하고 안락하거나,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저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책을 통해서 여행을 하고, 책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고, 책을 통해서 휴식을 하면서 좀 더 확 트인 나의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돈 들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나의 '휴가'방식이다. 모두가 하는 대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복잡하고 어수선한 곳을 찾아떠나는 것이 아닌 제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는, 나의 내면으로 여행하는 그런 휴가가 있으면 좋겠다. 왜, 높으신 경지의 도를 이룬 스님들이 삶의 주변을 간소하게 하고,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지 않고 조용한 곳을 찾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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